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전쟁은 끝났지만 참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부서진 건물이야 새로 지으면 될 일이고 뿌려진 피는 닦아 내면 될 일이지만, 처참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부러진 가시처럼 마음속에 깊숙이 박혀 시간이 흘러도 그 존재를 남긴다.
단지 무형의 가시이기에 세월이 흐르며 조금씩 무감각해지고 옅어질 뿐.
이강백의 습격으로 그들과 싸웠던 곤륜의 제자 수십 명이 전장에서 고혼이 되었다. 전통이 그러해 위패조차 세우지 못한 그들은 남은 제자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응어리가 되어 맺혔다.
그들도 그러할진대 아무런 잘못조차 하지 않았던 민초들이야 오죽할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찾아온 죽음 앞에 살아남은 자들은 그 참담했던 기억을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하리라.
그들의 죽음 앞에 진무가 기억하는 것은 열두 살의 소년이었다.
마교와의 싸움이 끝난 이후 곤륜에 돌아가려 양풍에 들렀다.
딱히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오랜 인연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나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보니 마음이 울적해져 왔다.
아직까지 진무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도동의 기억 때문인 것일까.
이렇게 될 것이 뻔해 과거에도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지 않았음인데.
사파인들은 으레 그랬다.
정파인들처럼 가문을 이루고 일파를 세운 자들은 서로를 형제같이 아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죽음에 슬퍼한다.
하지만 자신의 영달을 위해 뭉친 사파인들은 다르다. 일상이 전쟁이고 전투다.
이는 마교와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옆에서 누가 죽어 가도 자신만 잘되면 그만이다.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옆에 있던 자가 내일이면 어디서 칼을 맞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 슬픔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그 죽음에 대한 복수를 어찌 다 해 준단 말인가?
그렇기에 진무 또한 인연을 따로 맺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자는 있어도 그에게 충성하는 자는 오직 천우명과 한두 명의 오래된 인연뿐이었다. 진무 또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그것이 편했다.
철저히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사패천주가 된 이후로 내린 명이 있었다.
무림인이 아닌 자에겐 폐는 끼쳐도 죽이지는 말 것. 특히나 여인과 아이를 죽인 자는 어떤 경우라도 엄벌에 처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파란 그런 놈들이니까.
도박에 미치고 술에 미치고 남의 물건을 탐하는 데 미쳐 있는 놈들.
“진무 도장. 하면 우리는 먼저 산으로 복귀하겠네.”
양풍에 이르러 무너진 현포루를 바라보는 진무를 향해 함께 온 운검이 말했다.
“예. 저는 조금 더 머물다 돌아가겠습니다.”
“음……. 그리하게.”
운검은 삼청검수들과 함께 서둘러 양풍을 떠났다.
방유척으로 위장한 일행에 대한 조사가 시급했기 때문이었고, 운암을 비롯하여 부상을 당한 제자들의 치료 역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떠난 후 진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해에서 곤륜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진무의 기억이 남은 곳, 현포루.
술이라도 사 와야겠다.
그 넉살 좋은 꼬맹이가 술을 마시진 않겠지만 무너진 현포루에 뿌려 넋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젠장, 이게 뭔 청승인지.”
진무가 짜증스럽게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술을 구하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마교의 습격 때문에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충격이 컸겠지. 그들로서도 이만한 사건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연일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소규모였을 테고.
관인들은 사건 현장을 수습하느라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다섯 군데의 객점을 돌았을까? 겨우 문을 연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제기랄, 술 한 병 받는 일이 뭐 이리도 어렵단 말인…… 어?
다각, 다각, 다각.
익숙한 녀석이 익숙한 말 한 마리를 끌고 멀리 골목 어귀를 스쳐 지나간다.
어???
진무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재빨리 눈도 비볐다.
“……자, 잘못 봤나?”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그 꼬마였던 것 같은데…….
설마 귀신?
소름이 쫙 돋아 오른다.
“무, 무량수불…….”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좀 잔잔해진다.
그, 그래. 귀신은 무슨. 이른바 기억의 잔상이라는 거겠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귀신을 본단 말인가?
아니지, 도사들이 익히는 술수 중에 법술이라는 게 있다. 부적을 써서 액귀를 몰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법술을 따로 배우진 않았는데? 설마 내공이 올라가면서 귀신도 보게 된 건가?
망할 도가 내공 같으니. 이런 효과가 있을 거라면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진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말과 소년의 환상을 찾아 바람처럼 뛰어갔다.
휙, 휙!
사거리 샛길까지 모조리 뒤졌으나 없다.
“역시…….”
잔상이 분명하다. 진무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귀신 보는 능력이라도 개방된 줄 알았다.
하긴 이상할 것은 없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귀신 아닌가?
진무의 몸에 씐 혁련무강 귀신.
별별 생각과 함께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수, 술 사자, 술.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빨리 끝내고 곤륜에 올라가야지.”
진무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객점에 들어갔다.
쫓기듯 술을 사서 현포루로 돌아가는데, 저 멀리서 또 보이는 익숙한 것들.
이런 씨발! 나 진짜 귀신 보는 거야?
더구나 그 소년과 말 귀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뛰고,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가위는 잘 때만 눌려야지, 뭔 맨정신에 처눌리고 지랄이야!
“무량수불, 무량수불, 무량수불.”
진무가 다급히 눈을 감고 도호를 외기 시작했다.
“도……사……니……임……?”
아, 제발 그따위로 늘여서 말하지 마라!
산 사람은 안 무서운데 귀신은 무섭거든!
진무는 자신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아서 미친 듯이 도호를 외워 댔다.
아, 이 소년이 이유 없이 죽어서 원귀가 되었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제발 가렴. 나는 너한테 딱히 잘못한 것도 없잖아.
철전도 듬뿍 주고, 은원보도 줬는데…….
설마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거 아니야. 너의 넋이라도 위로할까 싶어서 이렇게 술도 샀잖아. 나 마시려던 거 아니다. 진짜야.
진무는 눈을 질끈 감고 도호와 함께 자신이 알고 있는 귀신 쫓는 법주까지 모조리 외웠다.
“야!”
귀신이 말을?
그런데 여자 목소리다. 그것도 무척이나 익숙한.
“…….”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니 소년과 함께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당세령?
이년은 갑자기 왜? 이년도 죽었나?
진무는 눈앞에 나타나서 허리에 양손을 얹고 눈을 흘기는 당세령을 멍청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도와 달랬지, 내가!”
“…….”
찰지게 욕도 한다.
내내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산산이 깨지고,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알아?”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아니, 혹시 그럼 저 자식도 귀신이 아닌 거야?
진무가 말고삐를 잡고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던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사, 살아 있냐?”
“……예?”
소년의 얼굴에 더욱 물음표가 떠오르고.
“뭔 개소리야? 얘가 그럼 살았지 죽었냐?”
“아! 살았구나. 하아…….”
진무는 그제야 뻣뻣하게 굳었던 사지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진짜 귀신인 줄 알고 대로변에서 실례까지 할 뻔했다.
“이런 쌍! 내 말 듣냐? 니가 안 도와줘서 아빠한테 잡혀간 뒤로 며칠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했다고!”
좀 더 잡혀 있지 그랬냐.
안 그래도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년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드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온다.
그만 좀 해라, 그만 좀.
“그나저나 방 안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탈출했냐?”
“독 풀었다.”
“도, 독? 당가 무사들한테?”
진무의 놀람에 당세령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명불허전 미친년.
제 가문의 무사들에게 독을 풀고 어찌 저리 자랑스러워할 수 있단 말인가?
“크크크, 고생들 좀 할 거야.”
와중에 음흉하게 웃는 꼴이라니.
넌더리가 난다는 듯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응? 잊었어?”
“뭘?”
“추향고.”
“아! 만리추종향!”
끄덕끄덕.
젠장, 잊고 있었다.
죽이지 않는 이상 이 망할 년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튼, 나 안 보고 싶었어?”
“내가 왜?”
“왜는? 장차 부인이 될 사람인데.”
여전히 제정신 아니구만.
불현듯 지난 일이 생각난 진무가 버럭 화를 냈다.
“야!”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너 청상이랑 청우한테 뭐라고 했어! 사숙모라고? 니가 왜 사숙모야?”
“아, 들었구나.”
당세령이 눈을 휘며 배시시 웃는다.
아, 들었구나? 반응이 그게 전부냐?
이게 어디서 앞길 창창한 도사 팔자를 망쳐 놓으려고 그딴 말을 함부로 지어내?
그리고 뭐?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고?
“왜? 싫어?”
싫다.
“도사들도 결혼하더만. 내 다 알아봤다. 화산에는 혼인한 제자들도 꽤 있다더라.”
우리 무당에서는 절대로 금하고 있다, 이년아!
“무당은 금한다며?”
“…….”
“걱정 마. 나처럼 뛰어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여인이 결혼을 해 주겠다는데 사문의 어른들께서 설마 반대하겠어?”
얘 또 혼자 꽃밭 굴러다니네. 누가 뛰어나고 누가 총명하며 누가 또 아름답다고?
하아, 말을 말자. 괜히 머리만 복잡할 뿐이다.
“그나저나 마교가 습격했었다며?”
“그래.”
“개자식들. 싸우려면 딴 데 가서 싸우지 애꿎은 사람들에게 피해나 주고.”
“그러게.”
“여하튼 중원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놈들이야.”
응, 그딴 말을 북리도천이 들어야 니가 죽을 텐데.
어쨌든 당세령이 활기차게 지랄을 해 준 덕분에 정신이 좀 맑아졌다.
“근데 니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
“누구, 대웅이?”
소년의 이름이 대웅인가 보다.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당세령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실은…….”
하루 전, 진무가 마교도들과 싸우고 있던 그때였다.
당위가 삼궁주라는 자들을 쫓아 호북성으로 떠난 다음 당가를 탈출할 수 있었던 당세령은 곧장 진무를 쫓아왔다.
그녀의 말대로 추향고와 만리추종향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진무를 찾아 청해성에 도착한 참에 한혈마를 끌고 돌아다니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말을 계속 끌고 다녔어?”
“……그건 아니고, 도사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곤륜으로 가던 길에 아가씨를 만나서.”
돌려주려 했다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봤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인데.
어린 녀석이 신의가 제법이네.
“어쨌든 이 녀석, 말이 아파서 마방(馬房)에 간 사이에 현포루가 습격당해서 화를 면했나 보더라고.”
“아!”
다행이다.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이놈은 살았으니 다행이다.
침울한 표정에서 전해지는 소년의 마음에 진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충격이고 상처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