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진무 일행이 머문 지 이틀째.
하심곡의 전투 흔적은 차근차근 지워지고 있었고, 살막은 이동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진무가 그녀에게 천웅방의 본대와 합류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사패천 본성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이전의 전투가 세력 확보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살막이 합류한 지금부터는 대규모의 교착 전투로 변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 하오문은 모든 전투에서 정보를 조달하고 교란하는 임무를 맡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본격적인 전투로 돌입하면 하오문에게는 전령의 역할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뒤부터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살육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투입되는 것이 진무나 천우명, 혹은 철검단과 같은 소규모의 강력한 무인대다.
적의 방어 진형을 부수고 나머지 무인들이 진입할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투는 강력한 힘을 보유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살막이 전쟁의 승패를 뒤집는 역할을 하게 된다.
적진 깊숙이 숨어들어 명령권자, 즉 통솔력을 가진 무인들을 빠르게 섬멸하는 것이다.
수뇌를 잃게 되면 적은 쉬이 지리멸렬해지고 빠르게 붕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무가 오랫동안 적은 수로 큰 수를 이겨 온 전형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여기에 적생의 계략이 더해질 것이니 그 효과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무는 소약벽을 적생에게 보내려는 것이다.
어차피 하심곡이 무너진 이상 머물 곳도 없을 터였고.
“천주님.”
황신을 수련시키며 쉬고 있던 진무에게 소약벽이 전서와 함께 소동보를 데리고 다가왔다.
“총사로부터 온 전서입니다.”
“전서?”
“예. 명하신 대로 이곳의 상황도 알릴 겸, 합류할 위치도 파악할 겸 해서 전서구를 보냈더니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답신은 무슨. 그냥 알아서 하면 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무는 소약벽이 내민 전서구를 받아들었다.
“산서상회?”
내용을 읽은 진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어린다.
산서상회, 들어 본 이름이다.
사패천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었나? 그리고 야금당 놈들이 그들과 은밀히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지?
그런데 접견을 요청해 왔다고?
하여간에 상인 놈들, 약삭빠른 건 알아줘야 한다. 보나 마나 양다리를 걸쳐 볼 속셈인 거겠지.
상인들에게는 주인이 누가 되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저 소정의 돈을 상납하고 산적이나 수적들의 위협에서 자신들의 안전만 보장받으면 되니까.
오히려 정무맹 예하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더 이점이 많다.
오가는 곳마다 통행세며 공물을 바쳐야 하는 그들과는 달리 본성에 매년 일정량의 돈을 상납하면 되니까.
한 번에 큰돈이 나가긴 해도 종합적으로 봤을 때 훨씬 더 이득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궁과의 연관성을 의심한다고?”
진무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하긴, 전장마저 집어삼켰던 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하오문이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못할 만큼 방비가 뛰어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흐음.”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턱 언저리를 쓸어 내는 진무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감돈다.
동림전장 사건 당시 진무가 확보한 금이 사십 관에 달했다.
아직 추측뿐이지만 만약 산서상회가 궁의 세력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크크크.”
진무가 갑자기 기괴한 웃음을 흘리자 황신과 소약벽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놈들이 궁과 연관이 있다면 그건 상계와 무림의 문제에서 무림 세력끼리의 문제로 변한다. 관이 개입해도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산서상회를 싹 털어 버리면?
산서의 상권 전체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즉, 돈이 된다는 이야기다.
정사마의 세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산서를 시작으로 중원 상계까지 집어삼키면?
와, 말도 안 되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진인사대천명이라더니.
하늘이 이렇게나 성심성의껏 도와주려고 작정을 하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아암, 그렇고말고.
“큭큭큭.”
먼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진무의 웃음이 더욱더 기괴해진다. 이젠 갑자기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찟하기까지 했다.
“황신.”
“예?”
하체를 단련한답시고 돌을 매단 채 땀을 뻘뻘 흘리던 황신이 재빨리 대답했다.
“전서구를 보내. 공후가 호남성까지 도착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테니까, 산서상회에는 내가 직접 찾아가 보겠다고.”
진무의 말에 곁에서 듣고 있던 소약벽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설마 직접 가실 요량입니까?”
“그래. 멀지도 않잖아. 그리고 일단은 조사만 하는 건데 뭔 문제가 있겠어? 조사해 봐서 아니면 말고, 궁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모조리 조지는 거지.”
“그럼 지원 요청을 좀 할까요?”
“왜?”
“왜라니요? 총사가 궁이라는 자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었지 않습니까?”
소약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대담하게 살막을 노린 자들입니다. 만약 궁의 세력들과 연관이 있다면 천주님 혼자 가시기에는…….”
“…….”
이 사람이 뭘 모르네.
동림전장을 습격했을 때, 만약 정무맹과 연계하지 않았다면 전장을 통으로 먹을 수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사십 관으로는 안 끝났다.
하물며 이번엔 상계다.
그것도 산서 땅에 뿌리박은 상계를 모조리 씹어 먹는 것이다.
뭐, 그래. 언젠가는 사패천과 나눠 먹어야겠지. 근데 아직은 아니다.
어차피 세상 혼자 사는 거고, 피를 나눈 형제와도 재물을 나눌 수는 없다.
진무는 뭐든 일단 자신이 맛보고 나서 나눠 먹을지 혼자 먹을지를 결정하리라 생각했다.
“일단 조사만 할 건데 호들갑 떨 것 없지. 그냥 혼자 갔다 오면 될 일이야. 황신, 전서구를 작성해.”
“…….”
진무의 말에 황신이 샐쭉한 표정을 했다.
둘의 대화를 들어 보건대 천주가 가고자 하는 곳이 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황신은 섬서 미현에서의 전투를 잊지 않고 있었다.
둘이서 적의 수장에 떨거지 몇이랑 싸웠다가 하마터면 뒈질 뻔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한둘이 아니라 거대 세력이다.
그리고 한참 따라다녀 본 결과, 저 개천주의 성격에 그저 조사만 할 리가 없고, 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가만히 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앞뒤 구분 없이 일단 쥐어 패고 보겠지.
그러다 만약 지원도 없이 놈들에게 갇혀 버리면?
고강하기 짝이 없으신 개천주님께서는 개지랄 발광을 하시더라도 살겠지. 근데 힘없고 선량한 자신은? 따라왔다는 죄 하나로 툭 치면 꽥 하고 뒈지지 않을까?
묘비에 ‘천주랑 함께한 충성스러운 무인이었음.’ 정도의 글귀나 남겠지. 아니, 시체는 찾을 수 있을까?
망할 천주……. 절대로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뭐 해? 전서구 보내라니까? 얼른 출발하자고.”
“……예!”
씨발, 대체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리도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는가?
작게 꿍얼거리며 한쪽 구석으로 간 황신은 진무 몰래 전서의 끄트머리에 ‘매우 위험. 지원 요망.’이라고 적어 넣었다.
“바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전서구가 작성되는 동안 소약벽이 넌지시 물어 왔다.
“그래.”
“동행할까요?”
“그 몸으로?”
소약벽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조사만 할 거니까 굳이 따라올 필요 없어. 우명과 세찬이 섬서의 하원방이라는 곳에 있다니까 살막을 이끌고 가서 합류해.”
“…….”
잠시 생각하던 소약벽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무의 고집을 잘 알고 있다. 한번 거절한 이상 다시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군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적지 않았다. 함께 간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 일단은 회복이 먼저였다.
지원은…… 명세찬 등에게 따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명은 무슨.”
진무가 당장이라도 출발할 듯이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소약벽이 슬쩍 제 옆에 있던 소동보를 당겨 밀며 말했다.
“천주님.”
“응?”
“이 아이를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
진무가 소동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진무에게 소동보는 그저 생각 정리 빠른 싸가지 없는 애새끼에 불과했다. 앞선 행태를 봤을 때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뻔한데…….
다행히 미리 소약벽의 언질이 있었기에 이전처럼 학을 떼는 듯한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한껏 아니꼬운 표정을 할 뿐.
“……천주님, 연로하여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제 뒤를 이어 살막을 이끌어야 할 아이입니다. 천주님께서 곁에 두며 은총을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
진무가 이번엔 자신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약벽을 바라본다.
그녀의 나이 일흔.
사패오왕 중 자신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
그녀 역시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십 년 내외로 수명이 다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살막의 미래를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진무는 아끼고 아끼는 그녀의 청을 무시할 정도로 매정하지 못했다.
“쯧, 귀찮게시리…….”
진무가 눈을 찡그리고는 몸을 돌려 버렸다.
그 뒷모습에 소약벽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오른다.
진무의 성격상 떼려 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귀찮다며 투덜대고 말았다는 것은 곧 허락이나 다름없음을 알고 있었다.
“동보야.”
“……예.”
“천주님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성심을 다해 배우거라.”
“……휴, 알겠습니다. 소손,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소동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마뜩잖은 어조가 약간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소약벽은 마침내 큰 짐을 들어낸 것만 같은 후련함을 느꼈다.
지금이야 마음에 안 들겠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손주 놈은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선택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연이었는지…….
푸드득, 푸드득!
전서구가 세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 뒤 황신이 진무의 곁으로 다가왔다.
“황신이라 했더냐?”
“……예? 예에.”
소약벽의 관심에 황신이 어정쩡하게 대답을 했다.
“천주님을 호위하는 너의 모습이 매우 기특하더구나.”
“…….”
“내 미력하나마 네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소약벽이 자신의 품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며 묻는다.
“보아하니 나와 비슷하게 송곳을 무기로 쓰는 것 같던데…… 나에게 보여 주겠느냐?”
“…….”
황신이 군말 없이 소매 속에 감추었던 검은 송곳을 꺼내 보였다.
“묵색 송곳이라…… 송…… 어?”
순간 소약벽이 눈을 부릅뜨고는 빼앗듯이 황신의 송곳을 받아 들었다.
“허! 이런 대단한 물건이라니!”
“…….”
황신의 송곳을 살핀 소약벽이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는다.
“묵철의 윤기 하며…… 이렇듯 은밀히 예기를 감추어 놓다니. 기물이다, 기물이야.”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 탐욕이 잔뜩 떠올랐다.
그녀의 본래 의도는 자신의 손주에게 무흔삭을 주었듯, 어쩌면 하오문의 대들보가 될지도 모를 황신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무공은 진무가 이미 돌보고 있을 터이니 무흔삭과 한 쌍인 무영추(無影錐)를 선물하려 했건만, 황신의 송곳을 보는 순간 무영추가 볼품없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대체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하였단 말인가?”
“……시장에서…….”
하지만 황신의 말은 듣지 못한 듯 소약벽이 양손으로 송곳을 들고 감탄을 뱉어 낸다.
“끝을 뭉툭하게 하여 예리함을 감추고 평범한 손잡이로 비범함을 감추었으나 윤기 나는 묵빛이 은연중에 그 가치를 드러내니, 살수에게는 명검, 보도보다 더욱 가치 있는 물건이구나.”
“…….”
그렇게까지?
시장통에서 좋아 보이길래 개천주를 졸라서 산 거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더욱이 평가한 사람이 중원 살수의 정점에 있는 소약벽이 아닌가.
비수를 다시 건넨 소약벽이 황신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허허, 실로 너와 꼭 맞는 물건이로다.”
“…….”
좋은 건 알겠는데 이 노인네…… 뭔 개소리지? 자신을 언제 봤다고?
소약벽의 말에 황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악!
“아극!”
황신이 뒤통수를 때린 진무를 슬쩍 째려본다.
“이 자식이 어른이 칭찬을 하면 감사하다고 해야지 멀뚱하게 쳐다만 보기는.”
“…….”
칭찬이라고? 저게?
“천하의 살막주가 너를 인정하는 거라고. 고작 은위단의 떨거지 무인을 말이야.”
그런 건가?
뭔진 모르겠지만 황신은 소약벽을 향해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신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진무가 뒤이어 인사를 건넸다.
“자,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약벽.”
“예. 천주님.”
진무는 공손히 인사를 해 오는 소약벽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황신이 그 뒤를 따른다.
머뭇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소동보의 귓가에 갑자기 소약벽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소동보가 잠시 멈춘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개겨.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자주.] [……예?]이건 또 뭔 소리란 말인가?
따라다니라 하고는 무조건 개기라니?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그냥 그렇게만 알아들어. 무조건 개겨. 알겠어? 나머진 천주님께서 알아서 다 하실 게야.]“……?”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소동보는 눈을 끔벅거렸고, 소약벽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개김은 구타를 유발할 것이고 구타는 소동보를 발전시킬 테니까.
금쪽같은 손주가 맞는 것이, 아니 죽도록 맞을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것이 곧 살막의 미래이니 참을 수밖에…….
“어서 가거라! 뒤처질라!”
“예!”
그 말을 끝으로 소동보는 멀어진 진무 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