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진무는 천주라는 말을 들은 이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진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복수심, 원한……은 그럴 만하다.
당시에 비록 약관에 불과했을 것이나 그 또한 무당의 흉사를 경험했으리라.
불길에 휩싸인 무당과 해검지의 핏빛을 기억하고 있을 터.
당장에 검을 들이밀고 죽인다 악을 써야 마땅함이다.
하지만 진명은 그러지 못했다.
진무는 어느 순간부터 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꽤나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빛. 아마도 사문의 원수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못내 인정하고 싶지 않음이리라.
젠장, 사람 미안하게시리.
그런데 진명의 경지가 조금 애매하다.
의기에 이르렀으나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형과 식에서 벗어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의기에 올라야 정상인데 반대로 되어 버린 것으로 보였다.
의기에 먼저 올라 버림으로써 형과 식이 고착화된 것이다.
그러니 경지만 의기이지, 실력은 탄기의 무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마 발전은 거기서 끝.
강의 경지?
제대로 된 의기의 실력을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대로라면 아마 지금의 수준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 다른 무인들이 모두 그러한 것처럼.
뭐, 한편으론 대단하다.
저렇게 거꾸로 발전하는 놈도 달리 없을 테니까.
더욱이 무당에 남겨져 있는 그 망할 태극혜검의 구결을 통해서 저 정도에 이르렀다면 청상에 근접하는 천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
아주 큰 문제다.
청상이 진보가 빠른 것은 천재성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진무의 도움이 더 컸다.
진무는 그가 벽에 도달할 때마다 문을 만들어 주었고,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평탄한 길을 알려 주었다.
처음 가는 길에 지표마저 명확하니 쉽게 갈 수밖에.
하지만 진명은 다르다.
잘못 든 길을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완전히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와야 한다.
더욱이 지금 가는 길이 옳다고 확고히 믿고 있으니 고집마저 생겼을 것이다.
흠, 저걸 고치자면 코에다가 뚜레를 끼워 강제로 잡아당겨 주어야 하는데…….
진무는 잠시 고민했다.
이 새끼를 어찌할까?
자신이 무당을 떠나 버린 이상 강의 경지에 오르는 무인 하나쯤 있어 주면 좋을 텐데.
“어이.”
“……뭐요?”
“내게 구함을 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
“…….”
잠시 말이 없던 진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은인의 도움에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
어? 이걸 기대한 게 아닌데?
갑자기 인사를 해 오는 통에 되레 진무가 당황해 버렸다.
“비록 정사로 나누어져 서로에게 칼을 세우고 있으나 은원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다시 한번 은공께 감사드리오.”
“……은공이라. 의외로군. 사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물론. 하나 구분일 뿐, 그것이 본질이라 여기지는 않소.”
“…….”
진명의 말에 진무가 눈을 크게 뜬다.
이, 이런 기특한 녀석을 봤나.
“귀하는 나를 구했으며 무도한 이들로부터 힘없는 민초를 구하였소. 목적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사파라는 이름이 그 의기를 가리지는 못할 것이오.”
그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무의 입가에 더없이 진한 미소가 떠오른다.
쓸 만하다.
잘만 바로잡으면 다음 대의 무당 장문인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청상?
아직은 이대제자니 가야 할 길이 멀다. 더욱이 그의 성향으로 봤을 때, 많은 것을 포용해야 하는 장문인보다는 진무의 뒤를 이어 무당지검으로서의 길을 걷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진궁은 고집스럽고, 진소는 유약하다. 진허는 사람만 좋은 멍청이고 진혜 그 새끼는…… 어휴.
진명, 이놈이 딱이다.
씌워진 굴레를 보지 않고 눈앞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놈이다.
요 새끼……. 좋아, 도움을 주지.
오랜만에 ‘강제 은혜’를 입혀서 무당 장문인이 되는 길을 열어 주리라.
“무당엔 안 돌아갈 생각인가?”
진무가 넌지시 묻자 진명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자신이 직접 무당이라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그걸 어찌?”
“뭘? 그대가 무당인 거?”
“…….”
“태극혜검을 사용하면서 어찌 알았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
순간 진명의 눈동자에 강한 파문이 인다. 태극혜검을 알아본다고?
“놀랄 것 없어. 우리쯤 되면 다 아니까.”
“…….”
우리쯤?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 놀랐나?”
“…….”
이젠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인가? 진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당 일대제자 중 맏이 진명. 무당칠자의 우두머리. 맞지?”
진무의 말에 진명의 눈은 점점 더 크게 뜨였다.
“에헤이, 놀랄 것 없다니까 그러네.”
“당신은 대체?”
벌써 같은 질문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들었잖아, 천주라고.”
“정말로 사패천주란 말이오?”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천주가 될 사람이지. 믿든 말든 알 바는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진명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자네가 익히고 있는 태극혜검 말이야. 애초에 길을 잘못 들었어.”
“……!”
“너무 집착한단 말이야.”
“그게 무슨?”
이건 또 뭔 소리란 말인가?
그가 태극혜검의 비급이라도 보았단 말일까?
“……그대가 태극혜검을 어찌 안다고?”
“첫 구절이 ‘일검이 만변하다.’였나?”
“……!”
진명은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가 그것을 어찌 안단 말인가? 설마 비급을 보았단 말인가? 무당의 진산기보를? 대체 어떻게?
“본 건 아니야.”
거짓말이다.
욕심 많은 스승이 그 수많은 비급의 필사본을 죄 오룡궁의 서가에 꽂아 두었으니 못 봤을 리 없다.
하지만 봤다고 말했다간 당장에 검이 날라올 게 뻔하다.
태극혜검.
누대를 거쳐 오면서 보태지고 보태진 심득의 집합체.
기본 초식을 지나고 나면 상급 초식이 나온다. 거기서부터가 문제다.
망할 놈들이 구결을 풀어야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제 놈들의 심득을 어렵게도 남겨 놓다니.
진명은 그게 초식이라고 믿고 있을 터였고, 그 때문에 개고생을 해 가며 익혔을 것이 틀림없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쯤 되면 안 봐도 뻔하거든. 어때, 들어 볼 생각 있어? 원한다면 그대가 막혀 있는 벽에 흠집 하나 정도 내 줄 수도 있는데.”
“…….”
적당히 거짓을 섞은 진무의 말에 진명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비급을 보지 않고도 태극혜검의 첫 구절을 유추하다니,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나 진무는 이미 절대를 걷고 있는 자들과 같은 경지. 본시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으니 보지 않고도 안다는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찌 가르침을 달라 하겠는가?
그가 정사의 경계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 사패천주라 주장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어찌하여 이리도 탐욕이 솟구친단 말인가?
혼란하고 복잡한 그의 마음과는 달리 눈빛이 더더욱 초롱초롱해지자 진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 볼 마음이 있나 보네.”
“…….”
들어 볼 마음? 이미 마른침이 쉴 새 없이 넘어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데?
“태극혜검을 익히려면 지금까지 네가 초식이라 믿었던 것을 전부 잊어야 해. 그건 그냥 심득이거든.”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군. 누군가 꽃을 표현해서 적었다고 생각해 봐.”
“…….”
“이런저런 감상이 많겠지? 사람들은 그 감상을 가지고 꽃이라는 놈을 정형화해 버리고 말 거고.”
“……아!”
“그래서는 안 돼. 남들의 생각이 아니라 내가 본 느낌만 생각해. 태극혜검도 마찬가지야. 세월이 지나면서 덧붙여진 수많은 이의 심득을 지워 내면 그 실체가 제대로 보일 거야.”
순간 진명은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것만 같았다.
“그런…….”
“태극(太極)은 모든 무당 무공의 요체야.”
“…….”
“거기에 들어간 혜(慧) 자는 마음 심(心)에 빗자루 혜(彗)를 얹어 놓은 거지.”
“마음을 쓸어 낸다……. 깨달음을 들어내는 것?”
“이해가 빠르네.”
“…….”
태극은 무당 무공의 핵심. 무당의 검공 또한 모두 그 시초를 태극에 두고 나누어졌다.
즉, 무당의 모든 검공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 내고 핵심만을 취한다.
그것이 태극혜검이 가진 요체.
달리 말해 무공 검공이 가진 모든 핵심이 집대성된 것이 바로 태극혜검이라는 소리였다.
진무와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던 진명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
그저 단초만 제시했는데 벌써 알아들었다.
망할 무당 놈들은 일부러 천재만 뽑아서 가르치는 건가?
진무가 속으로 웃으며 투덜거리는 사이 진명은 현실과 무아의 경계를 넘어 깨달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당의 모든 검공의 구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태극혜검의 초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다.
“우웩!”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던 진명이 갑자기 검은 핏물을 울컥 토해 내었다.
이런 상황을 이미 청상이 현기를 깨달을 때 이미 겪은 바 있었기에 진무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핏물을 피했다.
젠장, 어째서 도사 놈들은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저 지랄들인지.
하마터면 옷에 또 묻을 뻔했다. 얼마나 비싼 옷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진명이 맑아진 표정으로 좌정을 하고 앉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다 진무가 피식 웃었다.
“팔자에도 없는 호법 노릇을 또 하게 될 줄이야.”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명의 참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황신이 술병 하나를 들고 진무에게 다가왔다.
“천주님. 대충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래. 뒷정리 잘하고 돌아가라고 해.”
“예.”
황신을 돌려보낸 다음 진무는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윽고 진명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전과 달리 눈빛이 더없이 맑아져 있는 것을 보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선기의 기운이 진득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비로소 진정한 의기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깨달음도, 내력도.
천천히 가라앉힌 호흡과 함께 신광을 갈무리하고 일어난 진명이 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대충 얻기는 했나 보네.”
“……귀하의 도움을 잊지 않겠소.”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는다.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 무당도 잘 이끌고 이 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죽어서도 잊지 말고.
“도움은 무슨. 그냥 말 몇 마디 해 준 걸 가지고. 어쨌든 이만 헤어지자고. 나도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진무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진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큰 깨달음을 주고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이보시오.”
“뭐?”
“어째서?”
“…….”
진무는 진명을 가만히 바라봤다.
뭔가 답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 혁련무강의 전인이야.”
“……!”
“뭐, 일단은 비밀이긴 한데. 알려져도 상관은 없고.”
순간적으로 진명의 눈에 불길이 스친다. 사문의 원수가 남긴 제자가 아닌가?
“에이, 너무 살벌해지지 말라고. 난, 덤비면 참는 성격이 아니거든.”
웃음기 섞인 너스레에 진명은 차마 검을 뽑지 못했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알아 둬. 혁련무강 그 양반……. 그…… 무당에…….”
하지 못했던 말.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말을 진무가 중얼거리듯이 내뱉는다.
“미안했다고.”
“예?”
“응?”
진명이 빤히 쳐다보자 진무가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에 홱 고개를 돌린다.
“못 들었으면 됐어.”
“……?”
진무는 그 말을 끝으로 떠나 버렸고, 진명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뭐라고 했던 거지? 무당에 미안하다…… 뭐 그런?
잘못 들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