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어찌 물으십니까?”
제갈협진은 당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그의 물음에 담긴 이유쯤은 짐작을 하고도 남았다.
정무맹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거파는 구파와 오대세가였다.
구파와 개방을 제외하고, 오대세가라 함은 남궁, 제갈, 황보, 당가와 팽가를 뜻한다.
그들 중에서도 정무칠성을 배출한 당가와 팽가, 남궁가의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갑무반 여덟 무인.
화산의 현선을 시작으로 해남의 이백의, 남궁가의 남궁창위, 황보가의 황보웅, 무당의 청상과 청우, 제갈가의 제갈산산, 그리고 개방의 취구개(醉狗丐).
팽의방이 묻는 것은 어찌하여 선발된 여덟 무인 중 팽가의 이름이 하나도 없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의당 황보나 제갈이 아니라 팽가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광호 어른께서는 많이 언짢으신 모양입니다.”
“언짢다?”
팽의방의 눈이 찌푸려진다.
“묻고자 하시는 바가 팽가의 이름이 갑무반에 없다는 것이라면 분명히 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뭐라?”
팽의방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정무맹의 최고 배분을 가진 무인으로서 대군사를 향해 기세를 뿜을 수는 없었기에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 안광조차 견디지 못하고 각혈을 할 만큼 지독스러웠다.
“의방, 왜 이러는가? 그리 화를 낼 일도 아니지 않은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양소방이 급히 중재를 하고 나섰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실력 때문입니다. 원하시면 평가지와 평가관의 이름들을 공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갈협진의 말에 팽의방이 심히 언짢은 표정으로 눈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갑무반에는 팽가의 이름뿐 아니라 보타문의 이름도 없습니다.”
보타문(普陀門).
검혜(劍慧) 벽운영의 사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은은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실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갈협진이 보타문을 거론하자 팽의방이 입을 다물었지만, 화가 풀린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면 나도 하나 묻겠네.”
차분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창천(蒼天) 남궁무휴가 나지막히 입을 떼었다.
“어째서 무당은 둘인가?”
“같은 맥락입니다. 실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력이 된다?”
“예. 그들의 실력은 제 명예를 걸고 보장합니다.”
제갈협진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정무칠성의 이름 앞에 당당히 맞섰다.
이 역시 칼날 없는 전쟁과 같다.
정무맹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군사로서 정무맹을 이끄는 그의 삶은 언제나 복잡하고 치열한 전쟁의 연속이다.
정무맹 내부에서도 구파와 오대세가가 조금 더 우위를 점하기 위해 언제나 싸운다.
그 틈바구니에서 버텨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면 조금의 틈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정무칠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정무맹 예하에는 여섯 개의 무인대가 있었다.
구파로 구성된 청룡단과 현무단.
오대세가가 주축인 주작단과 백호단. 그리고 무풍개가 이끄는 비영대(秘影隊)와 군사부 예하에서 각종 전투 지원과 전령을 담당하는 전위대(傳威隊).
비영대와 전위대는 오롯이 정무맹의 지시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이지만, 나머지 네 곳의 무인대는 달랐다.
맹의 지시와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구파와 오대세가의 손이 미쳐 있는 곳이기에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각 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정무맹에 속한 무인대지만, 군사와 맹주가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무인대.
해서 용봉관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그 관원들을 각 파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대제자와 후기지수들로 구성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용봉관주는 반드시 세력에 치우치지 않았던 백로 등여평이 되어야 했고, 교관들마저 중립적이고 실력 좋은 이들로 구성한 것이다.
그럼에도 구파와 오대세가는 그 안에 각 파의 뛰어난 후기지수를 용봉관에 보내 제 손에 넣고 주무르려 하고 있다. 만들어진 목적을 알기에 더 그리한 것이다.
용봉관이 커질수록 맹주의 힘이 강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가진 정무맹 내에서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랬다.
팽의방과 남궁무휴가 갑무반에 선발된 무생들을 보며 싫은 티를 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덟 중에 제갈산산을 제외하면 남는 오대세가 출신의 무인은 고작 남궁창위와 황보웅, 둘뿐이었다.
“기존 네 곳 무인대는 마교와 사패천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제갈협진이 다시 한번 거론하며 말을 이어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의 중원에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습니다. 궁이라는 자들이지요.”
“…….”
“용봉관은 순수하게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순수?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셈에 팽의방과 남궁무휴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지만 제갈협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이미 그들을 부를 때부터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그에 따른 대응책도 생각해 둔 바 있었다.
철지량이 정무맹의 얼굴이라면, 제갈협진의 역할은 복잡하게 꼬여 있는 세력간의 문제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을 보셨다시피 그들의 실력은 아직 부족할 따름이지요. 현재의 주력인 청룡단이나 백호단에 비하면 한참이나 무위가 떨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네 곳 무인대는 각 파에서도 제법 이름난 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용봉관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갑무반 여덟 무인들이라고 해 봐야 이제 스물에서 서른 살 정도의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갑무반의 무인들에게 우리의 가르침을 주라?”
팽의방이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 말씀을 청했지요.”
“어째서 우리가 그래야 하지? 우리가 그리 한가해 보이는가? 가문의 소속이 아닌 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만큼?”
분명한 거부의 뜻을 담은 말이었으나 제갈협진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가 지어진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압박이 있다 해도 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몇 번이나 청해 모은 자리였으니까.
“원하지 않으시면 굳이 가르침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맹주께서는 이미 한 아이를 정하셨습니다.”
이미 정했다고?
팽의방과 남궁무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지막에 무당의 유운검법 시연을 했던 청상 도장입니다.”
“…….”
제대로 일그러진 둘의 얼굴.
제갈협진이 노렸던 바였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용봉관주께선 청우라는 아이를, 양소방 어른께서는 개방의 제자가 아닌 황보세가의 아이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뭣이?”
제갈협진의 말에 차분하기만 하던 남궁무휴가 눈을 부릅뜨고 양소방을 쳐다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등여평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원체 세력에 섞이기 싫어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의 인물이니까.
하지만 양소방은 어째서 개방의 제자인 취구개가 아니라 황보세가의 자손을 선택했단 말인가?
“아, 괴월 녀석은 타구봉법을 익히고 있어서 나랑은 맞지 않다네. 황보의 아이가 권장을 익혔으니 그리 결정한 것뿐이야. 딱히 사승의 예를 맺는 것도 아니고, 지도만 하는 것이니까.”
“…….”
양소방의 말에 팽의방과 남궁무휴의 얼굴이 더없이 굳어진다.
세력에 관계없이 지도할 대상을 정해 버린 그들의 결정이, 용봉관 내에 입지를 뻗을 생각을 하고 있던 팽의방과 남궁무휴를 옹졸한 인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군요. 하면 저는 제갈산산 그 아이를 선택해야 하나요?”
갑자기 잠자코 듣기만 하던 벽운영이 입을 뗀다.
“아니? 검혜!”
“왜요? 용봉관을 만든 목적이 정파를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저희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때 처음부터 자파의 아이가 아닌, 재능이 출중한 아이에게 길을 열어 달라는 뜻으로 들었는데요?”
“그건…….”
벽운영의 말에 남궁무휴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에 제갈협진의 미소가 짙어진다.
애초에 생각한 것은 검성, 백로, 무풍개까지였는데 검혜마저 도와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팽의방과 남궁무휴는 무림의 큰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옹졸한 위인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압박하려는 의도는 이미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이다.
용봉관에 대한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지만 발을 뺄 수는 없다. 발을 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용봉관의 힘이 맹주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 틀림없다.
“두 분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승기를 잡은 제갈협진이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나는…… 화산의 제자로 하지.”
남궁무휴의 결정.
당연한 것이다.
양소방이 황보웅을 택한 이상 자신이 남궁창위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팽의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팽가의 자제가 갑무반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비슷한 상황의 검혜가 제갈산산을 선택한 이상 자신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나는 남궁창위로 하겠네.”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였다.
구파의 제자인 해남의 이백의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같은 오대세가인 남궁창위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일 테니까.
“하면 둘이 남았군요. 처음에는 풍환 어른과 당위 어른까지 생각했지만…….”
제갈협진이 빙긋이 웃자 철지량이 돕고 나선다.
“내가 청상 도장과 이백의를 함께 맡도록 하면 되겠군.”
“맹주께서 그리하신다면 저도 취구개까지 맡아 가르치겠습니다.”
철지량의 말에 벽운영이 말을 잇는다.
“검혜께서 말이시오?”
“예.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터라 시간이라면 넉넉합니다. 모처럼 중원에 나왔으니 꽤 오래 머물 생각이기도 하구요.”
“허허, 그래 주시면 내 고맙기 그지없겠소이다.”
“고맙긴요. 모두가 정무맹을 위한 일인 것을요.”
검혜의 합장에 남궁무휴와 팽의방의 얼굴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용봉관에 관련하여 더 이상 아무런 압박도 가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정무맹을 대표하는 어르신들이 이리 도와주시니 제가 큰절을 올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갈협진이 짐짓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팽의방과 남궁무휴는 어색하게나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 모두가 제갈협진이 미리 예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아무리 정파의 어른이라고 해도 세 치 혀가 독사같이 음흉한 제갈씨와 설전에서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리에 앉혀진 순간에 이미 그의 의도대로 흐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맥없이 당해 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보니 팽의방이 한마디를 더 보탠다.
“아무리 학관이라고 하나 대표자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대표자요?”
“그렇네.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고, 무생들의 대표가 필요할 듯싶네.”
마지막 발악.
잠시 고심한 제갈협진이 철지량을 보며 말했다.
“광호 어른의 의견이 매우 합당하군요. 어떠십니까? 맹주님? 후에 가르침을 받은 갑무반 인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선발해 대표로 삼으면 될 듯한데요.”
제갈협진의 말에 철지량보다 남궁무휴가 더욱 빨리 말했다.
“거 좋군. 대표라면 의당 강해야지.”
“그렇지요?”
제갈협진의 되물음에 남궁무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동조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갈협진이 던져 준 기회일 뿐이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하시지요. 맹주님.”
팽의방이 던져 준 기회를 냉큼 잡아챈다.
꿩 대신 닭을 선택하는 것처럼, 필시 남궁창위를 대표자에 앉히려는 생각일 터였다.
“그리합시다. 저와 용봉관주도 같은 의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양소방과 등여평이 힘을 더했다.
검혜는 그저 예의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소. 그리합시다. 자, 하면 이제 분위기를 풀고 모처럼 모였으니 즐겁게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서로 나눌 말이 많지 않소.”
비록 압박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철지량의 결정으로 한 가닥 기회를 잡게 된 팽의방과 남궁무휴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