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진회루 청류실(靑柳室).
전각이 아닌, 정원 방향으로 지어진 ‘경(冂)’ 자 모양의 정자.
한쪽 벽면에는 고풍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족자가 과하지 않게 걸려 있었고, 뒤쪽 벽을 채운 자개 서랍장 위로는 난분(蘭盆) 몇몇이 고급스럽게 자리를 채웠다.
앞은 막힌 곳 없이 정원을 향해 뚫려 있으니 멀리 담벼락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이런 모양으로 지은 것도 다 이유가 있구나.
경(冂), 멀다는 의미 외에도 비운다는 뜻이 있으니 과연 그 뜻에 걸맞은 곳이다.
한 모금 마신 엽차가 목구멍을 지나 온몸으로 퍼져 가니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했다.
“대인.”
“…….”
마루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던 진무를 향해 정갈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다가왔다.
“술을 올릴까요? 아니면 식사를 올릴까요?”
“식사가 좋겠다. 잔잔한 흥취를 느낄 수 있는 악공도 부르도록 하고.”
“준비하겠습니다.”
진무의 대답에 여인이 다소곳이 대답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이제 시작이다.
지금쯤 진회루의 몇몇은 진무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어린 무인.
소박한 흑의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검이나 서슴없이 금원보를 꺼내 드는 재력, 그리고 굳이 조용한 청류실을 원하는 것까지.
시선을 끌지 않으려 할수록 알아보는 자들의 호기심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정보는 그들에게 있어 ‘돈’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은원보를 받아간 소동, 시중을 들기 위해 찾아온 시비는 본능적으로 진무의 정체가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것이다.
청류실에 들어온 지 이각.
진회루를 찾은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소문은 화살보다 빠르고, 범람하는 황하의 물결보다 힘차게 퍼져 나가는 법이니 진무에 대한 이야기는 벌써 매꾼에게 팔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밑밥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기가 다가서도록 미끼를 던질 차례였다.
진무는 청류실의 정원 담벼락과 이어진 문을 바라봤다.
후원의 다른 곳이 그러하듯 문이 열린 입구를 반듯한 차림을 한 사내가 지키고 있었다.
감시가 아닌 보호를 위한 호위 무인이다.
청류실을 찾아온 객이 조용히 즐기다 갈 수 있도록, 혹여나 길을 잘못 든 취객이 다가서지 못하게 번을 서는 것이다.
진무는 속으로 유감을 표했다.
미안하게 됐다.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미끼를 던지려면 소란이 필요해서 말이지.
“어이! 거기!”
“…….”
진무가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밖을 지키고 있던 무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너 인마!”
“……?”
죄 없는 무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왜 자꾸 안쪽을 힐끔대?”
“……예?”
머리 안 굴려도 된다.
이거 그냥 시비 거는 거야. 이유 없이, 뜬금없이.
“저는 그런 적이…….”
“이 새끼가 어디서 발뺌이야!”
일부러 고성을 질러 다른 전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확연히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지둥하는 무인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새삼 쿡쿡 찔려 왔다.
그래도 어쩌겠냐?
하필이면 오늘 번을 선 니가 좀 희생해라.
재수 오지게 없는 하루라 생각하고 털어, 알겠지.
“대, 대인 저는 정말로…….”
“이 새끼가 변명을 해!”
양의를 이용해 사기를 단전에 담은 진무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갔다.
짙은 살기가 담겨 번들거리는 그의 눈과, 칠흑같이 검은 기운이 감도는 그의 몸.
아, 오랜만에 하려니 좀 어색한데.
혼원은 모든 기운의 원형이자 근원이며, 모든 것이 정제되기 전의 어둠.
처음이 끝이고 끝이 곧 처음인즉, 어지러움 속에 질서가 만들어지니 이는 곧 혼원공이라.
쿠루루루.
진한 흑빛 기운이 팔을 휘돌아 내려 손안에 맺히니 마치 진무의 손이 검게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묵룡혼원공, 흑수(黑手).
흑색 강기인 묵룡을 불러내기 바로 이전의 단계였다.
“대, 대인!”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하는 살기에 무인이 몸을 떨며 사색이 되어 갔다.
“이 자식이! 감히!”
후웅!
거칠게 휘둘러 뿌린 손짓.
그 안에 어렸던 흑빛 기운이 거칠게 뿜어지며 용틀임한다.
쿠아악! 콰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 기운이 담벼락에 부딪혀 폭발했다.
일부러 귀밑머리를 스치게 한 기운에 무인이 전율을 느끼며 곧바로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당연한 반응.
고작 번을 서는 무인이다.
이제 입기를 넘어 충기에 닿았을까 말까 한 실력으로는 주먹에 담긴 기운 한 번에 일 장여의 담벼락을 박살 낸 인물을 상대로 매서운 눈빛 한번 내보일 수가 없었다.
“살려 줘? 그럼 보지 말았어야지!”
“어이구, 대인. 뭐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엎드린 무인이 가련하게도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어 대었다.
그 모양이 애처로워 마음이 아프지만 좀 더…….
이제 겨우 사방에서 무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새끼.”
진무는 속으로 거듭 사과를 건네며 엎드린 무인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끅.”
옷깃이 당겨지며 목을 조르자 무인이 괴상한 숨소리를 낸다.
한 대. 정말 가볍게 딱 한 대.
내가 어지간하면 죄 없는 사람에게 이러진 않는데.
한 대만 맞아 다오.
내 약속하마. 너는 지금의 고초로 대대손손 평안할 것이다.
원한다면 좀 더 좋은 자리도 알선해 주마.
톡!
기운이 담기지 않은 주먹을 아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럼에도 얼굴을 얻어맞은 무인이 일 장이 못 되는 거리를 날아 땅바닥에 거칠게 떨어진 것은 진무가 뒷덜미를 잡은 손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
무인이 희한하게 제 얼굴을 잡고 엄살을 부린다.
등이 더 아플 텐데?
겁에 질려 있으니 심리적인 효과가 고통을 지배하는 건가? 거참 신기한 놈이다.
“멈추시오!”
상황을 파악하던 진회루의 호위 무인들이 급히 달려와 무인에게 다가서는 진무를 막아선다.
“니들은 또 뭐야?”
역팔자로 휘어진 눈썹과 부릅뜬 눈빛에 호위 무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진회루의 호위를 책임지는 금안표요. 청류실의 귀인께서는 어찌 이 같은 소란을 만드시는 게요?”
“…….”
청의, 용목에 날카로운 검미가 인상적인 사내.
일개 주루에 고용된 무인치고는 제법 날카로운 기도를 품고 있는 자였다.
저도 제 실력을 아는지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소란? 하아, 이것들 봐라? 니들 따위가 감히 떼거지로 와서 나를 겁박해?”
“…….”
진무의 말에 금안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충 상황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사고를 먼저 친 것이 누군데 적반하장으로 겁박을 운운한단 말인가?
금안표는 진무가 이유 없이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어린놈의 새끼가.
“제가 보기에 손님께서는 저희 진회루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머문 값은 받지 않을 테니 그만 물러나 주시지요.”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협박임이 명백하다.
“물러나? 어쩌냐? 내가 원래 전진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괜히 미안하네.”
“…….”
“생각 있으면 직접 내쫓아 보든지.”
“그렇군. 좋소, 하면 지금부턴 손님으로 대하지 않을 수밖에.”
금안표가 가볍게 손을 들자 그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날개를 펼치듯이 좌우로 포위해 온다.
합해서 모두 아홉.
그래, 뭐.
기왕 저 자식이 희생하는 김에 니들도 좀 희생해라.
작정한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손님을 내보내라!”
금안표의 외침과 함께 둥글게 포위해 온 무인들이 일제히 진무를 향해 진병을 대신해 나무로 만들어진 봉을 세워 왔다.
금안표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라고 해 봐야 고작 탄기 언저리인데 수하들이야 오죽할까?
이미 묵룡혼원공의 경지가 의기에 올라 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이런 떨거지들을 상대하는 것은.
쿠류류류.
진무가 가볍게 발을 뻗어 바닥을 밟자 거친 투기가 묵빛으로 변하고, 발끝에서 시작되어 솟구친 검은 기운이 진무의 몸을 천천히 휘도니 마치 그의 전신에 검은 회오리가 맴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묵룡혼원공, 투사체(鬪士體).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술이다.
투기로 몸을 감싸면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어 부드러움을 지니게 되니 지극히 유연해지고, 묵룡의 기운이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겨 있으니 닿는 모든 것에 피해를 입히게 된다.
“뭐 해? 구경하는 거야?”
이죽거림과 동시에 진무를 중심에 두었던 포위망에서 목봉이 각기 다른 방향을 노리며 날아왔다.
슉, 슈슈슉!
상대의 움직임을 구속해 짓눌러 제압하려는 뜻을 품은 공격.
팔, 다리, 어깨.
하품이 다 나올 정도다.
멍청한 새끼들. 살기를 품고 죽일 듯이 덤벼들었어야지.
휘릭!
진무가 슬쩍 몸을 돌려 회전하자 목봉이 원래의 목표를 잃고 허공에 질러진다.
꽈악.
노린 곳은 그곳이 아니었으나 어느새 진무의 양 겨드랑이에 각기 다섯 개의 봉이 끼어졌다.
제압당한 것은 오히려 호위 무인들이었다.
뚜두둑!
팔에 힘을 주자 목봉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파앗!
가볍게 박찬 발놀림에 진무의 몸이 한곳을 향해 미끄러진다.
“어헉!”
식겁하는 표정의 무인의 턱에 가볍게 주먹 한 방.
퍼억!
들쳐 올라가는 고개와 함께 무인의 발이 허공에 떠오르고, 동시에 직각으로 꺾인 진무의 신형이 반대편으로 움직이며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쩌엉!
활짝 펼친 손바닥이 복부를 후려치자 또 다른 무인이 새우처럼 몸을 휜 채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땅에 처박힌다.
빡! 빠박!
이어서 휘돌려 찬 발이 좌측과 우측을 거의 동시에 때리자 두 명의 무인이 오다 말고 쓰러졌다.
곧바로 몸을 뒤로 물리며 다시 두 명의 무인 사이를 교묘히 파고든 진무가 양팔을 가슴 쪽으로 교차해 모으는가 싶더니 팔꿈치를 세차게 내질러 각각의 허리춤을 가격한다.
쩍, 쩌적!
그야말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연환격.
퍽! 퍽!
당황한 무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주먹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모두 여덟. 남은 것은 하나.
파악!
지면을 밟으며 높이 솟구쳐 마지막 남은 무인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진무의 발이 높이 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직!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짓밟힌 마지막 아홉 명째의 무인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
금안표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눈 몇 번 깜박이는 동안 아홉 명의 무인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정확히 몇 호흡이 걸렸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질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검은 기운이 솟구치고 나서부터는 퍽, 쩍, 빡, 콰직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어이!”
금안표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진무였다.
“이게 끝이냐? 사람을 더 불러오든가, 직접 나서든가?”
“…….”
금안표는 눈앞의 상대가 자신에게는 비견될 수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았다.
아직 수하들이 수십 명은 더 있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괜한 피해만 늘리게 될 것을.
그는 진회루 호위의 총책임자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허투루 일할 수는 없었다. 눈 앞의 괴인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스르릉.
결국 검을 뽑은 금안표.
“고수인지 몰라뵈었소. 부득불 살수를 범함을 이해해 주시오.”
이 새끼도 희한한 놈이네. 칼 뽑아 놓고 사과를 다 하고.
니가 무슨 정파냐?
그건 오히려 도사인 나한테 어울리는 행동이야.
그래도 마음에 든다.
방금의 모습을 보았다면 응당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거나 했어야 마땅한데, 굴하지 않고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하고 있었다.
진회루의 호위장으로서.
소문을 증폭시켜 놓자면 적어도 한 놈은 병신까진 아니어도 한 달 이상은 누워만 지내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넌…… 봐주마. 심하게 하진 않을게.
꾸욱.
진무가 금안표를 바라보며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촤악!
진무가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곧게 뻗어져 휘어져 들어오는 검.
좋은 기세다.
텅!
올려 친 손바닥이 검면을 때려 쳐올리고 비틀린 주먹을 따라 묵룡이 회오리처럼 뻗어 나갔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