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원공후가 진무를 가만히 응시했다.
싸움이 있던 그때, 적생을 데리고 온 진무가 그를 전음으로 꾸짖었던 때가 생각났다.
‘목이 아무리 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을 마시지 말라는 말을 잊었던 것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원공후는 한 사람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혁련무강이 감숙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었다.
평생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왔던 원공후였다. 혁련무강이 후계로 유월청을 지목했을 때, 크게 화를 내며 감숙으로 돌아가는 그를 혁련무강은 꾸짖기보다는 되레 칭찬했다.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어진 말.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
목이 아무리 말라도 도적의 샘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힘겨워도 불의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의 고사였거니와, 사파인들에게 불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에 가까웠지만 원공후는 이 말이 그에게 향하는 부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이 사패천을 만들었던 뜻을 잊지 말고 끝까지 도우라는 의미.
진무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한 것은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고, 두 사람의 싸움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공후…….”
진무는 그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이 가진 비밀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믿기는 어렵겠지만.
“오랜만이다. 그 짧은 새 많이 늙었구나.”
“……?”
원공후의 표정이 쉴 새 없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궁금했던 것은 새파랗게 어린 엽인이 어찌 혁련무강이 자신에게 유언처럼 남겼던 말을 아는가였는데.
“이해가 되지 않겠지.”
진무는 온화하게 웃었지만 원공후의 표정에는 의문과 당황, 그리고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혹 그분의…….”
제자냐? 아니면 연이 닿은 적이 있었더냐?
그의 상식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질문을 떠올리던 진무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나는 네가 의심하는 그 사람이다.”
“그 사람…… 그분이라고?”
“믿지 못할 것을 안다. 나조차도 아직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도 안 된다.
진무의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내 과거의 이름은 혁련무강. 하늘의 중심인 곳에 사패천의 터를 잡았던 사람이며, 묵룡의 유일한 주인이자 네 아비의 죽음 앞에 목 놓아 울었던 그의 형제이다.”
“…….”
나지막이, 그러나 진중하게 이어지는 진무의 위엄 가득한 목소리에 원공후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려 왔다.
하늘의 중심은 천중산을 말함이요, 묵룡의 유일한 주인은 혁련무강이 익힌 묵룡혼원공을 칭함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비인 원재경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너에게 삼도(三刀)의 묘리를 깨우치게 한 것이 벌써 이십 년이 지났구나.”
진무는 그저 웃으며 말했고, 순간 원공후의 사고 능력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지해 버렸다.
삼도의 묘리라니?
그것은 원공후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도법의 핵심이었다.
아직 소방주인 원천호에게조차 전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기의 극한에 이르러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혁련무강과 원공후.
혁련무강이 그것을 깨우치게 하였기에 원공후는 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 그가 이끄는 천웅방은 감숙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처, 첫 번째 구절을 아십니까?”
“쯧, 여전히 의심이더냐? 좋다. 첫째 구절은 잠(潛)이며 두 번째는 속(速), 세 번째는 폭(爆)이다.”
“아아…….”
원공후의 눈동자에 습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무릎이 힘을 잃고 구부려져 땅에 닿았다.
“저, 정녕…….”
“그래.”
진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공후는 그때까지 자신을 어지럽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진정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어찌 의심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그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아니던가.
“아아, 천주…….”
원공후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차올랐던 습막이 볼을 타고 방울져 흐르며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이미 진무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차단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안의 상황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원공후는 울고 또 울었다.
비록 이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과 오랫동안 따랐던 의숙부에 대한 그리움이,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심중에 범람하며 그를 뒤흔든 것이다.
“원, 녀석…….”
진무는 어느새 과거의 혁련무강으로 돌아가 엎드린 원공후의 어깨를 따스한 손길로 다독거렸다.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원공후와 진무는 술병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믿기지 않는군요. 강호에 기사(奇事)가 많다고는 하나, 정말이지.”
한참이나 울어 대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그는 여전히 믿지 못한 눈치로 진무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신기한 건 알겠는데 그만 봐라. 상판 뚫리겠다.
진무가 어색하게 웃으며 술을 청하는데.
“우명, 그 친구가 큰일을 했군요.”
“그래. 난들 그게 진짜 불로초일 줄 알았나. 한편으론 반신반의했지.”
진무의 말에 원공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진무의 신분에 대해 듣고 난 다음이었다.
“어쩐지 저를 찾아오셨을 때 몸에서 선기가 느껴지는 것이 의아했는데, 무당 도동의 몸에 혼이 빙의되어 그런 것이군요. 놀랍긴 한데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원공후가 자신이 겪은 도사들을 떠올리며 동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하자 진무가 주마등처럼 흐르는 지난 기억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힘들었다.
망할 늙은 도사 놈들이 원하지도 않은 육양진기를 심어 놓지를 않나. 연일 같지도 않은 주문을 쉬지도 않고 외는 통에.
“그래도 몸 안에 도력이 있어서인지 이제는 제법 ‘무량수불’이 입에 달라붙더군.”
“어이쿠, 천주. 그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천주님께서 무량수불이라니요. 그나저나 천주님 성격에 도사 놈들 틈바구니에서 잘도 버티셨습니다.”
“버텨?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제법 좋은 기억을 담았다만, 처음에는 모조리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들었다. 망할 도동 놈의 기억이 한동안 발목만 잡지 않았어도…….”
진무가 진저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리자 원공후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 성격에 도사가 되었으니.
“한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천웅방과 본성이 마찰을 일으킨 것을 알고 오신 겁니까?”
“아니, 오기 전엔 몰랐다. 그 적생이라는 친구를 통해 들었지.”
“역시, 하긴 원래도 천주님께선 말씀드리기 전에는 중원 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으니.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더군요, 그 적생이라는 사람.”
그렇지.
따지고 보면 진무도 당세령처럼 뒷발로 쥐를 잡은 셈이었다.
누가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인 줄 알았나.
“어쨌든 걱정입니다.”
“그래. 우명, 그 무식하고 우직한 놈이 멈출 리가 없으니까.”
“다 천주님 때문입니다.”
원공후의 핀잔에 진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역시 그것이 천주님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여기니까요.”
“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녀석이기에 당연하다.
누가 말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을 터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제자 놈의 명령을 수행할 녀석이 천우명이니까.
“한데 어찌 된 건가? 자네가 사패천에 등을 돌리다니?”
“음…….”
진무가 묻자 원공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유월청이 그렇게까지 일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
“천주께서 돌아가신 뒤로 사패천의 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탐욕을 끝없이 부리더군요. 천주님과 달리 돈이 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행하는 모습에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돈이 부족했다고?”
그럴 리가?
분명 비고에 엄청난 양의 재물을…….
진무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안 가르쳐 줬다. 비고 여는 법.
아마 만근의 폭약을 사용하더라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사패천의 비고를 만든 인물이 바로 천하의 명장 구야자 방유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고를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천우명이었다.
천우명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사패천을 보고 그냥 있지는 않았을 텐데?
설마 비고의 재화가 진무의 것이라 생각해서 열어 주지 않은 것인가?
“하여간 유월청이 언젠가부터 천주님께서 금하신 일들을 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금한 일?
“사패천 예하에 엄청난 상납금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소 방파와 뒷골목 무뢰배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더니 이제는 아예 인신매매며 청부 살인, 납치까지 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
“흑사방은 도박장과 고리대를 확장해서 민초들의 돈을 무자비하게 뜯어내고 있고, 녹림과 수로채는 돈 되는 일이라면 관의 표물에까지 손대고 있습니다.”
설마하니 산적과 수적까지 본성으로 끌어들인 것인가?
“고작 이 년 만입니다. 애초의 기치와는 완전히 달라졌지요.”
“그……랬구만.”
진무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갔다.
“저뿐만이 아니라 장로들까지 그에 관한 간언을 몇 번이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 내쳐졌습니다.”
내쳐졌다?
“유월청은 싫은 말을 하는 이들은 전부 내쫓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들로 장로들을 다시 구성하였습니다.”
“그랬군.”
“어쨌든 천주께서 돌아오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나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 사패천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뜻이겠지.
하지만 진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그 무슨? 이대로라면 사패천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미 중소 방파들이 막대한 상납금에 시달려 제 살길을 찾아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되면 정무맹의 세력들에게 핍박받던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약하다.”
“예? 그 무슨 소립니까? 이미 한번 이루셨던 길이 아닙니까? 내력이 부족하다 하시면 제가 천웅방의 모든 인력과 자금을 쏟아부어 영초와 영단을 구해 바치겠습니다.”
그럼 더없이 좋겠지.
하지만 진무는 지금 과거의 묵룡혼원공이 아니라 도가의 육양진기를 익히고 있었다.
양의심공으로 묵룡혼원공을 익히지 못하면 영단과 영초를 먹는다고 해도 도력만 높아질 뿐이었다.
물론 사패천을 손에 넣는 데 있어 신분이 대수겠는가?
하지만 진무는 이미 다른 꿈을 꾸고 있던 참이다.
“공후, 내가 원하는 것은 사패천 하나가 아니다. 나는 사패천뿐 아니라 정사마의 제일 윗자리에 설 참이다.”
“예에?”
원공후가 황망한 눈초리로 진무를 지그시 바라본다.
아무리 눈앞의 천주가 환생? 빙의? 어쨌든 별 듣도 보도 못한 일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천주님.”
“응?”
“혹시 불로초에 부작용 같은 것이 있습니까?”
“뭔 소리냐?”
“정사마의 가장 윗자리라니. 그 무슨 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
원공후가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진무가 생각해도 조금 미친 소리 같기는 하지만.
“믿어라. 나 혁련무강이……었다.”
“…….”
내내 천주가 다시 돌아와서 반갑다는 표정이었던 원공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무를 샐쭉하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새끼, 믿음이 많이 약해졌구나.
아니면 어린 외모 때문에 무시를 하는 건가, 아주 불경이 하늘을 찌르고 말이야.
“공후.”
“예?”
“맞은 지 오래됐지?”
“……?”
“그래, 오래되긴 했어. 이제 다 늙어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을 그 대가리에 기억이 나지 않을 만도 하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는 진무의 모습에 원공후는 본능적인 섬뜩함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피똥 싸고 한 삼 개월 누워 지냈던가?”
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원공후가 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 맞아. 분명히 그랬던 것 같네.”
“천주님!”
원공후가 결의(?)에 찬 눈으로 다급히 외쳤다.
“일단은 천우명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일 듯싶습니다.”
알지, 알지.
근데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야.
눈 깔고, 닥치고…… 일단 좀 맞자.
과거에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다시 한번 상기할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