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진무가 어깨에 걸쳤던 검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누군가에 대적하기 위해 처음으로 뽑아 보는 일휘.
검날에 반사된 빛에 기분 좋게 눈을 찡그린 진무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천천히 검극을 아래로 내린다.
지이잉.
진무의 흥분이 전해져 제 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옅은 울림을 만든다.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심장을 온통 두근거리게 했다.
주위를 둘러싼 화산의 일대제자, 매화검수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기수식을 취하고 진무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잘 짜인 검진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짓눌러 버리면 두 초식? 아니면 세 초식?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하지만 진무는 가슴을 뛰게 만드는 지금의 흥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문득 일휘를 내려다보자 놈이 어서 자신에게 기운을 주입해 달라며, 당장이라도 날뛰어 보겠다며 재촉하는 듯했다.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 또한 좋다.
이래서 무인이라는 놈들이 검이라는 도구에 목을 매는 것인가?
이래서 무공에 대한 깨달음보다 검이라는 쇠붙이에 이름을 지어 주고, 생명도 없는 그것의 본질에 대해 깨닫기 위해 갈구하는 것인가?
지이잉!
검, 일휘가 날뛰고 싶어 더욱 발광을 한다.
옅었던 검명이 진하게 울려 진무에게만 들리는 듯하다가 어느새 검진을 아우르고, 종내 귀가 달린 모든 이에게 스미어 화산을 채운다.
굳이 기운을 담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의 울림에 동한 화산의 무인들이 놀람을 토해 내었다.
“허! 이렇게 뚜렷한 검명(劍鳴)이라니. 검이 스스로 운단 말인가? 소싯적의 검성께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인데…….”
태을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감탄사를 뱉는다.
그의 말에 명진의 입은 정말로 입꼬리가 찢어져 귀에 닿을 듯했고, 눈에는 습막이 잔잔히 어렸다.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을 자신의 제자가 나아가고 있다.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무림 최고의 검진 중 하나라 추앙받는 화산의 매화검진 안에 서 있으나, 모든 이의 눈에는 오직 진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검진보다 거대해 보이는 무인.
그가 곧 진무였다.
차라락!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진무가 가벼이 일휘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손을 비틀었다.
어떤 것이 좋을까?
청상에게 가르침을 내렸던 유운검?
하나 무당을 대표하는 검공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굳이 선택하지 말자.
검공이라 함은 결국 사용하는 이의 움직임을 검에 담는 것이니 어느 것이든 무엇이 중요할까?
진무는 천천히 검에 자신의 선기를 주입했다.
타고 흐르는 기운이 검에 어리어 푸른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작해 볼까요?”
진무가 이전에 지어 본 적 없는 잔잔한 미소로 검진을 바라보며 첫 일 보를 내딛자, 매화검진이 그와 동시에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러다 점차 가속을 붙여 빠르게 회전하며, 모두의 시선을 빼앗아 버린 진무를 질투하듯 그 모습을 감추려 드는 검진.
보는 이가 삼키던 침이 다해 입 안이 메말라 가고, 검진의 회전이 극한에 다다른 순간.
파앗!
검진의 첫 번째 수가 시작되었다.
곧게 뻗어졌던 검을 따라 검진의 한 자락이 그 중심을 향해 빠르게 찔러 들어온다.
필경 들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함인데 진무의 눈에는 마치 검이 길게 줄을 지어 찔러 들어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땅!
첫 검격을 튕겨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개의 검이 진무의 양 허리를 노려 온다.
지독하도록 자연스러운 연환.
훌쩍 뛰어올라 피한 진무의 머리 위로 원래의 순서가 그러한 듯이 십수 개의 검이 곧게 세워져 바닥을 향해 세차게 떨어졌다.
취리릭!
허공을 발디딤 삼아 몸을 비튼 진무가 바닥에 내려서자 쏟아지던 검격이 방향을 바꾸어 진무를 뒤따랐다.
그 모습이 마치 선두에 선 진무가 만들어 낸 바람결을 뒤따르는 초여름 꽃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검진에 쫓길 뿐이었다.
탁!
가볍게 일 보를 밟아 달음질하던 몸을 세운 진무가 힘껏 잡은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땅!
수직으로 그어 내림과 동시에.
따당!
세차게 횡으로 베어 내고.
슈욱!
자신을 뒤쫓으며 겹쳐진 검격을 향해 일휘를 강하게 찔러 넣었다.
고작 세 초식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검공의 기본이 모두 담겨 있기에 휘둘러지는 검을 따라 대기의 결이 방향을 바꾼다.
모두가 허투루 대하는 무당의 삼재검(三才劍).
저자의 어린아이도 흉내 낸다는 그 흔한 검초였지만 어찌 비할 바가 있겠는가?
자고로 명인의 붓은 일 획을 그어도 인생을 담는 법이다.
진무의 검에 천지인의 심득이 담겨 있으니 지금의 삼재검은 그 어떤 검공보다 강맹했다.
콰아앙!
화산 검수들이 진무를 향해 그려 내었던 거대한 매화가 거친 폭풍을 맞은 것처럼 흩어진다.
하지만 매화검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다.
부서진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지는가 싶더니.
“낙화(落花)!”
검진의 수좌가 외침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띄운 검수들이 수직으로 검을 그어 매화 잎의 문양을 그려 내었다.
‘큭.’
사방 천지가 매화로 뒤덮이니 진무는 마치 꽃밭에 갇혀 버린 것처럼 코끝을 찡그렸다.
꽃비가 내리듯이 쏟아지는 매화검의 향연, 그와 동시에 두통이 생길 만큼 짙게 배어 나오는 매화향.
과연 화산인가.
매화검법이 극의에 이르면 검에서 향기가 난다 하더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줄지어 달려들던 검격이 산검이 되어 어지러이 흩날리고, 비로 변해 떨어진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자면 우중거(雨中去)의 걸음이 필요하겠으나, 피할 생각 따윈 이미 지워 버렸다.
쏟아지는 매화를 모조리 부숴 버릴 생각을 품은 진무가 희미하게 웃으며 검을 당겼다가 비틀어 흔들며 위로 쏘아 올렸다.
취릿!
버들처럼 흔들린 검극이 잔상을 남기기 시작하더니, 점차 그 수를 더해 간다.
“저건!”
지켜보던 석대의 인물들은 또 한 번 놀람을 금치 못했다.
진무의 검에서 만들어진 것은 다름 아닌 태청산수였다.
그저 손으로 펼치는 것을 검으로 바꾸어 펼치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실로 말도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허! 대단하구나. 수공을 검공으로도 바꾸어 펼칠 정도로 깨달음이 깊단 말인가?”
태룡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숨을 토해 내듯이 감탄했다.
땅! 따다다당!
하늘을 뒤덮은 천 개의 잔영으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무당의 태청산수가 아니던가?
지면을 가득히 채워 버린 검의 잔영이 수직으로 들어 올린 진무의 검을 타고 쏟아지던 매화의 중심을 모조리 꿰뚫어 놓았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으나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매화검수들은 당황하지 않았고, 진무 역시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꽝! 쩌어엉!
본격적으로 서로의 힘을 겨루듯이 부딪히기 시작하자 충격파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검명이 짜르르 울리니 산군(山君)의 포효를 들은 것처럼 화산 전체가 겁에 질려 떨어 대었다.
콰우우우!
검날의 비틀림을 따라 만들어진 푸른빛 검기의 회오리가 떨어지는 꽃잎을 빨아들이고.
콰아앙!
당김으로써 끊어 버린 기운이 매화검수들이 뿌린 검화를 모조리 빨아들이며 응축하는가 싶더니, 이내 폭발한다.
“합!”
자세를 낮추어 힘껏 움켜쥔 검에서 실처럼 가는 기운이 솟구쳐 검사를 만들고.
사방 천지를 뒤덮으며 펼쳐지니 마치 푸른 구름이 산정에 내려앉은 듯이 흐른다.
땅! 따다다당!
하나의 검이 사력을 다해 오는 스물네 개의 검격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모조리 때려 내었다.
“아!”
명진의 눈물은 감격에서 경악으로 바뀌어 흘렀다.
삼재검을 시작으로 하여 부드럽게 흘러 당겨졌다가, 강맹한 힘으로 뿜어져 무거움을 더하는 진무의 검은 이제 무당의 모든 검공을 그려 내고 있었다.
삼재를 시작으로 오행, 칠성, 구궁, 태청, 유운과 청운, 귀운…….
모든 검공이 잘게 쪼개지고 나누어져 펼쳐지니 그곳에 화산의 매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비무가 아닌 춤이었으며, 대결이 아닌 유희였다.
진무는 마치 검연을 하듯이 무당의 모든 검공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해 내며, 충검에서 시작하여 현기를 지나, 탄기에서 의기의 경지로 넘어갔다.
“진무야…….”
참을 수 없는 감격에 절로 입을 열어 제자의 도명을 뇌까리는데 진무의 움직임이 다시 변화했다.
일휘에서 뻗어 나온 유형화된 기운이 오롯이 검날에 서린다.
시리도록 푸른 기운, 검강.
세상이 푸른빛으로 가득 찼다.
검진과 진무의 겨룸이 수백 초를 헤아릴 무렵, 덩실거리듯이 검무를 추던 진무는 문득.
땀?
검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흐른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간다.
여름날 더위의 찝찝함이 아닌, 상쾌함을 머금은 땀이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머릿결을 적신 땀은 흘러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 뿌려진다.
땀을 흘릴 정도로 심취하였던가?
좋구나. 정말로 좋아!
신이 났다.
즐거움이 머리를 가득 채워 터트려 놓는 것만 같았다.
진무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매화검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전까지의 움직임이 검진에 수동적으로 어우러졌던 것이라면, 이제는 검진이 진무의 움직임을 따라 휘돌고 있다.
꽃밭을 누비는 나비처럼, 진무는 여유롭게 그 속에 어울리듯 스며들어 자신의 검에 검진이 따라 움직이게 했다.
이끌림이 아닌 이끎.
더 이상 매화향이 코끝을 간지럽히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 살 내음처럼 부드럽고, 여인의 몸에 발린 향유처럼 향기로우니 되레 마음이 편해지고 몸이 차분히 가라앉아 온몸의 기운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느낌의 무아와 일체.
스스로를 잊어 가는 단계.
진무는 검진의 한 조각이자 수좌가 된 것처럼 뒤섞여 들었다.
그런 경우가 있다.
수련에 열중하던 무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 단계를 나아가는 때.
진무는 지금 이전의 삶에서 이루어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검진이 진무의 움직임을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로 그 속도가 빨라지고, 검수들의 입에서 간간이 거친 숨소리가 터지던 와중.
“저, 저건!”
이전보다 큰 놀라움에 석대에 앉아 있던 화산의 수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고 말았다.
손을 떠나 둥실거리며 떠오른 검, 일휘가 생명을 얻은 듯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무의 손길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스로 휘돈다.
매화검기를 잘라 내고 스스로 살아 춤춘다.
사람들이 검의 극의라 불렀던 그것.
이기어검(以氣馭劍).
진무는 자신도 모르게 검공에 취해 전설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손의 기운이 미치는 수어(手馭)의 경지에 불과하나.
누가 있어 그의 나이에 어검술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진무라는 존재에 자유로이 움직이는 검의 위력이 더해지자 매화검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따라잡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압도당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젠장! 검부터 막아라!”
수좌의 명령에 매화검수들이 일제히 일휘를 향해 검을 집중하며 달려들었다.
고작 검을 막기 위해.
따아아앙!
열 자루의 검이 만들어 낸 거대한 매화가 일휘와 부딪혀 날카로운 파공음을 만들어 화산의 산자락을 뒤흔들어 놓는다.
“하압!”
검과 검진이 팽팽히 맞서는 순간 진무가 손을 떠났던 일휘를 역으로 잡아 바닥을 향해 거칠게 찍어 눌렀다.
쩌어어엉!
반이나 박혀 버린 검과 함께 푸른 선기가 그 중심점에서 터트려져 폭풍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후욱, 후욱, 후욱…….”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진무의 숨소리.
“……!”
검진이 무너졌다.
매화검수들은 원래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바닥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며 미끄러져 주저앉아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가쁘게 뛰는 심장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진무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기어검이라니?
이전 생에 깨달았던 경지가 아니다.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 앞에서 느낀 희열을 어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그저 거친 호흡을 뱉어 내는 와중에 눈을 끔벅이며 땀으로 흠뻑 젖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마-안! 멈추어라!”
“…….”
시험의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산의 매화검수들이 지독한 패배감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졌다.
화산이 오랫동안 굳건하게 그 명성을 지켜 왔던 매화검진이 무너졌다.
단 한 사람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