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진무는 당세령이 곤히 잠든 틈을 타서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젠장, 날씨하곤…….’
지금의 상황만큼이나 우중충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이 빛을 막아 밤처럼 캄캄했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온통 ‘쏴아아’ 하는 소리뿐이었다.
폭우 속에서 이곳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놈들이 화광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끌어 주기만 하면 된다.
당세령은 막 나가기는 해도 똑똑한 여인이다. 분명 깨어나면 알아서 세를 판단하고 지원군을 부를 것이다.
진무 혼자서는 그 많은 복면인에 대랑까지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실력은 둘째 치고 하루를 지나지 않아 내력이 달릴 게 틀림없다.
일단 적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지원군을 기다린다.
팔십 년의 경험.
얼마나 수많은 위기를 넘겨 왔던가.
버틸 수 있다.
충분히.
진무는 눈을 감고 청각에 모든 것을 집중하며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앉은 자리에서 축축함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나와 있었음에도 이미 속옷까지 흠뻑 젖어 버리지 않았나.
멀리 도주하지 못했다.
놈들은 인근을 뒤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분명 가까운 곳에 있는 놈이 있을 것이다.
빗소리에 묻혀 있는 놈들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자, 어디냐?
그 순간 찰박이는 발소리와 함께 미세한 기운이 진무의 기감에 걸렸다.
파앙!
검을 뽑아 든 진무의 신형이 지면을 박찬 것과 동시에 폭우를 뚫고 쏘아졌다.
일격에…….
땅!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놈이 진무의 검격을 막고 밀려 나며 물 밟는 소리를 만든다.
하지만 이미 진무의 손에서 비틀린 검이 방향을 바꿔 횡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진무 도장!”
“……!”
취릿!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무가 곧바로 검극을 옆으로 꺾었다.
상대의 목 어림에서 한 치를 간신히 비껴 나간 검.
“당신은?”
“당가의 구척입니다.”
이런 망할 놈을 봤나. 하마터면 죽일 뻔했잖아!
하지만 잘되었다. 도움을 받을 인간이 생긴 것이다.
당세령이 깨어나자면 적어도 하룻밤은 지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구척을 이용한다면 지원군을 하루 일찍 부를 수 있었다.
“어찌 된 거요?”
“아가씨는 어떠십니까?”
서로 다른 질문.
누가 먼저 대답하고를 정할 시간이 없다.
“저쪽 절벽 틈에 있소.”
“아! 많이 다치신 겁니까?”
“아니, 자고 있을 뿐이오. 울혈을 풀고 내상을 다스리기는 했으나 갈빗대가 부러졌소. 당장 움직이기는 힘들 거요.”
“……아!”
구척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가 조금만 빨리 도착했으면…….”
“오히려 더 위험했겠지.”
“……예?”
“만약 그대가 구하고자 하다 잡혔다면 도주하지 못하고 목이 잘렸을 터.”
“…….”
냉정한 말이지만 이럴 땐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다.
“상대가 좋지 않소. 약 백여 명 이상의 정예. 적의 수뇌는 강의 경지. 결코 승부를 자신하기 어렵소. 또한, 그가 이끄는 수하들 중 의기에 이른 이가 다수요.”
이미 진무의 실력을 본 뒤였으나 그 말대로라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 개 문파 이상의 전력이 그를 뒤쫓고 있다.
“지금 즉시 지원군을 청하면 얼마나 걸리겠소?”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는…….”
“최대 이틀이란 소리군. 젠장.”
그만큼 버틸 수 있을까?
진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방법은 그뿐이었다.
“부르시오. 그사이 내가 놈들의 시선을 끌어 줄 테니.”
“설마 스스로 미끼가 되시겠다는 말입니까?”
구척의 눈동자에 놀람이 어린다.
이자는 진정한 도사다.
스스로를 희생해 사람을 구하려 하다니.
감탄과 놀람을 지나 존경까지 어린 눈빛에 진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화를 오래 나눌 시간이 없군요. 벌써부터 조여 오고 있으니.”
“……예?”
“모습을 감추시오!”
진무가 답도 듣지 않은 채 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촤라락!
“끄아악!”
폭우가 검격에 갈리는 소리에 이은 비명.
콰아앙!
거대한 포탄이 터트려진 듯한 굉음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진다.
“도주한다! 쫓아라!”
적들의 외침과 함께 뒤섞인 병장기 소리와 비명이 점차 멀어진다.
피웅! 푸식!
솟구친 신호탄이 빗물에 젖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고수들의 청각은 벗어나지 못했다.
구척은 급히 바위틈 안으로 모습을 숨기고 기척을 죽였다.
차좌좌좍!
멀리서 빗물을 스치며 달리는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몰고 있다.
진무가 스스로 공언한 대로 적들을 한곳으로 몰아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진무 도장, 그대가 아가씨를 위해 베푼 오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다!’
구척은 재차 다짐하며 바위틈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당세령을 향해 다가갔다.
* * *
깡! 까강!
스거걱!
달리는 와중에도 진무의 검은 쉬지 않고 휘둘러지고 있었다.
벌써 밤이 지나고 있었다.
진무의 검에 어린 것은 강기가 아닌 검기.
모든 내력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닌 최대한 버티는 싸움.
구척이 자신의 말대로 지원군을 불렀다면 아직 하루를 더 버텨야만 했다.
그의 내력으로 강기를 사용했다가는 하루는커녕 반나절을 버티기도 힘들다. 내력은 적과 싸우는 것보다 경공에 더 집중해야만 했다.
또한, 멀리 떨어져서도 안 된다. 적을 일정 범위에 묶어 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망할, 벌써 좁혀 들고 있어.
진무는 염소 떼를 모는 개가 되려다 도리어 몰이꾼에 몰린 범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놈들이 자신의 꼬리를 따라야 하는데 이미 앞선 위치에서 둘러쳐 오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절대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한 패거리가 그를 둘러싸면 다른 패거리가 원을 그리듯이 그 주위를 겹친다.
쉽지 않다. 악당이라는 녀석들이 왜 이렇게도 악착같단 말인가? 나쁜 역할을 하고 있으면 좀 나태해져도 되는 것 아닌가?
거기다 동료가 죽어 가는데도 겁을 집어먹지 않는다. 동료애라고는 없는 놈들 같으니.
슈가각!
전방에서 날아오는 검격에 진무가 급히 허리를 젖혔다.
스스스.
배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검.
판단이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진무는 허리를 젖힌 채로 검을 낮게 휘둘렀다.
까가각!
뼈마디까지 베어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린다.
자신을 향한 공격을 피하며 상대의 두 발목을 절단해 버린 것이다.
그러곤 뒤로 공중제비를 넘어 발이 닿는 순간 차 내었다.
파앙!
빗물에 발이 미끄러지긴 했으나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반응이 평소보다 느릴 것이다.
쏘아지는 진무의 신형이 빗속을 뚫으며 포위망을 구축한 적들을 베어 내었다.
“막아라!”
막아?
막히겠냐? 잡히는 순간 뒈질 텐데?
진무는 곧장 검에 강기의 기운을 담아 뒤로 뿌렸다.
추아악!
원을 그린 검강이 반월을 만들며 뒤쫓는 이들을 피떡으로 다졌다.
위기를 느끼고 몸을 숙여 피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뼈째 잘려 쓰러진다.
몇 놈이 죽었는지, 몇 놈이 부상을 입었는지 판단할 여유도 없었다.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것은 무월각의 노인 대랑이다.
이놈들이 이 정도로 훈련되었다면 그는 절대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진무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놈은 지금 범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몰이꾼들이 범을 한껏 지치게 만들어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몰아붙이고 나면 전문적인 범잡이들이 나선다.
먼저 나섰다가는 상처 입은 범에게 되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도 고양이를 무는 판에 범은 오죽할까?
치밀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
그는 아마도 어디선가 포위망을 따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완벽한 일격으로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강기를 뿌려 적의 추격을 늦춘 진무는 성글어진 그물의 틈을 향해 뛰어들었다.
“놈이 빠져나간다! 일 조에 연락을 취해라!”
삐이익!
신호탄이면 좋았을 것인데. 화약이 젖어서 안 터지면 얼마나 좋아.
진무의 기대와는 달리 사방에서 호각성이 연이어 들려온다.
제기랄. 어쩔 수 없다.
잘 쳐진 그물에 걸리면?
그물을 끊어 버리면 되지!
파앙!
진무는 가공할 만큼의 진기를 용천혈에 때려 박고는, 이내 거친 물보라를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 * *
“으으…….”
“아가씨!”
당세령이 신음을 내며 잠에서 깨어나자 곁에 있던 구척이 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구척 아저씨?”
“예.”
“……?”
정신을 차린 당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없다.
진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셨습니다.”
“……아.”
당세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의 수가 적지 않았다.
더욱이 그 노인. 천잠보의를 뚫고 자신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남길 정도로 강하지 않았나.
당세령은 서둘러 벗어 두었던 천잠보의를 걸치고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었다.
“아가씨?”
구척이 당황해하면서 불렀지만 당세령은 이미 풀어 둔 은유검을 허리에 감고 짐 속에 있던 몇 개의 암기를 챙기고 있었다.
진무를 도우러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제 막 폭우의 밤이 지나갔고, 지원군이 오자면 최소 하루는 더 기다려야만 했다.
“아가씨!”
구척이 그녀의 행동을 막기 위해 소매를 잡았다.
“놔!”
“……안 됩니다.”
“닥쳐.”
분노로 어둡게 가라앉은 당세령의 검은 눈동자가 구척을 향한다.
“힘으로라도 막겠습니다.”
“그럼 막아 봐.”
당세령이 기운을 일으키며 살기를 끌어 올리자 구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면 저를 죽이고 가십시오.”
“…….”
구척은 완강하게 버텼다. 이번만큼은 물러날 수 없었다.
진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당위가 구척에게 내린 명은 당세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 당세령이 목숨을 잃을 게 뻔한 상황으로 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심지어 부상까지 입지 않았는가.
설사 자신이 죽는다 해도 당세령의 안전만은 지켜야 했다.
“지원군을 불렀습니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전에 그가 죽기라도 하면?”
“그, 그건…….”
대답할 말이 없다.
“구척 아저씨. 나 당세령이야. 당가의 자손이고, 암황 당위의 딸이야. 당가는 마주한 적 앞에서 등을 보이며 물러나지 않아. 적의 피와 시체를 밟고 나아갈 순 있어도.”
“…….”
“난 당가의 일원으로서 누군가에게 지켜져야 할 바에야 적들의 목을 몇이라도 더 베어 내고 죽기를 택하겠어.”
당가는 적을 앞두고 물러서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켜 온 전통이었고, 당가를 상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죽더라도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됩니다.”
구척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안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당세령의 고집도 대단하지만 구척 역시 당가의 무인인 만큼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로 죽기 전에는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당세령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처럼 목을 베고 나아갈 수도 없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당세령이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말 들을 테니까 놔요.”
“…….”
“그리고 일단 좀 저쪽으로 가 봐요.”
“……?”
“내가 아저씨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피를 봐야 해요?”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당세령이 째려보자 구척이 황급히 그녀의 소매를 놓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귀 막아요!”
“……예!”
그리고 잠시 뒤.
“아가씨?”
기다린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가자 구척이 슬쩍 당세령을 불렀다.
대답이 없다.
설마?
구척이 급히 그녀가 있던 곳으로 나왔다.
“…….”
없었다.
자신에게 소피를 본다고 자리를 비키게끔 해 놓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혹시나 소리를 듣게 될까 귀까지 막은 것이 실수였다.
망할…….
구척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황급히 바위틈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한쪽 벽에 몸을 숨겼던 당세령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차분히 기감을 퍼트려 살폈다면 몰라도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 당황해 버린 터라 그럴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 미안. 그를 혼자만 죽게 할 순 없어. 그럼 너무 외롭잖아.”
당세령은 자신의 짐을 챙겨 구척과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