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진무의 모습에 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공동에는 어찌?”
“취해야 할 것이 있다.”
“혹 지난밤에 말씀하신 그 목표 때문입니까?”
“그래. 반드시 가야만 한다.”
원공후의 머릿속에 최강의 무인이 되어 정사마를 모조리 발아래 꿇리겠다 했던 진무의 말이 떠올랐다.
여전히 정신 나간 소리 같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바로 천중산에 사패천의 성을 짓겠다고 했을 때였다.
심지어 그때의 미친 소리도 결국 이루어 내지 않았는가.
어쩌면 이번에도 정말 이룰지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허세 떨지 말라고 실컷 비웃어 주기나 했을 그의 원대한 목표를 상기하며 원공후가 슬몃 웃는데, 옆에 있던 천우명의 몸에서 난데없이 진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흐흐. 역시 공동부터입니까?”
어딘가 약간 어긋난 것 같은 질문에 진무가 천우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악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는 천우명.
응? 뭐가?
“하긴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천주님과 함께 무당을 습격해 도사 놈들의 머리를 뽑아내고 팔궁을 불태우던 때 말입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 천우명을 보며 진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그러고 보니 저놈에게 자신이 무당의 도사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 우명…… 사실은…….”
“속히 철검단에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모처럼 제대로 칼춤을 추겠군요.”
“…….”
진무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를 이해시키자면 또 얼마나 많은 설명을 해 주어야 할까. 얼마나 두들겨 패 가며 이해를 도와야 할까.
거기까지만 생각해도 이미 아득해져 오는 정신에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원공후에게 말했다.
“니가…… 설명해. 잘 알아듣게.”
“……예.”
원공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천우명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 * *
원공후와 천우명을 두고 나온 진무는 낭인대가 머물고 있는 거처로 돌아왔다.
원공후가 전각을 따로 마련해 주겠다고 했으나 진무는 곧 떠날 것이라며 마다했다.
“오디 괐다 와?”
“…….”
술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당세령이 헤실거리며 웃는다.
아무리 천웅방에서 해 뜨자마자 거창하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해도 그렇지, 날 어두워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마신 거냐?
“너 갑자기 업써져서 촺다가 연회가 열리는 봐라메…… 헤헤. 슐이랑 안주가 좋아. 고기가 아주우우! 질이 좋다니꽈.”
너 채식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냐?
약초 성애자 아니었어?
“운암은 어디…….”
진무가 슬쩍 묻다가 당세령의 뒤쪽에 대자로 뻗어 엄청나게 코를 골고 있는 도사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뻗었다.
분명 또 당세령과 술 대결을 벌였겠지.
사내자식이 저리 술이 약해서야.
진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데.
“마쉴래?”
당세령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며 술병을 내민다.
됐다. 너나 죽도록 처먹어라.
진무가 고개를 젓자 당세령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흐리멍텅한 눈으로 주변을 훑는다.
“거기 아잣씨! 나랑 슐 환잔회!”
그녀의 먹잇감이 된 적생대의 포산이 흠칫 놀라며 몸을 피할 곳을 찾았지만 당세령은 이미 비틀거리며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저거, 저거…… 어휴.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지금은 차라리 취해 있는 편이 좋았다.
천웅방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서 운암과 당세령이 물어 오기라도 하면 당황스러울 뻔했다.
그래도 웃음이 난다.
그래, 오늘은 아무래도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원공후와 만났고, 그리웠던 천우명과도 재회했다.
도사의 거죽을 쓰고 이 년을 넘게 살다가 본래의 과거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이제야 정말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무는 술병 하나를 들고 모두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 앉았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술에 취한 밤.
왁자지껄한 소음.
뭐든 좋다. 유쾌하기 그지없다.
내력으로 막지 않았던 취기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자 덩달아 배 속에서 올라오는 훈훈한 열기가 더욱 진무의 흥취를 돋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자들이 마시던 자리에서 고개를 처박고 쓰러져 잠들었다.
포산마저 꺾어 버린 당세령도 정원의 나무를 끌어안고는 곯아떨어졌다.
하여간에 어디 떨궈도 잠자리 못 가려 고생할 팔자는 아니라니까, 저 녀석도. 타고났어, 아주.
북해의 동토에서도 제 방처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만큼 적응력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진무가 피식 웃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천웅방의 다섯 아들에게 잡혀 시달리고 있는 적생의 모습을 발견했다.
총사라 부르며 극진히 대우해 주는 것이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무가 적생을 향해 다가갔다.
“적생.”
“예?”
그의 몸에서 은은히 풍기는 주향으로 미루어 그 역시 술을 제법 마신 것 같았으나, 딱히 취하지는 않은 듯 또렷한 눈으로 진무를 올려다본다.
“잠깐 걸을까?”
“……예.”
진무는 술병 하나를 들고 적생과 함께 인적이 드문 전각의 뒤편을 천천히 걸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찬 바람이 얼굴에 닿으니 달아올랐던 열기가 식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랐을 때 진무가 적생을 향해 물었다.
“많이 마셨나?”
“예. 조금…… 그래도 바람을 쏘이니 정신이 드는군요.”
“술은 원래 그다지 즐기지 않는 모양이군.”
“예.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싫어서.”
“재미있군. 술꾼들은 그런 느낌 때문에 마시는데.”
“…….”
“때론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겠지요.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가끔은 고주망태가 되어 잠시 현실을 잊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생의 말에 진무가 빙긋이 웃었다.
“그보다 대단하더군.”
“…….”
“기대는 했지만 정말로 철검단을 막을 줄은 몰랐어.”
“모두가 천웅방주님이 잘 따라 주신 때문입니다. 저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이지요.”
“거 사람하곤. 가끔은 과시를 좀 해도 된다네.”
“그런가요?”
진무의 말에 적생이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어떻던가? 작은 낭인대를 이끌다 천웅방의 총사가 되어 본 기분은?”
진무의 물음에 적생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경험이었습니다. 한시도 쉴 틈이 없었지요.”
“그러기엔 너무 능숙하던걸?”
“능숙하긴요. 많이 부족하지요. 어쨌든 즐겁긴 했습니다. 뭔가 두근거리는 기분이더군요. 모두가 대협 덕입니다.”
기특한 녀석이다. 감사할 줄도 알고.
떡잎이 아주 파릇파릇……하다기에는 이미 나이가 쉰이지만.
“어때? 이 기회에 한곳에 정착해 보는 것이.”
“……예? 그게 무슨?”
“사람에게는 말이야. 기회라는 것이 한 번씩 온다고 하지.”
“…….”
“그런데 그 기회라는 녀석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거든. 그 때문에 언제 왔다가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눈치 빠른 적생이 궁금한 눈으로 진무를 쳐다본다.
많이 쳐 봐야 약관 어림의 청년.
자신을 엽인이라 칭하며 다가왔으나, 그 대단한 철혈붕권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엄청난 고수.
“무슨 말씀이신지?”
“내 보기에는 지금 그대에게 그 기회가 찾아온 듯싶은데.”
“…….”
“남들에겐 무척이나 빠른 그 녀석이 그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지금 자신을 봐 달라고 그대 옆에 머물고 있거든.”
진무의 말에 적생이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대협.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알아들은 표정인데?”
진무가 싱긋 웃자 적생의 눈동자에 강한 의문이 어렸다.
설마 자신에게 천웅방의 총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 전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는 태도 하며, 도대체 이자의 신분이 뭐길래?
“아, 오해는 마. 내가 권하는 것은 천웅방의 총사 따위가 아니니까.”
“예?”
이자, 자신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을 알아채었다.
그리고 분명 어린 나이인데 어째서 자신보다 훨씬 더 세상을 더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재주를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제,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사패천의 총사.”
진무의 말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제 안에서 점점 크기를 키우는 기묘한 흥분을 다스리던 적생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다시 말해 줘?”
진무의 웃음에 적생은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 사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패천의 총사가 되어 달라고.”
“제가 아는 그…… 사……!”
적생이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경악 어린 눈초리로 진무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분명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적생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묻자 진무가 그에게 시선을 똑바로 맞춰 왔다.
“하긴, 못 믿을 만도 하지. 다행히 자네에게 신뢰를 줄 만한 사람이 왔군.”
“…….”
진무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두 명의 인물.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적생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떠졌다.
천웅방주와 철검단주.
“천주님. 여기 계셨습니까?”
“그래. 총사가 될 재목을 꼬드기는 중이다.”
둘의 인사에 진무가 피식 웃는다.
아니, 그런데 뭐라고?
천주?
천주의 제자, 소천주 뭐 이런 게 아니고?
적생이 두 사람과 진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무 놀라서 믿지 못하는 모양이니 자네들이 알아서 설득 좀 해 주게.”
“놀랄 만도 하지요.”
원공후는 온후한 미소를 지었고, 천우명은 적생을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당신이 어째서?
볼품없는 자신을 향한 극진한 예에 적생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총사가 되어 주시오.”
유려한 미사여구나 감언이설이 아닌 꿇어앉은 무릎이, 간결하고 묵직한 한마디가 적생의 마음속 깊이 박혀 든다.
고수일수록, 그 이름값이 큰 사람일수록 함부로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적생이라는 존재는 드넓은 중원에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무의 말이라면 팥을 콩이라 해도 믿는 천우명이기에.
“천주님께서 내리신 결정이니 그대를 총사라 여기고 믿고 따르리다.”
또 천주라고 한다.
제 눈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면 분명 철혈붕권 천우명이 맞는데.
오직 진심만이 담긴 말에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적생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어때? 이제 내 말을 믿겠어?”
진무가 또 웃는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낭인으로 썩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야. 때마침 그대의 나이 지천명(知天命)이니. 어때? 하늘의 명이라 생각하고 남은 인생을 걸어 보는 게.”
마른침이 쉴 새 없이 흘러 목구멍을 타고 넘는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어찌하여 이놈의 두근거림은 멈추질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