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천주님.”
긴 침묵 끝에 소약벽과 황신이 진무를 향해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보다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진무가 손사래를 치고는 환영진을 가리켰다.
하심곡에 쳐 둔 삼천변회의 진법이 수십 개의 변화를 마구잡이로 뒤섞으며 폭주하고 있었다.
변화가 아닌 붕괴의 조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대부분의 진법은 외부의 힘에는 강력해도 내부의 힘에는 한없이 약해진다.
진무가 광도를 상대하면서 강기를 미친 듯이 뿌려 하심곡의 절벽 지형 자체를 바꾸어 놓았으니 진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진이 곧 무너지겠네요.”
“흠, 그럼 대비를 해야지. 들어오기 전에 살펴보니 제법 되던데.”
“저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좋아, 그럼 나머지도 정리해 볼까?”
진무가 다시 나서려 하자 소약벽이 공손하게 그를 불러세웠다.
“천주님.”
“……응?”
“살막에 맡겨 주십시오.”
“왜?”
“살막을 노리고 온 놈들입니다. 앞선 놈을 천주님께서 막아 주시기는 했으나 끝까지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요. 저들에게 살막을 노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해 주어야 하고요.”
“…….”
노안에 잔잔히 어린 미소에 진무가 묻는다.
“이제야 소약벽 같네. 그런데 괜찮겠어?”
“호호, 안 그래도 근자에 비만 오면 무릎이 쑤시긴 합니다.”
소약벽의 앓는 소리에 진무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를 아는 이라면 모두가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마음대로 해. 무리는 하지 말고.”
“예.”
소약벽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소약벽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진무에게 보였던 공손함이 사라지고,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매섭게 뜬 눈이 살막에 터를 잡은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가슴이 모든 것을 포용하듯 펼쳐지자 그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두 발로 대지를 짓밟고 우뚝 선 그녀는 살막의 지배자였고, 중원 살수들의 수좌였으며 절대의 경지를 걷는 사패천의 무인이었다.
“살막은 듣거라!”
“……!”
짧게 외친 한마디가 하심곡의 전역을 고요하게 울리며 메아리를 만들어 내자 살막의 무인들이 결연한 눈으로 비수를 힘껏 움켜쥔다.
“감히 우리의 거처를 노린 자들이 밖에 있구나. 어찌해야 하는가!”
절벽에 닿아 증폭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꽂히듯 파고든다.
“충성을 맹세했던 주인께 적을 앞두고 물러나려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 죄를 갚을 길이 없으니 또 어찌해야 하는가!”
“…….”
“밤의 주인을 자처하며 어둠의 시간을 호령했던 우리 살막이다. 이제 진정한 지배자를 만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것인즉, 어찌해야 하는가!”
호령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살막의 무인들이 매서운 살기를 머금고 당장이라도 적을 향해 뛰어갈 듯 거친 기세를 품는다.
* * *
“말 잘하지?”
한쪽으로 물러난 진무가 묻자 순식간에 분위기에 취해 버린 황신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언뜻 들으면 지나치게 비장한 말이지만, 지금의 상황에는 썩 어울렸다. 그 몇 마디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으니까.
살육의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사의 수나 뛰어난 계책이 아니다. 바로 개개인의 의지가 모여 발현되는 군기(軍氣).
의지를 잃지 않으면 승패의 결과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법이었다.
“저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
황신은 진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턱을 괴고 앉아 소약벽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무의 말이 이어진다.
“수하들의 목숨에 대한 무거움을 아는 자만이, 타인의 삶을 짊어져 본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특유의 기세야. 언젠간 너도 알게 되겠지.”
진무가 빙긋이 웃는다.
“소약벽을 잘 봐 둬. 그녀의 칼은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벼운데 무겁다?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닌가?
“보면 알 거야.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네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진무가 입을 다물었다.
* * *
“언제나 그랬듯 우리 살막의 칼은 이유 없는 죽음을 만들지 않았다.”
“…….”
“그러나 지금 저들이 우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
소약벽의 말에 감화된 살막의 무인들이 환영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선다.
열 명의 대살주가 좌우로 나란히 자리하고, 살막의 살수들이 그 뒤에 열을 지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하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하면 물러나 목숨을 보전해라.”
소약벽이 말을 끝맺고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매로 전방을 노려본다.
그녀를 따라 살막의 무인들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자세를 낮춘다.
쿠우우…….
환영진의 변화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고, 어렴풋이 적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이 열린다! 살막이여, 적을 멸하라!”
파앙!
명을 내린 소약벽이 제일 먼저 적들을 향해 뛰었고, 살막의 무인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부채꼴처럼 산개했다.
진이 풀리는 상황에 대비를 하고 있던 것은 마군과 비마대도 마찬가지였다.
“살막을 공격……!”
하지만 진이 열림과 동시에 살막이 먼저 그들을 습격했다.
“크악!”
“으악!”
곳곳에서 비마대 무인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마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다. 더욱이 어찌하여 광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평소 싫어하는 놈이라곤 해도 그 실력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진법을 뚫고 들어가느라 내력을 소모했다고 해도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살막주밖에 없으리라 자신했다.
그리고 그가 들어간 뒤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진법이 무너질 조짐을 보였을 때, 필시 광도가 축을 부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눈앞에서 살막주와 싸우고 있거나 살막의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더욱이 진의 내부에 죽은 이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살막의 공격에 비마들이 쉴 새 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젠장, 당황하지 마라! 기습이라고는 하나 놈들의 수가 적다! 차분히……!”
마군이 독려하듯 외치는 와중에 섬뜩함을 느끼고 재빨리 옆으로 장력을 뻗어 내었다.
스걱!
“큿!”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격이 상처를 만든다.
“네놈에게 주변을 걱정할 틈이 있겠느냐?”
“……?”
스산한 목소리의 주인은 싸늘한 기세를 품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파.
“사, 살막주?”
“오냐.”
“어떻게?”
멀쩡하다니? 어째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설마 그 광도가 죽었다고?
“먼저 온 놈은 갈가리 찢어 하심곡 이곳저곳에 뿌려 놓았느니라. 이젠 네놈 차례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수가 마군의 목을 노려 왔다.
까아앙!
급히 강기를 두른 손으로 쳐 내었지만 튕기는 느낌이 없다.
그리고 곧이어 이어지는 공격이 그의 복부를 향해 날아왔다.
살막주 야화 소약벽.
궁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낙점한 그녀에 대한 조사는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사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다가오는 순간 숨어 버리는 공격, 막음과 동시에 사각에서 파고드는 또 다른 공격이 마치 한 동작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 한 수 한 수가 단번에 적을 죽일 정도의 극초.
허초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일격필살의 수법이었다.
“제기랄!”
마군은 재빨리 뒤로 몸을 물리고는 단전의 기운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며 사방으로 기운을 발출했다.
촤아악!
마군의 공격을 피해 훌쩍 물러난 소약벽이 가만히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깊게 베인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마군의 장력, 둔탁하기는 했으나 내부에 내상을 입히는 중수법이 아니었다. 날카로움을 머금은 장력이라니.
“네놈 제법 희한한 장법을 쓰는구나?”
“왜? 은신을 못 하게 되니 겁이 나느냐?”
“겁? 글쎄…….”
자신감이 넘치는 마군의 모습에 소약벽이 상처에서 흐르는 피 따위는 지혈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뒤를 곁눈질하곤 웃는다.
“주인이 있어 살막이 어느 때보다 안전할 것인데 이 늙은 몸이 죽는 게 무에 그리 겁나겠느냐?”
“뭐?”
“하나 네깟 놈 하나로 그분께 수고를 끼칠 순 없는 일이지.”
마군이 역으로 비수를 힘껏 움켜쥐고 자세를 취하는 소약벽을 비웃었다.
“미쳤군. 살수 주제에 기습도 아니고 정면 승부를 해 보겠다고? 이 나와?”
자신이 모든 기운을 발현한 이상 은신술에 기인한 살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살수의 무공은 정면 승부에 취약하다. 그것은 아무리 소약벽이라 해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안 될 것 같으냐?”
“…….”
“너는 살막에 대해, 아니 나 소약벽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구나. 고작 나의 접근을 막는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다니.”
“뭐?”
“사람들은 나를 야화(夜花)라 부른다. 밤에 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이 밤이며 그곳에 어김없이 피처럼 붉은 꽃이 피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것이다.”
마군의 의문에 답하듯이 소약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년, 오냐! 오너라. 중원 살수의 조종이라는 네년의 이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내 알게 해 주겠다!”
양손에 강기를 덧씌운 마군이 마주해 나아가는 순간, 앞으로 다가오던 소약벽이 미소와 함께 사라진다.
“……!”
분명 눈앞에 있었는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것도 모자라 기운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어, 어떻게?
마군이 부릅뜬 눈으로 소약벽의 기척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목 뒤쪽에 털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함이 느껴진다.
파앙!
급히 목을 꺾어 피한 마군이 허공을 향해 장력을 뿌렸다.
따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소약벽의 기척이 다시 사라지고,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이익!”
온몸의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소약벽의 위치를 찾는 순간, 그의 기감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기척이 감지된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종내에는 소약벽의 잔상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사방을 가득히 채워 놓는다.
살막의 비기, 환영미리보.
그리고 그녀를 사패오왕의 자리에 올려둔 기예, 분영살법(分影殺法)이 펼쳐졌다.
퓩! 퓨퓩!
미친 듯이 장력을 후려쳐 환영을 지워 냈음에도 어느새 다가온 그녀의 송곳 같은 공격이 마군의 몸을 꿰뚫는다.
하지만 소약벽이라고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환영 역시 그녀의 실체가 만들어 낸 모습의 하나. 장력이 환영을 하나씩 지워 버릴 때마다 상처를 입어야 했고, 장력이 머금은 강기에 내상을 입어 핏물이 연신 목구멍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올라오는 피를 삼키며 억척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마군을 공격했다.
자신이 맡은 일은 반드시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살막의 지존으로서 가지는 자존심이며, 자신의 주인인 진무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마군, 적이지만 강한 자다.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쉬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와 마군의 생각은 달랐다.
“망할…….”
소약벽에 대한 조사는 잘못되었다.
정면 승부에서도 그녀는 강했다. 아니 나머지 사패오왕보다 더욱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상처가 늘어 갈수록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일궁의 주역으로서 무림을 전복하고 궁의 세상을 함께 이끌어 가야 할 자신이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소약벽은 치열했고 마군은 주저했다. 비슷한 경지에 있는 둘의 생각 차이가 결국 틈을 만들었고, 소약벽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뻐억!
“끄어억!”
공격을 허용해 버린 마군의 몸이 낫 모양으로 꺾여 바닥에 처박힌다.
내장이 뒤틀리고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 동시에 그의 몸을 수차례 찔러 온 공격이 벌집처럼 구멍을 내고, 전신에서 피가 솟구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슈욱! 푸학!
“끄억…….”
목덜미를 찌르고 빠르게 후퇴한 비수에 피가 뿜어진다.
마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네……년…….”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마군이 뒤로 쓰러졌다.
그의 시체를 중심으로 뿌려진 피가 꽃잎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아, 하아…….”
지쳐 버린 소약벽은 거친 숨을 토해 내고서야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