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
방만평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굳어 있거나 말거나 복면인은 마치 제집처럼 걸어 들어와서 탁자에 앉았다.
“한잔하고 있었구만?”
아쉽다.
나도 술 좋아하는데, 같이 한잔하자고 해?
복면인은 다름 아닌 진무였다.
그가 도지휘첨사 방만평의 집을 찾아온 것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태양명.
아마 치부책을 받고 나면 갖은 암계를 세울 것이 뻔하다.
심지어 사문까지 밝힌 마당이니 무당에도 해코지를 하려 들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에는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상책이었다.
어차피 진무의 입으로 치부책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으니까, 뭐.
놈에게 말한 사흘 뒤.
무언가 기대를 하고 있겠지만, 그게 놈의 명줄이 끊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진무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탁자 위에 양발을 척 올렸다.
“…….”
방만평이 그 거만한 자세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진무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휙, 탁!
진무가 손을 휙 저어 경기를 뿌리자 열렸던 방문이 저절로 닫힌다.
반항?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귀하는 대체 누구요?”
알려 주려면 애초에 복면까지 쓰고 왔겠냐?
진무는 대답 대신에 품고 있던 치부책을 방만평의 앞으로 던졌다.
“이건?”
방만평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치부책을 받아 펼쳤다.
“이, 이…….”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다.
놀랍겠지. 안 놀라면 사람도 아니지.
“이것을 어찌?”
방만평이 치부책을 꼬옥 움켜쥐고 진무를 몇 번이나 힐끗거렸다.
“어때? 관심 있어?”
“…….”
반말이면 어떠한가?
책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부터 방만평에게 있어 진무는 괴한이 아니라 귀인이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꿈에라도 갖기를 원하던 증좌다.
비단 태양명뿐만이 아니다.
치부책에 적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서안부는 물론 위소 전체가 뒤집힐 일이었다.
뇌물이나 받아 처먹으며 국정을 운영해 온 놈들을 모조리 뒤집어엎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 꼬리를 캐다 보면 어쩌면 그 위쪽의 비리까지도…….
스윽! 파학! 탁!
진무가 손을 휙 하고 다시 젓자 방만평이 들고 있던 치부책이 휙 날아 돌아왔다.
허공섭물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다 보여 줘서는 흥정이 안 되는 법이니까.
몇 장 보여 줬으니 충분하다.
회가 동하면 동할수록 이쪽이 유리하니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대체……?”
놓치고 싶지 않았던 물건을 빼앗겨 버린 방만평은 너무도 아쉬워 여운이 남은 손을 몇 번이나 꼼지락거렸다.
근데 뭘 자꾸 같은 것을 묻는단 말인가?
정체가 누구면 또 어때서.
“나? 지나가는 정의의 장사꾼.”
“…….”
방만평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황당하다 못해 더러운 벌레라도 본 듯한 감상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뻔뻔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뭔가 심장을 옥죄일 듯이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멋지지 않은가?
지나가는 정의의 장사꾼.
여기서 요는 정의보다도 ‘장사꾼’이다.
“……장사꾼이라면…… 그, 팔겠다는?”
당연한 소릴.
무료 봉사라는 말은 이 몸의 사전에 없느니라.
“얼마?”
그게 아니지, 이 사람아. 지금 목마른 게 누군데.
“제시!”
“…….”
“싫음 말고.”
“음……. 은…… 백……?”
아, 장사를 안 해 봤네, 이 자식.
진무가 눈 한번 팍 찡그려 주고 자리를 뜨려 하자 방만평이 기겁하며 말을 바꾼다.
“금! 금!”
그래, 이제 얘기가 좀 되겠군.
못 이기는 척 앉은 진무가 짐짓 고개를 젓자 방만평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십…….”
“…….”
“사, 삼십…… 그 이상은…….”
“가져와.”
“……알겠소.”
진무가 느긋한 자세로 다시 탁자에 다리를 올리자 방만평이 서둘러 달려갔다.
잠시 후 방만평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금원보가 담겨 있는 주머니 하나와 몇 장의 땅문서였다.
“이 정도면 얼추 될 것이오. 우리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 땅과 장원에 대한 문서요.”
“…….”
진무가 잠시 방만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탐욕.
재물을 바라는 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자신이 가져온 재물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어찌 처리할 거지? 적혀 있는 자들을 협박하는 데 쓸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연히 이것을 증좌 삼아 이 나라의 적폐를 발본색원해야 할 것이오.”
눈빛에 담겨 있던 탐욕의 정체.
그것은 의기였다.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눈빛, 행동, 말투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성격을 어림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진무의 눈에도 방만평에게서는 곧디곧은 관리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일단 합격.
하지만 확인은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어설피 휘둘렀다가는 도리어 외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고.”
“물론 그럴 것이오. 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도찰원을 움직일 수 있소. 폐하의 어명을 받아 성역 없는 조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
그는 치부책을 유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곧은 관리를 만났으니 태양명은 물론 비리 관료들에 대한 조사와 숙청이 대대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 가문의 재산을 전부 털어서 치부책을 사려 하다니.
조금 미안해진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방만평의 손에서 금원보만 받았다.
예전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도사가 되고 나서부터는 어찌 이리도 정의감이 넘치는지.
뭐, 괜히 땅문서를 받았다가 추적이라도 받으면 곤란하니까.
원래 은밀한 거래는 현금이 최고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이 정도 에누리야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다.
어차피 치부책에 동천 땅에 관한 내용은 이미 지워 버린 뒤였으니 진무가 꼬불친 것이 발각될 리도 없었다.
“거래는 끝났군.”
“…….”
진무가 주머니 속에 담긴 금원보를 확인하고는 품속에 안전하게 갈무리했다.
진무가 막 나가려는데 방만평이 급하게 물어 왔다.
“귀하의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시오.”
집요한 관리 놈 같으니. 뭘 자꾸 물어. 안 알려 줘.
“이런 일은 출처를 밝히지 않는 법이 좋은 법이지.”
“아!”
방만평은 어쩌면 눈 앞의 상대가 그저 옳은 일을 행하며 자신의 공적을 기리고 싶지 않아 장사꾼이라 말하고 돈을 요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자신이 가문의 땅문서까지 모조리 들고 왔는데 고작 금원보가 담긴 주머니만 챙기다니.
그렇다면 이 모든 흥정은 그저 핑계였던 것인가.
아마 저 금원보도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무욕한 자로구나.
어찌 이리도 의로운 인물이.
어쩌면 부끄러움이 많은 의적(義賊)?
허허, 온갖 비리로 점철되는 관리들이 판을 치는데 암지에서 저런 인물이 활동하고 있으니 아직은 나라의 미래가 밝구나.
“확실히 조지기나 해. 한 놈도 빼먹지 말고.”
“그건 걱정 마시오. 내 관직과 언주 방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좋군. 그럼.”
파앙!
진무는 대답과 동시에 용천혈로 기를 뿜어 창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속도의 빠름 때문인지 방만평은 순간적으로 진무가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방만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이보게, 이보게. 어서 일어나게. 지금 정신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짝, 짝!
방만평이 갈천벽의 따귀를 미친 듯이 후려쳤다.
증좌 덩어리라네. 내가 샀어! 단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금원보 서른 개에 이걸 샀단 말일세!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 * *
“에헤라!”
방만평의 집을 벗어나 화산을 향해 가는 길 내내 진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저 황금 열 관을 찾으러 왔더니 이놈이 새끼를 낳아 사십 관이 된 것도 모자라, 덤으로 치부책을 얻어 마음에 안 드는 놈 엿 먹일 수 있게 된 것도 좋은데 금원보까지 제법 두둑하게 챙겼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까?
황각수의 치부책.
방만평이 어느 선까지 건드려 놓을지는 모르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흐음, 좀 더 비싸게 받고 팔 걸 그랬나?
아니, 아니다. 과식하면 체한다고, 관의 일은 관인에게 맡기고 무림인은 무림의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그게 제일 좋다.
머지않아 형장에서 절규할 태양명의 욕심 많은 얼굴을 생각하며 속도를 더하자 멀리 서악이라 불리는 화산(華山) 아래 화음현이 보였다.
마을을 만나면 술 한잔하며 쉬어 가는 것이 나그네의 본분이지만 지금은 그딴 거 필요 없다.
이제 마지막이다.
양의심공의 마지막 조각.
그것이 엎어지면 코 닿을 화산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만 얻으면!
정사마, 황제, 다 내 밑…… 흐흐흐.
“멈추시오!”
“……흐?”
즐거운 생각에 빠져 달리다 보니 벌써 화산의 산문에 도착해 있었다.
소매에 매화 문양이 선명한 도포를 입은 무인이 진무의 앞을 가로막는다.
“도우께서는 뉘시길래 이 밤에 산문을 오르려 하십니까?”
따로 도관(道冠)을 쓰지 않고 머리를 말아 올려 수더분하게 묶은 무인의 담담한 말투에, 그 본신에 지닌 힘이 강렬하게 느껴져 왔다.
검을 등 뒤로 잡은 채 담담히 서 있으나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곤륜이나 공동처럼 거대하고 화려하게 산문을 짓고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그 앞을 막은 무인이 화산의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움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은은한 위압감을 발하는 기세.
산문이 어찌 생겼는지조차 관심 두지 못하게 만들 만큼 시선을 빼앗는, 잘 정련된 기도였다.
어찌하여 세인들이 중원 검공의 삼절로 무당의 태극(太極)과 남궁의 창천(蒼天)에 더불어 화산의 매화(梅花)를 꼽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화산의 도우를 뵙습니다. 무당의 진무입니다.”
진하게 느껴져 오는 화산 무인의 날카로운 선기에 흐뭇함을 머금은 진무가 태극패를 꺼내 놓았다.
“아, 무당지검이십니까? 이런,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군요. 화산의 일대제자 법의입니다.”
진무가 신분을 밝히자 화산의 무인 법의가 반색하며 예를 취했다.
마치 미리 올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어찌?
진무가 의아해하는데.
“운암 도장께서 미리 도착해 알려 주셨기에 낮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맞다. 먼저 보냈지.
그제야 운암을 떠올린 진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오르시지요. 무당지검을 기다리시는 분이 많습니다.”
기다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성이 자자한 무당지검이 바로 이 몸이다.
굳이 화산과 연을 맺은 적은 없어도 반가워할 수 있지.
곤륜에 은혜를 입히고, 공동에 은혜를 입히고.
이쯤 되면 도문 한정으로는 거의 은혜 제조기나 다름없는…….
“뵈시면 반가우실 겁니다.”
응?
반가워? 누가?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법의가 미소만 가득 머금고 있다.
이 새끼야, 그냥 말을 해라. 판만 들입다 깔지 말고.
사람 궁금하게.
“궁금하시죠?”
“…….”
“하핫, 어서 올라가시지요. 아무래도 직접 뵈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이 새끼…… 팰까?
웃으며 앞서 걷는 법의를 보며 진무가 한참이나 고민을 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진무가 법의를 따라 바위로 이루어진 화산을 훌쩍훌쩍 뛰어오르며 뒤따랐다.
앞서가는 법의는 화산의 대표적인 경공 암향표(暗香飄)요, 뒤따르는 진무는 구름 밟듯 가벼운 무당의 제운종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둘의 모습은 마치 적막한 밤에 매화 향기가 구름 따라 흐르는 듯이 잘 어우러져 보였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화강석 바위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화산파의 도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달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화강석 위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도량에 긴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으니 또 하나의 절경이었다.
하지만 풍광에 감탄하기도 전에.
“진무야!”
“……?”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미리 와 기다리고 있는 운암의 뒤로 보이는 서른 초반의 도사는 원화관의 일대제자 진허였고, 또 그 뒤에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스승님?”
명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