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무영은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당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작은 평상에는 주름진 노파 하나가 사람 손 모양의 이파리가 달린 약초를 잘라 볕에 말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흔은 족히 되어 보이건만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정성껏 약초를 잡아 작은 칼로 다듬어 낸다.
슥.
힘이 과했기 때문일까?
자신이 그었음에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해 칼날의 예리한 부분이 끝내 노파의 피부를 잘라 버렸다.
“또 이러네.”
피가 철철 나기 시작했음에도 노파의 음성은 영 대수롭지 않음이다. 옆에 있던 걸레로 대강 손을 닦으려 하는 것을 무영이 급히 다가가 잡았다.
“……?”
“또 베이셨네요.”
무영의 말에 노파가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손을 빼려 했다.
“가만히 계세요. 이젠 잘 낫지도 않아요.”
무영의 말에 노파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상처 부위 옆의 혈도를 눌러 지혈하고, 자신의 기운으로 피를 막아 보지만 잘되지 않는다.
나이가 든 탓이다. 이젠 피조차 제대로 멈추지 못할 만큼 늙어 버린 것이다.
“늘 봐도 신기하네요.”
한참을 지나서야 피가 멈추자, 노파가 듬성듬성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무영은 빙긋 웃으며 장삼 안쪽 깨끗한 옷자락을 찢어 노파의 손을 감쌌다.
상처투성이의 손. 이런 사고가 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 일을 돌봐 주는 노파에게 이제는 좀 쉬라 몇 번이나 말했으나 도통 듣질 않았다. 특히나 무영이 출타했다 돌아올 때면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며 새로 음식을 해 오곤 했다.
“죄송하구먼요.”
노파가 주름진 눈으로 미안함을 말해 왔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무영이 빙긋이 웃는다.
“오늘은 그만 쉬시죠.”
“예? 아니유, 그람 안 되지유. 어른께서 집에 계신디.”
어른,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 언제나 그리 부른다.
노파가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가 봐야 할 듯합니다.”
“아, 일 보러 가셔유?”
“예.”
“하면 싸게 식사 준비를 하겠구먼유.”
“괜찮습니다. 나가서 먹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고로 밖에 일 보러 갈 때는 집밥 든든히 드셔야 하는 거유.”
무영의 손을 뿌리친 노파가 구부정한 허리에도 잰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말려도 듣지 않음이다. 그저 그것이 행복하다 하니 그대로 둘 수밖에.
무명촌(無名村).
말 그대로 이름이 없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생긴 지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곳에 사는 이들이 천여 명을 넘을 정도로 거대한 곳이지만 여전히 이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를 이어 오며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자들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사립문 밖을 바라보던 무영의 눈동자에 한 인물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당주님.”
장사꾼의 복장을 한 넉살 좋아 보이는 사내가 무영이 앉은 평상으로 다가와 앉았다.
털썩.
묵직한 짐이 내려지는 소리에 부엌으로 들어갔던 노파가 고개를 쏙 내밀고는 반가워한다.
“중표 왔구먼.”
“예. 잘 지내셨지요.”
“암만. 덕에 굶지 않고 살지.”
“뭔 그런 말씀을. 이번엔 생선 말린 것을 잔뜩 가져왔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셔요.”
“힘도 좋지. 그걸 다 메고 온 거여?”
노파가 중표가 짊어지고 온 커다란 짐을 보고 놀라워한다.
“매번 고마워서 어쩐디야? 잠깐 기다려. 내 퍼뜩 밥 준비를 할 텐께.”
“예.”
반갑게 인사를 나눈 중표가 흐르는 땀을 두어 번 훔치더니 무영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당지검의 행적을 찾았습니다.”
노파와 대화를 나누던 것과는 달라진 공손한 말투.
그는 중표라는 이름 외에도 추영(追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남지부를 맡은 영은당의 일곱 영수 중 한 사람이었다.
“서안부겠지?”
“예. 정무맹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어서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지만 확실합니다. 일단은 월영이 멀리 떨어진 채 은밀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묵영의 죽음. 역시 무당지검이 관여되어 있구나.”
“예.”
무영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한다.
무당지검, 진무.
정무맹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으나, 그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적의 수괴 중 하나였다.
그들의 조사에 따르면 모든 것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상관평이 예의주시했던 양의심공을 찾아다니던 그는 마치 전생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을 방해했고, 이제는 목줄기마저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상관평이 좌천되었고, 대랑이 죽었으며, 이제는 정무맹에 잠입한 세작들까지 소탕되고 있는 탓에 오랜 세월에 거쳐 삼궁이 정무맹 내부에서 준비했던 모든 기반이 모조리 흔들리고 있다.
‘역시 삼궁주님의 생각이 맞았던 것인가? 그저 표주를 떠난 애송이 도사라 생각했거늘.’
상관평이 떠나기 전, 만약 양의심공을 얻는 자가 있다면 그가 궁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 했다.
그 후 진무의 흔적을 발견한 곳은 곤륜이었고, 구야자를 미끼로 사용했던 일궁주의 계략이 그에 의해 와해되었다.
무영은 곧바로 화산을 찾아갔다.
양의심공이 보관된 장서각. 그곳을 불태운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상관평이 우려했던 양의심공을 절대로 얻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양의심공은 그곳에서 불탔으니 얻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멍청한 계집.’
화가 나는 것은 진무 그놈뿐이 아니었다.
내궁주 종려군.
어쩌면 이번 일을 키운 데는 진무라는 놈보다 그녀의 탓이 더욱 크다. 상관평이 건재했다면, 그녀의 계략으로 좌천되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궁주는?”
“살부, 금강야차대와 함께 천웅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천웅방에?”
“예. 동림전장의 황금을 털어 간 것이 천웅방이라고 하더군요.”
“…….”
“소림이 백마사를 습격하는 바람에 계획이 모조리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동림전장의 자금만큼은 확보할 생각인 듯합니다.”
“자금뿐만은 아니겠지. 종려군은 아마 사패천에서 떨어진 천웅방의 세력을 집어삼킬 요량일 것이다. 그래야만 대궁주에게 비벼 볼 여지라도 생기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무영이 나지막하게 말을 잇는다.
“추영, 내궁주에게 정보를 흘려라. 무당지검이 서안부에 있다고.”
순간 추영의 눈빛에 이채가 어린다.
“내궁주와 무당지검을 맞붙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추영은 무영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정무맹에 쫓기기 시작한 내궁주로서는 현재 머물 만한 곳이 없었다.
이궁, 일궁이 맡고 있는 사패천이나 마교의 세력권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 선택은 하나다.
무영이 말한 것처럼 사패천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와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천웅방.
철혈붕권 천우명과 관월 원공후가 버티고 있으나 살부와 금강야차대, 내궁주의 힘이 합해진다면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리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궁주는 실패해야 한다. 그녀가 실패를 해야 상관평이 다시금 삼궁을 맡게 될 것이다.
무영은 잠시 고민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무당지검의 행적을 흘린다면?
그녀는 분명 단독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할 것이고, 금강야차대는 목표했던 대로 천웅방을 칠 것이다.
면책의 목적으로 천웅방의 세력이 필요한 것은 종려군뿐만은 아니다.
삼궁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옆에서 보좌해야 하는 자신과 살부 곡마량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필시 추궁이 내려질 것이다.
그걸 알기에 살부 곡마량은 어떤 상황에서도 천웅방을 공격해 그 세력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어서 말머리를 돌린 종려군이 무당지검과 부딪친다면?
무당지검은 반드시 죽는다. 종려군의 무위를 알기에 단연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궁주와 무당지검 둘 중 누가 죽어도 상관없다. 서로 물고 뜯다 지친 놈을 우리가 죽이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남아 있는 모든 세작에게 전하라. 정무맹 쪽에는 역정보를 흘린다. 그들의 싸움에 누구도 끼어들게 해서는 안 돼.”
“…….”
무영의 명령에 추영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역정보를 흘린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좋지 않다. 영은당의 세작들이 모두 드러난 시점이다.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아마도 대부분이 그 과정에서 죽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분명.
“무명촌, 이제는 버려질 때가 되었다.”
“…….”
역정보를 통해 정무맹의 추격을 무명촌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을 불쏘시개로 쓰려는 것.
지금까지의 그 어떤 명령보다도 잔인했으나, 추영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무명촌을 만든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궁의 대체재. 가짜 꼬리.
추영이 무명촌의 평화로운 전경을 바라본다.
계단처럼 만들어진 논밭에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 빨래하는 아낙들과 나무 그늘 아래 잎담배를 피우며 담소하는 노인들.
어느 순간 추영의 눈에 비친 평화로운 전경이 뒤바뀐다.
다가올 미래가 만들어 낸 환상.
불타오르는 가옥들,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사방에 널린 시체들.
“추영.”
“…….”
“안타까워 마라. 마음을 굳게 먹어라. 궁이 목적을 이루면 후세는 약자들을 위한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저들은 그 같은 대의를 위해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다.”
무영의 잔인한 말이 추영의 가슴을 먹먹하게 다잡는다.
그리고.
“……대의를 위해.”
추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자, 식사들 혀.”
때맞춰 한 상 가득하게 차려 온 노파의 모습에 무영과 추영이 순박하게 웃는다.
“함께 드시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산자락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결을 따라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재배되고 있는 녹빛 약초가 쓰윽쓰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사람이 손짓하는 모양을 닮은, 대마(大麻)라는 약초가.
* * *
진무는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질기게 이어 온 관계를 모두 청산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안부의 일이 끝난 이후 진회루에 들러 허삼수를 다시 만났다.
“앞으로 제가 어찌 부르면 되겠습니까?”
“천주.”
“알겠습니다.”
진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허삼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아마 속으로는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긴 뭐라 부르건 무슨 상관일까?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천웅방으로 가십니까?”
“그래.”
“하면, 이놈을 함께 데려가십시오.”
허삼수가 데려온 꼬맹이.
황신(黃信)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막 스물을 넘긴 나이였고, 고집스럽게 다문 입만큼이나 무뚝뚝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생겼다.
스물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것은 둘째 치고, 외양이 영 희한하다.
여자라고 하기엔 선이 너무 굵고, 사내라기에는 이목구비가 너무 곱다.
미끈하게 잘 뻗은 콧날에 총기로 빛나는 눈동자. 속눈썹은 눈 절반을 가릴 정도로 길고, 입술은 피처럼 붉다.
앞쪽으로 공손히 모은 손은 누가 봐도 섬섬옥수요,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흰 것이 여장을 시켜 놓으면 절세까진 아니어도 가인(佳人) 소리는 충분히 들을 법했다.
설마 이놈도 제갈산산처럼? 아니, 그렇다기엔 딱히 뭣도 없는데?
제갈산산도 한눈에 알아본 진무였건만, 이놈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사……내새끼지?”
“…….”
진무의 물음에 허삼수가 고개를 들었다가 게슴츠레한 눈을 한다.
“계, 계집이냐?”
“사냅니다.”
그치? 그렇지?
미친, 그렇다는데 뭘 자꾸만 들여다보면서 확인한단 말인가?
생긴 게 아무리 묘해도 그렇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 주책바가지처럼…….
순간 진무의 변화를 눈치챈 허삼수의 눈에 벌레를 보는 듯한 감상이 어린 것은 착각이었을까?
“흠, 흠.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
“아, 예에.”
“…….”
젠장, 망할 무당. 나도 모르게 남색병이 옮은 건가?
생각이 그쯤에 미치자 진무는 질색하며 오만상을 찌푸렸고, 면전에서 대놓고 오가는 오해에도 황신은 표정 한번 변하지 않은 채 공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저런 놈들은 대개 속을 잘 감추니까. 흠, 왠지 마음에 안 드는데…….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황신을 위아래로 훑는 진무를 바라보던 허삼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하오문에서도 꽤 뛰어난 녀석입니다. 한때 은위단이기도 했고, 문주님께서 제자로 들이려 했을 만큼.”
은위단이라고?
명세찬이 제자로 삼으려 했어?
거 별일이네.
“천웅방까지 가시는 동안 천주님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 저희와의 연락도 이 녀석을 통하시면 되구요.”
말하자면 연락책에 시종을 얹고, 거기에 감시역까지 겸한다는 뜻이리라.
뭐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은 받아 두자. 어차피 앞으로 하오문과 연락을 유지하기도 해야 하고.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공후 이 자식은 아직도 명세찬과 연락을 취하지 못한 모양이다.
천웅방을 떠나면서 살막과 하오문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누차 당부했구만.
천우명과 함께 있으니 덩달아 멍청해지기라도 한 건가?
“일단 오늘 하루는 쉬고 내일 출발하시지요. 제가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안 그래도 말을 한 마리 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돈 굳었네. 기특한 서안지부장 녀석.
진무가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이향란이 직접 준비했다는, 술과 안주가 가득히 차려진 주안상이 들어왔다.
후후, 역시.
다시 돌아오니 역시나 좋구나.
역시 꽉 막힌 도사 허울보다는 사패천주가 최고다.
오늘 밤, 개처럼 마셔 주마.
사족 보행이라는 게 뭔지 보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