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67
267화
황신은 둘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중반으로 치달았을 때는 아예 주먹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먹 쥔 손안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녀에 대한 진무의 평가는 완벽했다. 가볍지만 무거움을 담은 칼.
소약벽의 움직임은 정말로 가벼웠다.
또한, 그녀의 은신술은 놀라움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상대의 기운 자체에 숨어들다니.
기회를 잡았을 때는 주저하지 않았다. 가볍고 부드럽게 흐르던 비수는 일순간 엄청난 무거움을 담고, 한 점에 모든 힘을 집중한 일격 필살의 공격을 감행한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환영을 만들어 내면서도 칼날은 조금도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야화 소약벽.
살인의 기예만큼은 하오문주 명세찬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무인.
황신은 그녀가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살수로서, 은신자로서의 묘한 호승심을 느꼈다.
“끝났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진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걷는다.
아직도 거친 숨을 완전히 고르지 못한 채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소약벽에게 다가간 진무가 피식 웃는다.
“꽤 다쳤구만.”
걱정은 담았으나 실망하지 않은 목소리.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입니다.”
소약벽이 그제야 힘겹게 허리를 세우고 송구한 표정을 짓는다.
“늙으면 다 그렇지 뭐.”
“…….”
기분 상할 말을 잘도 내뱉는 진무의 모습에 황신이 얼굴을 찌푸린다.
황신은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 진무가 몇 번이나 움찔거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뛰어들었다면 살막주의 안전은 지켰을 것이나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을 터였다.
그걸 알기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당당히 수하들 앞에 설 수 있는 것처럼, 수하들도 자신에게 당당해질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을 해 놓고는 말을 저따위로 하다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진무의 등을 째려보는 황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진무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했다. 야화.”
“…….”
멍하니 바라보던 소약벽의 지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예, 천주님.”
* * *
섬서의 북쪽에 있는 대향산 아래에 위치한 작은 도시, 동천(銅川)
사파의 세력권에 속해 있는 유서 깊은 무가, 화원방은 얼마 전부터 한 떼의 인물들에게 점거되어 있었다.
감숙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넓혀 가고 있는 사패천의 반란 세력이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환하게 불이 밝혀진 화원방의 대전각.
커다란 쇠몽둥이를 등 어림에 멘 무인, 하오문 은위단의 조장 대궁이 한 걸음에 수 척의 거리를 뛰어 문을 벌컥 열었다.
“총사!”
“…….”
열린 문의 안쪽에는 오십 줄에 든 세 명의 사내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보며 심각한 분위기로 토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쇠몽둥이를 멘 사내의 방문을 샐쭉하게 뜬 눈으로 째려보는 학사 차림의 사내, 명세찬.
“야!”
“……예?”
“호칭 정리 똑바로 안 하냐?”
“…….”
명세찬의 말에 대궁이 찔끔하며 목을 움츠린다.
“……하하, 그, 급한 전갈이 와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다시 불러!”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명세찬의 호통에 옆에서 흑선을 들고 있던 적생이 난감한 표정으로 만류하고 나선다.
“문주님, 호칭이야 어찌 부르든 무슨 대수겠습니까?”
“어허! 또!”
“…….”
“적 총사님,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자고로 제대로 된 조직은 위계가 살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기본적인 위계질서조차 지키지 않으면 오합지졸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명세찬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하자 또 옆에 있던 거한, 천우명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세찬, 아니 하오문주의 말이 맞습니다. 천주님께서 직접 임명하셨고, 대리로 세우신 총사입니다. 존대는 당연한 일이지요.”
“……하하, 그렇게까지.”
적생이 어색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흑선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제 저희에게도 하대를 하십시오. 이제 적 총사님은 작은 낭인대를 이끌던 몸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패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 하하.”
적생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도무지 저들의 충성심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천주가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약관에 불과한 청년을 어찌 저리도 믿고 따른단 말인가?
얼마 전 하오문주가 찾아와서 대뜸 무릎을 꿇고 절을 해 올 때는 또 얼마나 놀랐던지.
“야, 대궁!”
“……예?”
“뭐 하냐? 적 총사님 기다리시는 거 안 보여?”
“……아, 죄송합니다. 총사님! 두 가지 급한 전갈이 있어 회의 중이신 것을 알면서도 급히 찾아뵈었습니다.”
대궁이 보란 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에 전서구를 통해 받은 서신을 받쳐 올린다.
고개까지 숙인 그 모습에 명세찬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신을 집어 적생에게 공손하게 올린다.
“여기 있습니다.”
“…….”
어색하다. 어색해 미칠 것 같다.
한때는 눈은커녕 멀리서나마 모습을 본 적도, 볼 일도 없었던 사패오왕의 두 사람이 자신에게 이리도 예를 갖추다니.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적생이 전서구를 펼쳐 읽었다.
“……!”
순간 그의 눈동자에 놀람이 어린다.
“왜요? 무슨 일입니까?”
“……?”
그의 반응에 명세찬과 천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막이 궁의 인물들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하는군요.”
“궁이라면 그 궁을 말하는 것이오?”
“예.”
“음…….”
이미 진무와 함께 그들을 경험해 보았던 명세찬이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그들이 어째서 살막을 공격했을까요?”
천우명의 질문에 적생이 의자에 앉아 몸을 깊이 묻고 턱 언저리를 쓸며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에 명세찬이 빙그레 웃는다.
천주께서 총사 하나는 기막히게 선택한 모양이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닭 한 마리 잡을 수도 없을 만큼 약해 보이던 자가 무언가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순식간에 냉철한 분위기를 띤다.
“대궁, 그만 나가 보거라.”
“예.”
혹여 적생의 고민에 방해가 될까 명세찬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궁을 내보냈다.
그러기를 한참, 천천히 눈을 뜬 적생이 맑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궁이라는 자들이 사패천 본성과 우리의 힘을 비등하게 맞춰 볼 생각인가 봅니다.”
“힘……이라고요?”
“예.”
적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중원 삼패에 고루 침투해 암약한다는 궁의 존재에 대해서는 명세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궁의 세력 중 일부가 정무맹에서 축출된 바 있으며, 일부는 가짜 구야자 사건을 일으켜 마교를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제껏 사패천 내에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만.”
“말해 보십시오.”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궁이라는 자들의 목적은 제패가 아닌 듯합니다.”
“하면?”
“하오문이 파악해 온 정무맹의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예상되는 그들의 목적은 분란 조장입니다.”
“분란 조장이라, 그렇다면 자멸을 노린다는 뜻입니까?”
“예. 분란을 조장해 중원 무림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리 생각했을 때, 궁에게 우리 반란 세력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상대일 테고요.”
“음…….”
그 말을 들은 명세찬이 고개를 끄덕인다.
“총사님.”
한데 잠자코 듣고 있던 천우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적생을 쳐다본다.
“예?”
“반란 세력이라니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예?”
“우리가 진(眞)입니다.”
“…….”
“유월청이 진이 아닙니다. 천주님께서 계신 곳이 응당 사패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이지요. 반란 세력이라니, 그런 표현은 삼가십시오.”
“……아, 예. 죄송합니다.”
적생이 머쓱한 얼굴로 사과하고 나서야 천우명의 표정이 풀렸고, 명세찬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 단주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지요. 그래서 총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 어쨌든, 저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반…… 아니, 우리 진(眞) 사패천의 세력에 사패오왕 중 셋이 모여 있음을 알 것입니다.”
“해서 살막주가 합류해서는 안 된다?”
“예. 살막주까지 합류하게 되면 유월청을 제외한 사패오왕이 전부 모이게 됩니다. 유월청은 이미 신임을 잃었으니 사파의 여론이 우리 쪽으로 돌아서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리되면 힘의 균형이 깨어지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분란을 조장하기는 어렵게 되지요.”
“음…… 그렇군요. 만약 저들이 지금의 사패천을 손아귀에 넣은 상태라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만약이 아닐 겁니다.”
“……예? 그건 무슨?”
“사패천은 이미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지금까지 우리는 꽤 은밀하게 세력을 확보해 왔습니다. 더욱이 하오문이 합류한 시점부터는 저들의 눈과 귀까지 속이고 있지요.”
옳다. 진무의 명령으로 하오문이 합류한 시점부터 명세찬은 반란군의 정보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비단 사패천 본성뿐 아니라 정무맹 측 개방의 이목까지 속이기 위해 대단위로 정보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 덕에 천웅방이 확보한 사패천의 세력은 전체의 삼 할.
일견 순조롭지만 한편으로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하오문에서 본성에 흘러드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지만 세력을 삼 할이나 빼앗겼음에도 본성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
“문제는 너무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천주님께서 섬서 북부에 있는 야금당과 산적, 수적들의 거처를 모조리 부숴 놓고 지나갔는데도 말이죠.”
그 점은 명세찬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이다.
비밀스럽게 움직였을 리도 없다. 이미 하오문의 모든 조직이 사패천의 본성과 아직 확보되지 않은 세력들을 살피고 있으니까.
“그럼 궁에서 사패천 본성의 주요 요직을 차지해 유월청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겁니까?”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음…….”
“아마 저들의 노림수는 양패구상일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런 게 날아왔군요.”
적생이 대궁이 가져온 또 한 장의 전서를 펼쳤다.
“산서상회가 접견을 요청해 왔습니다.”
“산서상회라면?”
“예. 지금의 사패천에 막대한 자금을 대고 있는 곳입니다. 그 금액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연관이 있다 보십니까?”
“역시나 추측입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정무맹 쪽 궁에서 전장을 이용한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상계를 거느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요.”
“……?”
“또한, 사패천은 그간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야금당, 산적, 수적, 흑사방의 네 곳이 아무리 많은 돈을 상납한다 해도 이미 구멍이 뚫려 버린 본성의 예산을 메우기는 턱없이 모자랄 것입니다. 한데 고작 상회 하나가 그 나머지를 전부 책임진다고 하니, 믿기 어렵지 않습니까?”
“자금의 출처가 의심스럽다?”
“예. 더욱이 이런 판국에 사패천의 본성과 척을 지고 있는 우리와 만나기를 원한다면 더욱이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일이지요.”
적생의 말에 명세찬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산서상회.
이상하게도 하오문의 정보력이 닿지 않는다. 벌써 몇 차례 첩자를 보냈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조차 오지 않는 실정이었다.
“산서상회, 거기 예전에 내가 교육 좀 했던 곳인데?”
“……?”
“……!”
멀거니 앉아 있던 천우명이 중얼거리자 고심에 빠져 있던 적생과 명세찬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린다.
정말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가?
“거 새끼들, 거래 좀 트자면서 생짜를 부리길래 철검단 애들 데리고 가서 싸그리 목을 베어 버렸거든.”
“혹! 그들에 대해 아십니까?”
적생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묻자 천우명이 멀뚱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알지, 산서상회. 산서 지역 상단 연합체. 상단 호위대라는 놈들이 있는데 그저 그런 실력이더군.”
“그리고!”
“또요? 이상한 점은요?”
적생과 명세찬이 동시에 소리치자 천우명이 눈을 끔벅거린다.
“뭐? 더 알아야 하는 거야?”
“…….”
“…….”
적생은 하마터면 ‘이런 쓸모없는!’이라고 내뱉을 뻔했다. 물론 그랬다가는 모가지가 남아나질 않겠지만.
고개를 돌려 명세찬을 보니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결국 천우명을 배제한 적생과 명세찬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심각하게 토의를 이어 갔다.
“일단 좋은 기회군요. 그들이 접견을 요청해 왔다면 이참에 안쪽으로 들어가 확인을 해 보면 될 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궁과 산서상회가 연관이 있다면 이는 작은 사안이 아니니 천주님께 보고를 먼저 하시지요. 일단은 제가 그쪽에 만나자고 연통을 넣겠습니다.”
“예.”
명세찬의 말에 적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잘되었습니다. 차라리 터트리시지요.”
“터트려요?”
“예. 그들이 우려한 것이 우리 쪽의 힘이 커지는 것이라면 아예 그리 믿게끔 소문을 내서 추이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흐음, 좋은 생각이오. 사패오왕이 이제 한자리에 모였다고 하면 저들로서도 어떤 움직임이든 보일 수밖에 없으니.”
“예.”
“그럼 제가 소문을 좀 내야겠군요.”
명세찬이 빙긋이 웃는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입니다. 남하했던 원 방주님께서 사천 북부, 귀주, 광서를 지나 북진을 시작했으니 이대로 곧장 사패천의 본성으로 이동하라 연통을 보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는 섬서가 안정화되는 즉시 산서를 통해 남하합니다. 적진으로 들어온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문주님께서는 고생스러우시더라도…….”
“걱정 마시오. 적 총사. 내 불철주야로 노력하리다.”
“감사합니다.”
“핫핫, 감사는 되레 제가 드려야지요.”
적생과 명세찬이 서로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사패오왕 중 넷이 새로운 몸으로 돌아온 천주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정사마의 정상에 우뚝 서려는 그 원대한 꿈이 이제 막 태동하고 있었다.
“……저는요?”
“…….”
“…….”
따라 웃으며 열의를 보이는 천우명의 물음에 순간 침묵이 흐른다.
“뭘 하면 됩니까?”
“단주님께선…… 싸우셔야지요.”
“선두에서 계속……. 쭉,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이심전심(以心傳心).
적생과 명세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번갈아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