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이런, 설득이 부족했나? 나는 그대가 예양(豫讓)이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하는데.”
“……!”
적생의 사고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예양의 고사.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여위열기자용(女爲悅己者容)이라 했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위해 치장한다는 말이었다.
“다, 당신은 대체…….”
혼잣말 같은 적생의 중얼거림에 진무는 다만 뜻 모를 미소를 지었고, 원공후가 천우명의 옆에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이분께선 묵룡의 주인이며, 새로운 사패천을 만들어 갈 분입니다.”
말문이 막혔다.
새로운 사패천이라니?
그들이 하늘을 뒤집어 놓을 계획을 세우고 있단 말인가?
이 어리디어린 고수를 중심으로?
적생이 여전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진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꽤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태공이 나이 일흔에 그의 뜻을 이루었던 것처럼 사패천의 총사가 되어 남은 인생을 걸어 보는 것도 괜찮잖아. 고민이 필요하다면 잠시 기다려 줄 용의는 있고.”
“아!”
씩 웃는 진무의 얼굴에 적생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볼품없는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
더욱이 그의 앞에 그 대단한 철검단주와 천웅방주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더 무슨 의심이 필요하고, 무슨 고민이 있을까?
이제껏 비루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민을 모두 날린 적생이 진무를 향해 가까이 걸음을 내디뎠다.
“소생은 천주께서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실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적생은 진무의 발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낭인 적생. 기회를 주신다면 천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마침내 적생은 기회를 잡았고, 진무는 더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새로운 삶.
네 번째 수하를 얻었다. 정무맹에 적을 둔 이가 아닌, 사패천의 핵심이 될 수하.
그것도 감탄이 나올 만큼 유능하기 그지없는.
“일어나. 앞으로 할 일 많은 그대의 무릎을 상하게 할 순 없지.”
손수 적생의 손을 잡아 일으킨 진무의 모습에 원공후와 천우명이 덩달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덕에 수월하게 설득을 했군.”
“그것이 어디 저희 때문이겠습니까? 모두가 천주님과 총사의 뜻이 맞았기 때문이지요.”
원공후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데 이 밤에 왜 찾아왔어? 누가 보면 어찌하려고.”
“아,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요.”
“……?”
진무가 원공후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실은 천웅방 주위를 배회하던 자들이 있어 추격 중에 있습니다.”
전쟁이 싱겁게 끝났으니 날파리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쯤이면 지들이 알아서 처리해도 될 일이거늘.
“어떤 놈들인데?”
진무가 심드렁하게 묻자.
“공동입니다.”
“뭐?”
“천주님께서 아직 정무맹에 적을 두고 계시니 제 독단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곧 공동으로 가신다 하였기에.”
분명 그리 말하기는 했다.
그런데 잠깐만, 공동이라고?
그리고 그들을 천웅방에서 추격을 하고 있다?
이것 봐라, 또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건가?
진무의 비열한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무는 이제 곧장 공동파로 갈 생각이다. 만약 천웅방에게 쫓기고 있는 그들을 구해서 산문을 오른다면?
근래 참으로 귓가를 간지럽히던 단어가 번개처럼 진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은인!
그래, 정파 놈들은 참으로 보은을 좋아하는 놈들이 아니던가?
왔다, 왔어. 적생에게 찾아왔던 그 기회라는 녀석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공후.”
“예?”
“쫓은 지는 얼마쯤 되었느냐? 지금 어디쯤이고? 아직 잡힌 것은 아니겠지?”
“……쫓은 지는 한 시진이 조금 못 되었고, 남쪽으로 백오십 리쯤까지 도망친 듯합니다. 아직 잡히진 않았구요.”
됐다.
아-주 흡족하다.
“우명, 공후, 적생. 뒷일을 부탁한다.”
“예?”
“이만 가 봐야겠다. 추격대에는 미리 연락을 보내라. 절대 죽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갑자기?
하여간에 언제나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행동하기 전에 설명부터 좀 해 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 밤에 갑자기 떠난다니?
아직 술도 한잔 못 했는데 벌써 움직이려 드는 걸 보니 야속하기까지 하다.
“참!”
진무가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원공후를 쳐다보았다.
“애들 좀 다쳐도 괜찮지?”
“…….”
“죽이진 않으마.”
진무가 빙그레 웃고는.
“적생! 나랑 함께 온 일행들이 내일 아침에 깨어나면 전해라. 공동으로 먼저 갔다고!”
“…….”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직 적응을 채 하지 못한 적생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리는 원공후와 천우명을 뒤로한 진무는 공동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크크크, 자아알됐다.
이젠 우연이 아니라 강제로 은혜를 입혀 주마!
* * *
“허억, 허억…….”
적을 향해 검을 세워 든 종려자가 주변을 경계하며 가쁜 숨을 토해 낸다.
적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지 하루 가까이 지났다.
간밤에 시작된 도주였건만, 쉬지도 못하고 다시 밤이 가까워 왔다.
공동의 일대제자인 자신과 원체 경공이 뛰어난 개방도들뿐이라면 더욱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온 이대제자들에게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벌써 오백 리 이상을 달려온 지금에 이르러서는 현저히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을 두고 갈 수 없었기에 벌써 세 차례의 교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대다수가 상처를 입고 도주마저 지체되었다.
다행히 아직 죽은 제자는 없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운이 다한 모양이었다.
종려자의 시선이 닿은 곳.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천웅방의 무인들이 그들을 겹겹이 둘러싼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철심개 분타주. 이거 오늘 일이 어렵게 될 것 같습니다.”
검을 힘주어 움켜잡는 종려자의 말에 철심개가 매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연한 수세. 뚫고 나가기에는 수가 너무도 많았다.
종려자는 지금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철심개 또한 목숨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하하, 공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버텨 봅시다. 이미 연락을 보냈으니 곧 도착하지 않겠소.”
위기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철심개의 미소와 희망적인 말.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큰 용기가 되지 못함을 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고작해야 천웅방과 공동의 중간 지점에 불과했다.
도주를 시작하고 그들과의 첫 번째 교전이 있었을 때, 공동을 향해 연락을 보냈다.
전서구가 도착하고, 아무리 빨리 구출대를 편성해서 온다고 해도 하루가 더 소요될 것이다.
하물며 모두가 지쳐 있는 상황.
버틸 수 있을까?
“종려자! 용기를 내시오. 개방의 분타에도 연락을 보냈으니.”
철심개가 다시 한번 소리쳐 용기를 돋워 본다. 과연 철심(鐵心)이라는 이름이 모자라지 않는 인물이었다.
순간 공동의 이대제자를 이끄는 자신이 나약해졌던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좋습니다! 까짓것, 어디 해 봅시다!”
종려자가 힘차게 외친다.
절망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원방진을 펼쳐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라!”
종려자의 외침에 철심개가 미소를 지었고, 공동과 개방의 제자들이 원을 그리듯이 자리를 잡는다.
“오너라. 이놈들! 내 곱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종려자의 외침이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천웅방의 추격대가 포위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어째서?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포위된 채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별의별 생각이 종려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구출대를 불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종려자의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차던 순간.
우우우!
마치 달빛에 도취된 늑대의 우두머리가 질러 내는 듯한 장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갑작스러운 소리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린다.
그리고 작았던 소리가 점점 더 커짐과 함께 천웅방의 포위망에 소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적막하던 고요를 깨운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
빠각! 뻑! 쩍!
서로 다른 곳을 때려 만들어 낸 듯한 격타음이 점점 더 가까워져 오고.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무언가가 포위망을 뚫고 나타났다.
이건 대체?
지원군이 벌써 올 리가 없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종려자가 나타난 이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을 가진 약관의 사내.
“원방진을 해제하고 남쪽으로 달리시오! 길을 열겠소!”
“……!”
그는 대뜸 그렇게 외쳤다.
그리곤 정말로 남쪽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그의 손에 가득하게 어리는 푸른 기운.
가, 강기?
종려자뿐 아니라 모두가 황망하게 눈을 치켜떴다.
도대체 저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저런 무위란?
콰아아앙!
그의 주먹이 휘둘러지자 손안에 맺혔던 강기가 거칠게 뻗어 나가 포위망을 이룬 무인들에게 작렬했다.
“지금!”
사내의 외침.
이해는 가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모두 도망쳐라!”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종려자의 외침과 동시에 공동과 개방의 제자들이 포위망에 생긴 틈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달렸다.
구명줄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별안간 나타난 사내가 강제로 활로를 뚫어 주었다.
완전히 뚫리지는 않았기에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터트려진 둑은 강물을 막지 못하는 법이다.
“이보시오!”
제자들이 도주하는 뒤를 엄호하던 종려자와 철심개가 사내를 향해 외쳤다.
“갑시다! 뒤를 막겠소!”
사내가 곧장 뒤를 따르자 포위되었던 공동과 개방의 제자들이 일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위망을 구성하던 천웅방 추격대의 수장 노답평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주님! 정말로 이대로 보고만 있습니까?”
수하가 안타까운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놈들이 전부 도망칩니다.”
나도 안다, 이놈아.
그런데 낸들 뭐 어떡하냐? 방주님이 직접 연락을 보내셨는데.
포위만 해서 가두고 있으라 했다. 누가 구하러 오면 절대로 공격하지 말고, 보내 주라고.
그리고 도망치는 걸 쫓으면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고.
그리 써서 보내셨는데.
다른 사람이면 항변이라도 해 보겠지만, 이렇게 되면 까라는 대로 까야 한다.
그리고 사실 쫓을 수도 없다.
추격대는 천웅방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다.
노답평 자신만 해도 내당주를 맡고 있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동과 개방의 제자들을 구해 간 자는 무려 강기의 고수.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가 없다.
그나저나 어째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저런 고수를 어디서 봤을까?
노답평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뭔 상관이란 말이냐? 이미 끝난 일인데.
노답평은 아까운 수하들이 쓰러져 고통스럽게 버둥대는 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나저나 징하게도 패 놨네. 그냥 갔어도 막지 않았을 것인데…….
그나마 죽은 놈은 없어 보이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