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아름드리나무 기둥 수십 개가 지붕을 단단히 떠받들고 삼 층에 달하는 천장이 통으로 뚫린 대전각 내부.
감숙의 패자인 천웅방의 위세에 어울릴 만큼 실로 거대한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청석을 깔아 만든 중앙 통로 좌우로 노회한 인상의 고수들이 열을 맞추어 서 있었고.
청석길의 맨 끝에 놓인 태사의에는 홍옥의 그것처럼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얼굴을 한 중년의 무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감숙의 주인이자, 사패오왕(邪覇五王)이라 불리며 정무칠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웅방주 원공후였다.
이미 그 아들에게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야 할 시기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꼿꼿하니 정정하고 강단이 넘쳐 보였다.
“방주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늘어선 줄의 맨 뒤편에 있던 장로 경천동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소리를 쳤다.
“들은 대로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하는 원공후의 모습에 경천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됩니다. 결정을 철회해 주십시오.”
“그럴 순 없다.”
“방주님!”
경천동이 방주 면전에 대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악을 쓰는 것은 무척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원공후의 결정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주님, 경 장로의 말이 옳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씩씩거리는 통에 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천동을 대신해 대장로 공평무가 나섰다.
“나의 결정은 변함이 없다.”
원공후의 말에 그의 앞에 열을 지어 서 있는 장로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졌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원공후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싸늘한 침묵이 천웅방의 대전각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아버님!”
원공후의 지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다섯 명의 인물.
선두에 있는 것은 큰아들이자 소방주인 원천호였고, 그 뒤를 따른 넷 또한 모두 천웅방에서 핵심적인 무인으로 성장한 원공후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었다.
세간에서 그들을 일컬어 감숙오호(天雄五虎)라 부를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천웅방의 미래였다.
특히나 소방주는 나이 서른 전에 의기를 깨달았을 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인 무인이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원공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 참석지 말라 했거늘!”
언짢은 듯 원공후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으나 원천호와 그 동생들은 개의치 않고 걸어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님.”
“…….”
“홀로 나서시겠다는 결정을 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원천호의 물음에 원공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했다.
“잘못된 결정입니다.”
“닥치거라!”
“소자들은 따를 수 없습니다.”
“닥치라 하지 않더냐!”
더욱 높아진 목소리가 고성이 되어 대전각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원천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원공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웅방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여느 사파의 세력들과 달리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 오며 감숙을 다스려 온 문파입니다.”
“…….”
“천웅방의 장로들과 수많은 무인들은 여태껏 아버님께서 내린 결정에 단 한 번도 반문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음…….”
“아버님께서 사황 그분과 함께 사패천을 세우실 때도 우리 천웅방은 언제나 선봉에서 기꺼이 피를 흘렸다 들었습니다.”
힘이 가득히 실린 원천호의 말이 대전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장로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고,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사황께서 돌아가신 이후, 뒤를 이은 유월청이 어찌했습니까? 바른 소리를 했던 장로 중에 누가 남아 있습니까?”
“…….”
“유월청은 제 잇속만 채우고 사패천의 본성을 제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무리들로 채우며 뒤흔들었고, 그에 실망하신 아버님께서 탈퇴를 결심하셨을 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랐습니다.”
침묵 속에서 숨 한번 쉬지 않고 이어지는 원천호의 말에 원공후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의 결정만큼은 절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
“저희가 아버님의 그늘에 기대 목숨이나 부지할 정도로 나약해 보였습니까?”
“…….”
“다 같이 싸울 것입니다. 죽더라도 전장에서 함께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원천호의 눈에서 불길이 토해져 나왔다.
그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쉰 원공후가 달래듯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놈들아! 내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하지만 상대는 천우명이란 말이다.”
* * *
뭐? 천…… 누구?
회의의 내용을 듣기 위해 평생 해 보지 않았던 도둑고양이 노릇까지 해 가며 대전각 천장의 그늘 속에 숨어들었던 진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갑자기 그 멍청한 놈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사패천 본성에서 천웅방을 공격하기 위해서 오고 있는 것이 천우명이라고?
이게 도대체 뭔 소린지?
* * *
“천호야, 그와 함께 철검단 전 병력이 오고 있단 말이다. 너도 그를 알지 않느냐.”
“알지요. 그분을 존경했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돌아가신 사황께서 만드신 사패천의 이름을 지키는 것만을 충성이라 믿는 것은 우직함이 아니라 멍청함임을 깨달았기에, 더는 존경하지 않습니다.”
“천호야.”
“아버님, 어찌 이리 약해지셨습니까? 사황 그분의 앞에서도 떳떳하게 품은 바를 말씀하시던 기개는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되레 지금보다 그때가 더 위험하였습니다. 지금은 싸워 볼 생각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천호야. 어찌 그분과 지금의 천주 따위를 비교한단 말이냐?”
“예. 비교가 안 되지요. 그분께서는 화를 내고 본인 고집대로 행동하시면서도 주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
“아버님. 아버님께서 실망한 지금의 사패천입니다. 아버님이 목숨을 버려 저희가 연명한다 한들, 어찌 유월청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천호야.”
원공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데 원천호가 제 옆에 놓았던 칼을 뽑아 바닥에 놓는다.
서슬 퍼렇게 벼려진 도신이 하얗게 빛나며 당장이라도 피를 갈구하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머지 아들도 모두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 이놈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야!”
원공후가 벌떡 일어나며 노성을 터트리자 대전이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아버님, 제가 군문의 장수는 아니지만 배수의 진을 치고 전장에 나서는 결의에 대해 배운 바 있습니다.”
“이놈이!”
원공후는 아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수염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버님, 죽음을 각오하고 홀로 가실 생각이시라면 차라리 저의 목을 베고 가십시오. 목숨을 구걸하라 하시는 말씀을 따르느니 죽기를 택하겠습니다. 부디 적의 손에 맡기지 마시고 직접 베어 주십시오.”
“베어 주십시오!”
원천호가 절을 올리며 엎드리자 나머지 아들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
“이, 이 감히…….”
평생 동안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를 고집스럽게 관철해 왔던 원공후였으나, 자식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팬다고 들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 하나로 끝낼 생각이었다.
사패천에게 반기를 든 것은 사실이나 본성에서 천우명이 철검단 전부를 이끌고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그라고 해도, 잘못된 것을 보고 들었으니 자신마저 돌아서면 바로잡으려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천우명은 천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곧 충성이라 믿었고 죽은 사황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우직하지만 멍청한 사람.
마치 눈이 가려진 말처럼 내려진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끝까지 달리는 고집스러운 사람.
물론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 또한 그 나름대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숙의 패자로 군림해 온 천웅방이라고 해도 철검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천우명도 천우명이지만, 철검단은 사황 혁련무강이 직접 길러 낸 전장의 귀신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피해를 보더라도 받은 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천웅방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었다.
그렇기에 원공후는 홀로 나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걸한다는 것은 치욕이나, 그것이 천웅방의 역사를 이어 가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 아들 원천호는 능히 후일 중원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였다.
그렇기에 반드시 살려야만 했다.
또한,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천우명이 생각을 바꾼다면, 그가 사패천을 옳은 길로 이끌 것이라는 한 줄기 바람도 품었다.
그런데 어찌 자식들이 되어 아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방주님, 재고해 주십시오.”
“옳습니다. 내일 점심나절이면 철검단이 당도할 것입니다. 서둘러 병력을 배치해야 합니다.”
원천호 때문일까?
두 줄로 늘어서 있던 장로들마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마치 자신들의 목도 베어 달라는 듯이.
“자네들까지…….”
원공후가 주먹을 움켜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내 고집이 꺾인 것이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던 그것이.
자신의 아들들로 인해서…….
* * *
“천우명, 이 미친 자식이!”
더 듣고 있다가는 눈에 서린 핏발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던 진무는 서둘러 대전각을 빠져나왔다.
철검단이라니?
어째서 사패천에서 천웅방을 토벌하러 오는 것이 철검단이란 말인가?
아니 제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말려도 모자랄 판에 직접 칼을 들고 찾아온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다 못해 뚜껑이 열려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망할 자식, 멍청한 놈, 사패천을 맡겼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야!”
진무가 자신의 제자 유월청을 떠올리며 갖은 욕설을 쏟아 내었다.
일단 거처로 돌아가자.
술을 목구멍에 처넣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오냐. 천우명 이놈의 새끼. 어서 오너라.
내 니놈 낯짝을 보고 그간의 일을 반드시 들어야겠다.
진무가 씩씩거리며 돌아온 거처에서는 당세령과 운암이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적생대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술!”
오자마자 술을 찾는 진무의 흉신악살 같은 얼굴에 당세령이 얼떨결에 술병을 건넸다.
술 한 병을 안주도 먹지 않고 완전히 비워 버렸으나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한 병 더!”
“…….”
무려 세 병을 연달아 비워 낸 뒤에야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 내고.
“이놈의 새끼들. 내 그냥 두나 봐라.”
진무가 씩씩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이 부서질 듯이 닫아 버렸다.
쾅!
“또 저러시네요. 저래선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못하겠죠?”
진무가 흉흉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살기를 줄기줄기 뽑아내고 있었던 터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운암이 당세령을 쳐다봤다.
그리고 당세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저 혼자 길길이 날뛰고 있다.
“무진 님께선 정말 대해(大海)와 같은 성격을 가진 듯합니다.”
이 도사 놈은 또 무슨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걸까?
큰 바다와 같다니?
어딜 봐서 진무가 대해 같은 성격이란 말인가?
당세령이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자 운암이 중얼거렸다.
“하루는 너무도 잔잔해서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 끝이 보이지 않다가, 또 하루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무섭게 변하니 예측을 할 수 없다고 할까요?”
“……흠.”
당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싸했다. 종잡을 수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진무의 성격에 빗댄 말이라면 그 이상의 표현을 찾기도 힘들 것 같았다.
역시 도문의 제자라서 그런가?
비유에서 아주 현기까지 느껴진다.
좋은 말로 하자면 그렇고, 약간 돌려 까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진무가 화만 내고 입을 처닫고 있으니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말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