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74
274화
삭주의 서북쪽에 위치한 우옥현은 네 개의 진(鎭)급 마을과 여섯 개의 향(鄕)급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추가장은 그중 우심보(牛心堡)라는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학당이었으나 그 역사가 백 년도 넘게 이어진 유서 깊은 장원이었다.
당대의 추가장주는 추형도라는 인물로 학당의 훈장과 우심보의 향리직을 겸하고 있었지만, 우심보 자체가 별다른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인지라 훈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강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모습의 추형도를 더 좋아하는지 향리보다는 훈장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학창의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추형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추가장 내부의 정자에서 학동들을 훈육하고 있었다.
“왕자점문왈사하사(王子墊問曰士何事)하니, 맹자왈상지(孟子曰尙志)니라. 이것이 무슨 뜻이라 했더냐?”
추형도의 물음에 학동들이 먹이 받아먹는 새 새끼처럼 입을 벌린다.
“왕자 점이 묻길 선비는 무엇을 일삼아야 합니까, 하자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뜻을 높이 가져야 한다 하셨습니다.”
학동들의 대답에 추형도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데, 학동 중 하나가 묻는다.
“스승님, 높은 뜻이 뭡니까?”
“허허, 원 녀석.”
다음 수업부터 가르칠 내용이었지만 뭐 어떠랴? 추형도는 학동의 학구열이 기특하기만 했다.
“여기서 높은 뜻이란 인(仁)과 의(義)를 말한다.”
“인과 의가 뭔데요?”
호기심 많은 학동들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맹자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이 아니며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의가 아니라 하셨지.”
“그럼 살인과 도둑질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건가요?”
“하하! 사람의 도리가 어디 그것에만 있겠느냐? 다만 그 둘이 가장 중죄이니 금하라 하신 게지.”
학동의 말에 큰 웃음을 터트리며 답한 추형도의 시야에 멀리 시비와 함께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아가 들어왔다.
하나밖에 없는 딸, 올해로 아홉 살이 된 추가령.
늦게서야 간신히 본 자식인 데다 난산 끝에 어미마저 죽었으니 그 애틋함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오늘 저잣거리에 나가 놀잇감을 사 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잔뜩 뾰로통한 표정이며 퉁퉁 부은 볼을 보니 수업이 끝났음에도 문답으로 시간을 보낸 것에 뿔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자,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벌써 점심을 먹을 때가 다 되었구나.”
“예, 스승님!”
그가 서둘러 책을 접어 넣자 학동들이 우르르 정자를 빠져나가고, 추가령이 기다렸다는 듯 달음질해 다가왔다.
“아빠!”
“오냐, 그래.”
“한참 기다렸다고요!”
“……허헛, 그래?”
추형도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시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마도 일어나자마자 세안도 하지 않고 달려왔을 것이 분명하다. 하긴 아이의 인내심이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 일각이 한 세월 같을 것이니 투정이 이해가 될 만했다.
“하하, 아비가 많이 기다리게 했구나. 자, 서둘러 채비를 하자.”
“또요? 그냥 가요.”
“그냥? 밥도 안 먹고?”
“당과 사 먹으면 되잖아요.”
“…….”
추형도가 딸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당과로 식사를 때우자니?
하지만 그 동그란 눈에 조바심이 한가득한 것을 보니 쉽사리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채비랄 것이나 있겠는가. 어차피 우심보가 추가장의 앞마당이고, 사는 이들은 모두 가족이나 다름없음인데.
“원, 녀석도. 알았다. 가자, 가.”
“오늘도 사람들 만나느라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다. 알았어.”
고사리손으로 잡아끄는 힘에 추형도가 못 이기는 척 따라 일어났다.
“순화야.”
“예, 장주님.”
“서책 정리를 부탁하마.”
“어휴, 알겠어요.”
추가령의 시비가 가볍게 한숨 쉬며 웃는다.
“자, 그럼 우리 딸. 아빠랑 함께 나가 볼까?”
“예! 목말 태워 주세요. 목말!”
추가령이 신이 나서 졸라 댄다.
“아가씨! 장주님 체면이…….”
시비 순화가 눈치를 주자 추형도가 손을 들어 막고는 추가령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자, 어서 타거라.”
“네!”
“아유, 장주님. 이러다가 나중에 시집보내실 때는 어찌하시려고.”
“나 시집 안 갈 거거든!”
아직은 어리기만 한 딸이다. 버릇 나빠진다며 식솔들이 종종 우려했지만, 딸이 좋다면 그 무엇이든 못 해 줄까?
추형도의 목 위에 오른 추가령이 손가락을 눈 아래를 늘리며 순화를 향해 귀여운 혀를 쏙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추형도가 발걸음을 옮기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추가장의 호위 셋이 뒤를 따른다.
막 딸과 재잘거리며 장원을 나서려던 그때, 때아닌 비명이 내내 즐거웠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크악!”
“으악!”
연이어 터지는 비명.
“……?”
추형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우심보는 한가로운 마을이다.
그리 부유하지 않아 도적이 모습을 감춘 지도 오래되었고, 추형도의 선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큰 사건이라 불릴 만한 건 술에 취한 이들이 주먹다짐하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비명이라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추형도가 추가령을 강제로 떼어 내려놓자 호위 중 하나가 눈치 빠르게 장원 밖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드득, 콰앙!
굳건하지는 않아도 제법 두께를 가지고 있던 문의 빗장이 부서지며 상황을 알아보러 나갔던 호위 무인, 주동이 튕겨져 들어왔다.
“끄윽, 끄으윽…….”
“……주, 주동?”
“……피하……십…….”
꺽꺽거리며 피를 흘리던 주동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절명했다.
처참히 잘려 나간 그의 복부에서 창자와 함께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하아, 하아…….”
“…….”
상황을 판단할 여유도 주지 않고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열린 대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여인이다.
피가 줄줄 흐르는 칼을 늘어뜨리고 지친 듯 거칠게 호흡을 내쉬며 땀을 흘리는.
상처를 입은 것인지 코 어림이 뭉개져 몹시 흉측해 보였지만, 얼굴조차 가리지 않고 있었다.
해가 쨍쨍히 내리쬐는 대낮에, 우심보를 다스리는 관리이자 추가장의 주인 앞에서.
그 벌건 대낮에 살인을 자행하고도 악귀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대는?”
추가령을 뒤로 숨기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추형도의 앞을 막아선 호위들이 검을 빼 들고 여인을 매섭게 노려봤다.
“후우…….”
멈춰 선 여인이 호흡을 고르며 땀을 닦고는, 턱을 살짝 쳐든 채 내리깐 눈으로 좌중을 스윽 훑어보며 웃는다.
“다행이네. 늦지 않았어.”
“……?”
무엇이 늦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 와중에 무언가 수도 없이 담벼락을 넘어 추가장의 안뜰을 채운다.
대충 봐도 오십이 넘는 이들이 지붕은 물론 추가장의 내부를 모조리 점거한 것이다.
“이, 이런……!”
추형도가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그의 앞을 막았던 호위 무인들 역시 예상하지 못한 많은 수에 겁먹은 눈동자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다행이라면 잘게 떨리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해보려는 거야?”
“…….”
어느새 숨을 고른 여인이 느긋한 표정으로 비웃는다.
“재미있네. 근데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 안 드니?”
“……?”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더 이상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분명 대낮이건만, 추가장 전체에 밤이 찾아온 것처럼 적막이 찾아든 것이다.
“다 죽여서 그래. 밖에 있던 사람까지 전부.”
“……!”
추형도가 눈을 부릅떴다. 다 죽였다고? 추가장의 사람들을?
“……다,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보면 몰라?”
“…….”
“뭐, 어차피 너도 죽을 거야. 내가 필요한 건 그 아이 하나뿐이니까.”
아이?
추형도가 망연한 시선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딸을 노리는 것이지? 자신은 대부호도 아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관리도 아니다. 그저 시골 마을의 촌장이며,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에 앞서 추형도는 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 대명천지에 이런 짓을 자행하다니 국법이 무섭지도 않소? 어찌 백주에 이런 짓을…….”
“국법? 흥, 곧 무너질 나라의 법 따위.”
“……곧 무너진다고?”
추형도가 찢어질 듯이 부릅뜬 눈으로 중얼거렸지만, 여인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라면 하나씩 죽이며 그 고통스러움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라도 있었을 것인데.”
실로 잔인한 자들이다. 사람을 죽이며 희열을 느끼다니.
여인이 손짓하자 추가장을 점거하고 있던 무인 중 일부가 추형도와 그 딸을 향해 다가왔다.
“으……어어어!”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추형도와 그 딸을 호위하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칼을 버리고 도망쳤다.
스걱! 슥!
칼이 짧게 휘둘러지고 피가 붉은 비단 자락을 풀어낸 듯 허공을 수놓는다.
그들은 애초에 개미 새끼조차 살려 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털썩, 털썩.
호위 무인들은 얼마 뛰지도 못하고 모조리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남아 있는 것은 무력한 추형도와 그 딸뿐.
하지만 딸을 지켜야 한다 생각한 추형도는 호위가 떨어뜨린 칼을 집어 들었다.
두려움에 손이 바들거리며 떨렸지만 절대로 비켜날 수가 없었다.
허망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무도한 이들이 밝은 대낮을 활보하고 다닐 정도로 나약한 나라의 법률이 허망하고, 저 무도한 자들로부터 소중한 자신의 딸을 지켜 낼 힘이 없는 나약한 자신이 허망했다.
추형도는 이를 악물고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눈물겨운 부정이군.”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이 피식 웃는다.
“딸년 잡혀가는 모습을 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을 너의 절망스러움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텐데, 아쉽네. 근데 내가 어떤 개새끼 때문에 시간이 없거든? 빨리 죽여 줄게.”
여인이 뭉개진 자신의 콧잔등을 찡긋거리자 다가오던 무인들이 걸음에 속도를 더한다.
하늘이여.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내리는 것인가?
제발, 제발 대답이라도 해 다오.
추형도가 처절하게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다가오는 무인들을 향해 무의미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도 없는 허공에 칼질하는 그 모습에 무인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시시덕거리며 다가오던 그때.
추형도의 처절한 외침에 대한 하늘의 답이 들려왔다.
빠가각! 쩌어억!
“……!”
순간 움직임이 멈추곤, 모두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쪽으로 돌아간다.
“야, 혹시 그 개새끼가 나냐?”
“……?”
한 손에 여인의 수하로 보이는 무인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나머지 한 손에는 어깨에 걸친 검을 받쳐 든 채 천천히 추가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흑의인.
“……네놈은?”
“어?”
여인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리고, 흑의인의 표정에는 황당함이 어린다.
“어째 익숙한 얼굴이다, 너?”
“…….”
“어쩐지…… 뭔가 찜찜하더라니.”
흑의인, 진무가 손에 들린 무인을 던져 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욕설을 내뱉으며 우뚝 선 진무가 눈을 치켜뜬 채 천천히 주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여유로움에 대한 황당함이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존재감이 대기에 더해져 추가장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하자 숨마저 답답해진 것이다.
“일단 몇 가지 좀 묻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진무의 몸에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니들도 궁이냐?”
“…….”
준비할 새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진무의 질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여인의 눈빛이 한 차례 떨렸다.
그 정도면 뭐, 대답 안 해도 알겠네.
스윽.
진무가 품에서 붉은 서신을 꺼내자 여인의 눈에 불길이 확 하고 치밀어 오른다.
“네놈이!”
“…….”
여인의 반응에 진무가 피식 웃는다.
“뭐야? 이제 알아본 거야? 난 아까부터 그 뭉개진 코 보고 있었는데.”
진무가 장난스럽게 웃자 여인의 눈두덩이가 분노로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서신.
산서상회주에게 자신의 행적을 보고하는 것을 겸해 찾고 있던 물건을 거의 확보했음을 알리기 위해 작성한 서신이었다.
그런데 지난 밤, 잠시 수하들을 물리고 옷을 갈아입으려던 그때 저 망할 놈에게 급습을 받았다.
“네년이 궁이라면 산서상회의 대장 새끼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네?”
“…….”
진무의 말에 여인의 미간이 깊은 골을 만들며 좁혀진다.
“맞나 보네. 그런데 어째 니들은 이렇게 매번 하는 짓이 똑같냐?”
“……?”
“힘없는 사람들 괴롭히는 게 취미야?”
“…….”
“그래 됐다. 됐어. 니들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
진무가 혼자 말하고는 손사래를 치더니, 문득 웃음을 뚝 그쳤다.
천천히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희번덕거리고, 얇게 찢어진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선언하듯 한 자 한 자 내뱉는다.
“뭐든 간에 니들은 내 땅을 침범했고, 내가 세운 규칙을 어겼어.”
고요한 얼굴에 담긴 진한 분노가 살기로 변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살짝 감았다 뜬 눈은 흑요석처럼 번들거렸고,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시커먼 안개처럼 뭉글거리며 사방으로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