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47
247화
덜컥.
황신이 대답 대신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번쩍이는 은원보의 빛에 입구를 지키는 장정들의 눈빛이 변하고, 만면에 비웃음을 머금는다.
그들의 생각은 똑같을 것이다.
물주, 어쩌면 호구.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내할 인물을 부르겠습니다.”
휘익!
손가락을 입에 넣고 바람을 불자 멋들어진 휘파람 소리가 나더니, 곧 깡마른 소동 하나가 열심히 달려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뛰어오면서 헉헉대는 모습이 저녁나절에 풀죽이라도 먹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이놈 새끼가! 빨리 오지 못해!”
“…….”
안타까울 정도로 힘들어 보이는 그 모습에 진무가 눈을 살짝 찡그렸지만, 딱히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소동이 불쌍하긴 해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삶이 있는 법이다.
현포루나 다른 곳에서 만난 소동들에게 했던 것처럼 잠깐의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박장, 아니 사패천의 영역에 있는 아이들은 다르다. 그 아이와 그 가족들의 주위에 사는 이들 모두가 사파의 족속. 은원보 하나가 그들의 목숨을 앗는 칼이 되어 돌아간다.
왜? 모두가 뺏으려 할 테니까.
진무가 사패천주였을 시절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손대는 짓을 한 놈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지만 그를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신이 아니기에.
하지만 적어도 저렇게 피골이 상접하도록 굶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최소한 일을 한 만큼의 보상은 받도록 했으니까.
진무는 그 모든 것을 하오문에서 감시하도록 했다. 하오문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 역시 소중한 정보 자산이니까.
물론 당시의 야금당은 기조차 제대로 못 펴기도 했었지만.
상황은 소동을 따라 도박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진무는 하나같이 뼈다귀처럼 보이는 소동들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패천 예하의 행태는 말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지금의 사패천은 유월청의 시대이니 그의 통치를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누가 통치를 하든 무림인과 민초는 엄연하게 분리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망할 자식이 자신이 수십 년을 바쳐 쌓아 올린 것을 이렇게 말아먹고 있다니.
나중에 만나면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도박장에 가까워지자 멀리 어슴푸레한 빛이 보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귀를 울려 올 정도로 커질 즈음 도박장의 내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죽여라!”
“죽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무언가에 취해 버린 듯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대는 사람들.
곳곳에서 연초를 피워 대는 통에 주변이 희뿌옇게 보이는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며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종잇조각을 들고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
누군가의 승리를 목놓아 외치고, 누군가의 죽음조차 유흥이 되는 생사의 격투장.
목숨 걸고 싸우는 놈들이나 돈 걸고 소리 지르는 놈들이나 죄다 똑같다.
좌우지간 꼴 보기 싫은 것들. 싹 다 쓸어 주마.
물론 그 싸움은 놈들이 자신 있어 하는 방법으로 할 것이다.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황신.”
“……?”
“너 도박 좀 하냐?”
혹시나 물어본 말에 황신이 어깨를 세우고 가슴을 내민다. 자신 있다는 뜻이리라.
하긴, 은위단 놈들은 하오문의 최정예답게 온갖 잡기에 능했다.
와중에 초감각에 가까운 청력을 가진 황신이라면 듣는 것만으로 패를 모조리 읽어 낼 것이 분명하다.
오늘따라 황신이 유난히 믿음직해 보였다.
“좋아. 가자. 싹 쓸어 버려야겠다.”
진무는 소동을 따라 생사의 격투장을 지나 상급 도박장으로 안내되었다.
* * *
“귀하께선?”
도박장에 거만하게 책상다리를 틀고 앉는 진무를 향해 방 주인이 묻는다.
“도박꾼에게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소. 돈이 곧 이름이고 신분이지.”
방 주인의 말에 진무가 눈치를 주자 황신이 도박 자금을 담아 온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딸깍!
궤짝이 열리고 드러난 그 훤한 빛에 도박꾼들의 눈동자에 탐욕이 어린다.
“자, 시작합시다!”
더 이상 그들의 신분을 궁금해하는 이는 없었고, 방 안은 순식간에 탐욕의 시간 속에 놓였다.
도박에는 골패라는 것이 있다.
동물 뼈로 만든 서른두 쪽의 네모난 패로 하는 도박.
착착착.
패가 뒤섞이고 나누어진다.
진무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는 도박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황신이다. 그가 그토록 자신을 보일 정도라면 이딴 도박꾼 놈들이야.
가거라! 황신!
모조리 쓸어 와라!
진무가 마음속으로 외치는 열띤 응원에 황신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고, 귀가 쫑긋거린다.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는 그의 초감각이 패를 읽어 내기 시작한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의 패가 오가며 짝패가 맞춰지기를 반복하고, 말없이 돈이 오간다.
서늘하다.
패가 아니라 비수가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듯한 느낌이다.
판세를 읽고 자신이 걸 돈을 결정하고 패를 돌리는 그들의 손놀림이 마치 정상에 오른 자들의 결전을 보는 듯이 침이 말라 온다.
도박에 미쳐 있는 놈들답게 손이 섬전보다 빠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황신의 청각은 눈보다 정확하고, 손보다 빠르니까.
새벽 첫닭이 홰를 치고 어슴푸레하게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각.
도박장이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야 방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해소되었다.
“핫핫핫!”
승자의 웃음소리.
“미안해서 어쩌우? 이거 원 개평이라도 줘야겠네. 옛수.”
짤랑.
쩔거럭도 아니고 짤랑.
승자가 아량을 보이며 겨우 철전 다섯 개를 바닥에 던져 준다.
진무가 망연한 눈길로 철전을 바라보았다.
“…….”
이 새끼가 지금 거지 동냥 주는 것도 아니고.
“둘이 국밥값은 될 거요. 분하면 내일 다시 오시든가? 핫핫핫!”
그 말을 끝으로 갔다.
궤짝을 들고…….
진무는 힘 빠진 눈으로 황신을 바라봤다. 그런 그를 마주 바라보며 밤새도록 심력을 낭비하며 피로에 찌든 황신이 해맑게 웃는다.
황신의 청력은 완벽했다. 패 따위는 소리만 듣고도 전부 맞춰 버렸다.
……노름의 규칙을 몰랐을 뿐.
아니, 근데 어떻게 밤새도록 도박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기는지 모를 수가 있냐고!
진무의 잡아먹을 듯한 눈빛에도 황신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웃냐? 웃어?
퍼억!
밤샘의 피로와 분노가 담긴 진무의 발이 황신을 미친 듯이 밟아 대기 시작했다.
“꾸에엑!”
이 새끼가 돈을 다 날려 놓고 뭘 잘했다고 비명을 질러?
이 머리가 장식인 놈아.
죽어라! 죽어 버려!
* * *
결국, 도박장 문이 닫혔고, 진무와 황신은 함께 온 호위 무사들과 함께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도박장을 털어서 야금당에 타격을 입히려 했던 원대한 포부는 하룻밤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밤새 지친 위장을 달랠 해장국 한 그릇 사 먹을 철전 다섯 개만 남았다.
그야말로 탈탈 털려 버렸다.
탈탈, 탈탈!
아,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황신, 이 새끼.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얼굴이 팅팅 부어오른 황신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아, 망할 새끼. 입만 산 새끼.
부하 오 호, 이 새낀 안 되겠다. 나중에 명세찬을 만나면 다른 놈으로 바꿔 달라고 해야지.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황신이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고 한곳을 바라본다.
휙휙.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하는데 듣기 싫…… 아니, 읽기 싫다 이 새끼야.
진무가 한숨을 내쉬고 주먹을 들자 황신이 급했는지.
“천주님.”
“왜! 뭐!”
“저쪽에 뭔가 이상한 대화가.”
니가 제일 이상하다, 이 새끼야. 이 도박도 못 하는 놈이 감히 살아 보겠다고 화제 전환을 시도해? 아직 덜 처맞았구나.
팔까지 걷어붙이는 진무의 모습에 황신이 사색이 되어서 외친다.
“애가! 애가 넘어가요!”
“……?”
“저쪽에 어떤 새끼가 도박 빚으로 제 자식을 넘긴다니까요?”
진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황신을 쏘아본다.
이 새끼가 이젠 하다 하다 거짓말까지 한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그렇지, 도박 빚 갚자고 제 자식을 파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 비일비재하지. 나도 부모에게 버려졌으니까.
일단 가 보자.
일단 가서 보고, 아니면 너는 오늘 뒈질 줄 알아라.
* * *
도박장의 뒤편.
취객들이 대충 널브러진 그곳에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와 도박장 소속인 듯한 서너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한 냥.”
“예에? 아이구, 염 대인. 한 냥이 뭡니까? 이놈이 그래도 저희 애 중에서는 제일 실한 놈인데요.”
야비한 얼굴을 한 사내가 제 손에 잡혀 오들거리며 떨고 있는 아이를 보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봐, 한가. 지난번에 데려온 자네 둘째, 한 달도 못 가서 죽었어. 어디 폐병 있는 걸 감추고는.”
“이놈은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지육신 멀쩡하지요! 속도 그놈과 다르게 건강합니다. 한 냥만 더 주십시오.”
“시끄러워. 한 냥, 받으려면 받고 말려면 말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도박장의 새벽 시간.
아이의 아비인 한가는 자식을 놓고 한 냥 두 냥 흥정을 하고 있었다.
흥정하는 대상은 도박장을 관리하는 염등산과 그의 수하들이다.
“부탁드립니다.”
“…….”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사정하는 한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은 염등산이 품에서 은 한 냥을 바닥에 던졌다.
“가지고 꺼져. 다음에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암요! 암요!”
흥정이 통한 한가는 아이를 염등산의 수하에게 넘기고는, 팔아넘긴 아이보다 바닥에 떨어진 한 냥이 더욱 소중하다는 듯 흙까지 함께 손에 품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쯧쯧, 개자식이 따로 없구만. 제 자식 목숨값으로 은 두 냥이라니. 다음에는 제 마누라라도 팔아넘기려나?”
한가가 사라지고 홀로 남게 된 아이를 쳐다본 염등산은 히죽 웃으며 쪼그려 앉았다.
“너 몇 살이냐?”
“…….”
비정한 아비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겁에 질려 말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짜악!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가.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어른의 큼지막한 손자국이 붉게 남은 아이가 울지도 못하고 발발 떨며 오줌을 지린다.
“이 새끼가. 몇 살이냐고?”
염등산이 눈을 부라리자 아이가 떨리는 고사리손 두 개를 들고 그중 손가락 세 개를 접었다.
“근데 이 새끼가 말은 안 하고! 확!”
염등산이 다시 손을 들자 아이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움츠린다.
“하, 됐다, 됐어. 말을 말자. 그나저나 일곱이라 이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아이의 손을 쥔 수하를 향해 묻는다.
“야, 본당에 보내야 할 애새끼 숫자가 몇이라고?”
“이번 달에 여덟입니다.”
“그럼 이놈까지 채워서 보내면 되겠네.”
“예.”
“잘됐네. 데리고 가서 씻겨. 한동안 살 좀 붙게 잘 먹이고.”
“알겠습니다.”
염등산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고, 수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아이와 함께 도박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황신.”
“…….”
황신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진무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아 있다.
마치 대기가 무거워진 듯한 착각에 어깨가 짓눌려 오는 것만 같았다.
“따라가.”
“…….”
“그리고 죽여.”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에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섭다.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딱히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졌다. 황신은 종려군과 싸울 때의 진무보다 지금의 진무가 몇 배는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가.”
진무의 명에 황신이 급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진무는 가만히 골목 안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염등산이라는 인물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아이가 있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면에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은 한 냥을 허겁지겁 주워 담은 한가의 손길이 남긴 흔적이 보인다.
부욱!
진무는 얼굴을 덮고 있던 인피면구를 뜯어 남아 있는 호위 무인 중 한 사람에게 건넸다.
“돌아가라. 그리고 하오문에 내 말을 전해.”
“…….”
“부현에서 야금당을 지운다.”
그 말을 끝으로 진무는 골목 안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그에겐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짓던 미소는 물론, 잇새로 드러나던 송곳니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에는 폭풍이 몰아치듯 사기가 머금어졌고, 딱히 기세를 끌어 올리지 않았음에도 살기가 퍼지며 사방을 짓누르듯 잠식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