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작고 아담한 화원.
길 가다가 그저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 구미초요, 석죽화라.
무척이나 잘 꾸며진 화원을 채운 것은 이상하게도 그런 흔하디흔한 들꽃이었다.
사박, 사박.
화원 한구석에 왜인지 쓰러져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던 여인이 기다리기 무료했음인지 걸음을 내디딘다.
가녀린 손이 두툼하게 흙을 떠 올리고, 휘어진 줄기에 정성스레 대를 세우는 와중에 화원의 주인이 찾아와 여인을 불렀다.
“대모께선 여전하시군요.”
천천히 다가선 노인의 말에 중년 미부가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삼궁주님을 뵙습니다.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가 송구합니다. 쓰러진 꽃 하나가 너무도 가여웠던지라.”
“허허, 과례를 삼가시지요. 내궁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남들이 욕이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아닙니다. 미욱한 제가 어찌 최전선에 계신 궁의 어른께 함부로 하겠나이까?”
“자, 그만하시고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예.”
대모가 화원을 나와 삼궁주를 뒤따랐다.
그녀가 움직이자 곱게 열을 지어 서 있던 여인들이 흐트러짐 없이 뒤따랐다.
내궁주 대모 종려군.
그리고 내궁 최정예이자 그녀의 수족인 분봉원(分封院)의 고수들.
모두가 경국지색이라 불러도 좋으리만큼 뛰어난 미인들이었지만 그 안에 품은 독기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다.
외관상으로는 연약하기 그지없으나 종려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분봉원의 전력은 능히 일문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본궁의 안가를 다 찾으시고. 소궁주의 훈육에 바쁘신 줄로 아는데요.”
내실로 들어온 삼궁주는 직접 따른 차를 내밀며 친근하게 물었다.
“바쁘긴요. 소궁주께서는 홀로 잘 성장하고 계신 것을요.”
“그런가요?”
인사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은 일견 친근해 보였으나,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진심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저런, 마치 일이 없으면 못 볼 사이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못 볼 사이는 아니나 아무 용건도 없이 내궁의 주인께서 이곳까지 행차하실 이유도 없지요. 더욱이 분봉원까지 대동하셨는데 제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둘 모두 얼굴은 웃지만 말 속에 날선 칼날이 담겨 있다.
천년 묵은 구미호 같은 년.
대모 종려군을 바라보는 삼궁주의 시각이었다.
언제였을까?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물어 뜯길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궁주님.”
“말씀하시지요.”
“이번 일은 꽤 실망스러웠습니다.”
“…….”
감정을 숨기는 것 정도는 여반장처럼 쉬운 삼궁주였으나 이번만큼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조는 나긋나긋했으나 질책성이 가득한 말.
대궁 이하 각 궁과 내궁은 별개의 단체이자 동일한 위치선상에 있었다.
말인즉슨 대궁주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삼궁주의 행사에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허허, 대모님께서 과한 참견을 하시는군요.”
“그런가요? 하지만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랍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삼궁주가 종려군의 의도를 알아채려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자 그녀가 품에서 작은 옥패 하나를 꺼냈다.
“그건!”
옥패를 본 삼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종려군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했다.
“삼궁주는 명을 받들라.”
“…….”
삼궁주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으나 대궁주의 명을 전하러 온 이상 그녀는 철저히 대궁주의 대리인이었다.
“삼궁주 상관평이 대궁주의 명을 받듭니다.”
그가 무릎을 꿇자 종려군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삼궁주는 고작 무공 심결 하나를 얻기 위해 본궁의 뛰어난 무인인 대랑 오척산과 청랑대를 잃었다.”
아직 세부적인 보고조차 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런데 어찌?
작은 일은 아니었으나 보고하지 않은 일에 대해 대궁주의 명이 떨어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동안 본궁을 뒤쫓은 정무맹에 꼬리를 밟혔으니 삼궁주 상관평은 진행하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조속하게 환궁하라.”
“……!”
고개를 숙여 의아함을 품었던 상관평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환궁이라고?
설마하니 그런 명을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이번 일로 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청랑대의 일부가 당가에 포로로 잡혔으니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마땅했다.
중원에 깔아 둔 안가만 수백이라 흔적을 지우고 이동하는 것이라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세작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정무맹의 시선을 돌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과한 처사가 아닌가. 환궁을 하게 되면 그동안 정무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삼궁이 노력해 온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된다.
“환궁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지금까지 삼궁이 정무맹 곳곳에 자리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삼궁주! 지금 항명을 할 참인가?”
그녀의 일갈에 상관평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졌다.
“그대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불필요한 심공을 얻으려 함으로써 궁에 큰 피해를 초래하였다. 마땅히 목을 베는 것으로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나, 그간의 노력을 인정하는 바 내려진 명이니 따르도록 하라.”
일신의 영달이라니.
다른 것도 아닌 양의심공이었다.
그동안 그가 조사해 온 양의심공의 파괴력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절대로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명에 대한 불복은 곧 다른 뜻이 있음을 드러냄과 같다.
그녀가 분봉대를 이끌고 온 진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혹시 모를 항명에 대비한 것이다. 그들이 대궁주에 대한 충성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음을 알면서도.
종려군이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삼궁주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옥패를 품에 집어넣고 자리에 앉았다.
“삼궁주, 제가 전할 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조금 전까지 서슬 퍼런 기세를 흘리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지만, 상관평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하면 그간 정무맹에 깔아 둔 삼궁의 세작들은 어찌 되는 게요?”
“모두 내궁에서 인수하라 하셨습니다.”
“……!”
이것이었구나.
상관평이 마음속 깊이 탄식을 흘렸다.
여지껏 기울여 온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물론, 고스란히 내궁에 가져다 바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것이오?”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어찌 감히?
생글거리며 웃고 있지만 그 속내를 알아채지 못할 상관평이 아니었다.
이 한 번을 위해 그동안 이빨을 감추고 있었던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빠르게 치고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삼궁 전체가 그녀에게 먹혀 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상관평이 수십 년간 노력해 온 것들을 고작 그 한 번을 이용해 통째로 삼켜 버린 그녀의 능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물어 뜯길까 걱정했던 것을 비웃듯 이미 목덜미에 이빨을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찌 되오?”
“앞으로 내궁에 기거하시면서 소궁주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지요.”
든든한 후원자. 듣기에는 좋은 말이나 담긴 뜻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궁 안에서 기거하라 함은 완전히 손발을 잘라 놓겠다는 뜻.
상관평은 실각된 것이다.
“그렇군. 떠나는 마당에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세요.”
“양의심공은 어찌할 거요?”
상관평의 말에 종려군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작 심공에 집착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고작 심공이 아니오!”
“저런, 이 같은 일을 벌이고도 기세가 여전하시군요.”
“…….”
“알아보니 네 개의 조각 중 하나라도 잃으면 쓸모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역시 상세하게 알고 있다.
양의심공에 대한 내용은 삼궁 내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다.
‘이년이 진작부터 삼궁에 제 사람을 심어 두었던 모양이구나. 좀 더 경계했어야 함인데.’
자신의 수하를 너무나 믿었던 것이 실수라 자책했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쓸데없는 일에 치중하기보다는 후속 처리가 더 중요하겠지요.”
그녀의 매끄러운 미소에 상관평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렇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양의심공을 찾지 않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지금의 상관평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미 늦어 버린 일이다. 차라리 본궁으로 돌아가 빼앗긴 삼궁을 되찾을 길을 모색하는 편이 훨씬 빠를 터.
‘언젠가 네년도 목줄을 잡힐 날이 있을 것이다.’
상관평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종려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뒤처리를 부탁드리겠소.”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죠. 부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소궁주님을 보필하는 일에만 성심을 다해 주시길.”
“고맙소. 잊지 않으리다.”
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가로운 낮, 들꽃 만발한 화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 * *
사천에서의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이곳이란 말인가?”
“예.”
“음…….”
밤의 어둠을 틈타 거대한 장원으로 접근한 일백여 명의 인물들.
그들이 은밀하게 모습을 감추고 주시하는 장원은 마치 거대한 성처럼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같이 야행복을 갖춰 입었으되, 복면은 쓰지 않았기에 달빛이 스며들자 그들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정무맹의 비흔이자 개방의 영웅인 무풍개 양소방이었다.
당가에 잡힌 청랑대의 무인들을 심문하여 얻어 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청랑대를 이끌었던 것은 대랑이라는 인물이었고, 당위의 말에 의하면 그 무위가 정무칠성에 근접한다 했다.
또한 여섯 개의 조로 나누어진 각각의 조장은 의기의 경지, 즉 거대 문파의 장문인이나 장로급의 실력이었다.
당가에 잡혀 있는 무인들 중 가장 약한 자가 이미 현기의 경지. 지금 양소방이 이끌고 온 정무맹 예하 최정예 현무단보다도 뛰어난 전력이다.
그리고 밝혀진 그들의 소속.
삼궁.
하나가 아닌 셋.
청랑대는 그 휘하에 있는 무인대였다.
만약 한 개의 궁에 청랑대에 비견되는 수 개 이상의 무인대가 존재한다면 이는 정무맹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조직이란 뜻이다.
양소방은 삼궁이라는 곳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허, 코앞에 있음에도 몰랐단 말인가?”
양소방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정무맹이 있는 호북성의 또 다른 거대 도시 의창(義昌). 삼궁은 의창에 위치한 거대한 장원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바로 앞에 적을 두고도 몰랐다.
특히나 의창은 제갈세가의 분가가 있는 곳이자, 정무맹의 영향력이 지대한 곳이 아니던가?
“음. 당가와 제갈의 전력은 어디에 대기하고 있는가?”
“제갈은 을무반 오 조와 함께 남문에, 당가는 을무반 육 조와 함께 북문에 대기 중입니다.”
“을무반의 아이들에게는 임무를 제대로 전했는가?”
“예.”
화산의 제자이자 현무단주인 옥당이 대답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너무 고요하군요. 정문 위사들마저 저리 졸고 있지 않습니까?”
“음…….”
옥당의 말이 옳았다.
정무맹에 비해서도 규모가 작지 않은 조직이었다.
대랑이라는 자를 포함해, 청랑대 같은 거대 무인대가 전원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너무 고요하다.
또한 장원을 둘러싼 담벼락이 이 장에 달해 안을 살피기 쉽지 않았다. 말이 이 장이지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두어 번에 걸쳐 넘기도 버거운 높이였다.
“담 교두.”
“예. 비흔.”
“지금 즉시 을무반 칠 조를 이끌고 담을 넘어 서문을 열고 진입로를 확보하게.”
“알겠습니다.”
다른 곳이라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면 될 일이었으나 이곳에서는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장원의 주인 때문이었다.
과거 대학사를 지낸 상관평.
정쟁에 밀려 은퇴하기는 하였으나 그 인물 됨됨이와 온정으로 인해 의창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과한 소란이 일어나면 관부와 마찰이 생길 수 있었다.
삼궁이라는 단체의 수장임은 그의 숨겨진 신분이니, 그 처리 또한 은밀하고 깔끔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더욱 최정예만 추려 온 참이었다.
“현무단주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남문과 북문에 대기 중인 당가와 제갈세가에 신호를 보내게.”
“예.”
“놈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모르니 함정에 각별히 주의하고 진입과 동시에 신속하게 내부를 제압하라 이르게.”
“예.”
“그럼, 시작하세.”
양소방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동안 손발을 맞춰 온 을무반 칠 조가 담평익의 손짓에 따라 준비했다.
그리고 현무단의 무인들이 벽에 등을 대는 순간.
“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