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꼰 남궁무휴의 모습에 짜증이 살짝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싸우기보다는 설득을 해야 했다. 그가 북진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네가 무당지검이라고?”
“예. 진무입니다.”
진무가 공손하게 포권을 하자 남궁무휴가 피식 웃었다.
“……뭐, 소식은 제법 들었네.”
“…….”
남궁무휴의 말에 진무가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무당지검은 장문인과 더불어 무당을 대표한다. 또한 지금의 자리는 공식 석상. 아무리 정무칠성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예의와 법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같은 자가 무당지검이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군.”
“……?”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 너무 안하무인(眼下無人)이지 않은가?”
남궁무휴의 말에 진무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다.
안하무인? 안하무이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 들을 말이 아닌데?
“참으십시오. 망해 가던 문파가 제자인들 제대로 키웠겠습니까.”
“…….”
옆에 있던 팽의방에 말에 진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 미친 고양이 새끼를 확 그냥.
하지만 장문인이 동석한 자리였다. 개가 짖는다고 같이 짖을 필요는 없었고, 지금 급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광호 어른, 말씀이 과하십니다.”
보다 못한 태허가 진무를 두둔하고 나섰다.
“과해? 뭣이 과하단 말인가?”
“예?”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함부로 난동을 부려 진을 어지럽히냐는 말일세.”
“아니, 그건…….”
태허가 항변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긴 화산을 대표하는 자신들도 적이라 생각하고 뛰어들지 않았던가?
맹주의 명령으로 펼쳤던 진인 데다 각 파의 수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진무가 너무 섣부르게 행동했음을 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못 배워 처먹은 행동이네. 어쩌자고 저런 천둥벌거숭이에게 무당지검이라는 칭호를 주었는지 쯧쯧.”
“…….”
아, 저 쌍놈의 새끼가……. 내 발밑에 깔려서 살려 달라고 질질 짜던 기억이 아주 어제 일어난 일처럼 선명한 것을……. 참아 줬더니.
확 그냥 다 엎어 버릴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기는 했지만 부아가 치미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던 진무가 탁자 아래에 놓인 주먹을 슬쩍 움켜쥐는데, 밖에서 작지만 묘한 힘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광호 시주. 아직 어린 무인의 치기 어린 실수가 아니오? 이 자리의 모두가 무림의 어른들이니만큼 너그럽게 이해해 줍시다.”
“…….”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팽의방이 구겨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린 동자승의 부축을 받아 들어오는 것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귀 근처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이 인상적인 노승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거만하게 앉아 있던 남궁무휴는 물론 각파의 수뇌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누구지?
진무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명현이 재빨리 소곤거렸다.
“소림의 혜조 대사시다. 인사드리거라.”
혜조라고? 저 노인네가 아직도 살아 있었어?
아니, 나는 그 경지에 이르고도 수명이 다해서 죽었는데…….
무당의 운공도 그렇고 저 노인네도 그렇고, 도대체 뭘 처먹었길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거지?
거참, 불기와 선기가 장수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건가?
아니면 무당산과 숭산이 명산이라서 몸에 좋은 풀뿌리가 아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건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 같은 노구(老軀)를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진무는 혜조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무당의 일대제자 진무가 대선사를 뵙습니다.”
“과례를 거두시게. 내 오가는 길에 진무 도장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네.”
“과찬이십니다.”
“허허, 그래도 이번엔 시주가 과하였네. 무릇 모든 일엔 절차와 법도라는 것이 있느니. 아무리 급하다 하여 그것을 무시하면 아니 되는 것이라네.”
“송구합니다.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하였기에.”
“번거롭다 하여 지키지 않는다면 무뢰배나 다름없을 것이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허허하고 웃은 혜조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면 되었네. 이 또한 배움인즉, 오늘의 일로 인해 자네의 도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는가?”
어? 뭐지?
진무가 묘한 눈길로 혜조를 바라보았다.
나무라는 것이 한없이 부드럽다. 남들이 뭐라 하기 전에 정리해 버림으로써 마치 자신을 도와주는 느낌이지 않는가?
“아니 그렇소, 창천 시주?”
혜조의 물음에 남궁무휴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예, 그렇지요.”
“허허, 역시 창천 시주는 마음이 대해처럼 너그럽소이다.”
너털웃음을 터트린 혜조가 그제야 시동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역시, 이 중 노인네. 나에게 우호적인 성향이구나.
진무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스쳤다.
찾아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인물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회의를 하시오. 근자에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무당지검이 왔다길래 구경차 온 것이니.”
“……예.”
남궁무휴는 혜조가 불편하기만 했다.
숭산이 가깝기는 했으나 혜조가 북진으로 올 것이라고는 남궁무휴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배분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정파 무림이다. 혜조는 남궁무휴의 아버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당금 정파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정파에서 제일 큰 어른인 것이다.
제갈협진 놈. 어쩐지 자신에게 북진의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맡긴다 했더니, 소림에 청해 혜조를 고문 역할로 보낼 줄이야.
말이 고문이지 감시역이나 다름없었다. 혜조는 언제나 검성 철지량의 편이었으니까.
“그래. 무당지검께선 어쩐 일로 북진으로 왔는가? ‘번거로움을 피해 가면서’까지 말일세.”
남궁무휴가 언짢은 속내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뒤에 힘을 주어 물었다.
쪼잔한 새끼. 나이가 몇 살인데 자꾸 걸고넘어지다니.
모르긴 몰라도 그가 가주직에 있을 때 남궁가의 무인들이 얼마나 피곤했을지는 알 것 같았다.
어쨌든 물었으니 답은 해야겠지.
본론을 꺼내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 진무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뗀다.
“북진을 해제하고 길을 열어 달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
진무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흐르고, 옆에 있던 명현마저도 깜짝 놀라 진무를 쳐다보았다.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인가? 내 당최 자네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구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북진을 해제하고 저들에게 천중산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한 진무로 인해 회의장 내부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허,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겐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즉답에 남궁무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벌떡 일어나 눈에 매서운 기세를 담아 진무를 쏘아보았다.
“어린 나이에 과분한 이름을 얻더니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도 구분치 못하는가?”
“…….”
“북진을 열고 저들을 들여보내라는 말은 정파의 땅에 간악한 무리들이 활보하는 것을 방치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네. 그것을 알고도 그리 말하는가!”
“정확히는 현재는 그들의 땅이지요. 그리고 어떤 연유로 저들을 간악하다 하는지 모르겠으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남궁무휴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진무의 담담한 대답에 회의장에 모인 수뇌들의 얼굴이 모조리 일그러졌다.
진무가 그 같은 주장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무야, 어찌 그러느냐?”
“…….”
명현마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리려 들었지만 진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혜조는 문득 진무가 참으로 재미있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다르다.
그저 어린 나이에 힘을 얻은 무인이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나서는 것과는 달랐다.
꼿꼿한 자세로 남궁무휴를 바라보는 진무의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겪어 온 자들만이 가지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무릇 불가에 이르기를 사람의 눈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했으니 범부의 눈인 육안(肉眼), 본질까진 보지 못하나 겉은 바로 본다는 천안(天眼), 사물의 이치를 살피는 혜안(慧眼), 중생을 구제할 방법을 아는 법안(法眼),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는 부처의 눈인 불안(佛眼)이 그것이다.
앞의 셋은 모르겠으나 뒤의 둘은 오랜 세월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서는 쉬이 얻을 수 없는 것. 한데 저자는…….
‘허허, 도가에 법안(法眼)이라. 한데 어찌하여 눈가에 선기와 사기가 더불어 담겨 있는 것인가?’
혜조가 진무의 눈동자에 묘한 끌림을 느끼며 침묵하는 사이 화산과 무당, 소림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의 수뇌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진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사파의 저질스러운 것들이 간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저들에게 길을 열어 주자니, 지금 제정신인가?”
“내 과거 사패천주에게 혈겁을 당한 무당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네.”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고, 혹자는 무당의 아픔까지 들추어내었지만, 진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진무야, 나 역시 지금 너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대체 어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무당이, 네 스승이 사황에게 그리 당했던 것을 잊었단 말이더냐?”
명현의 말에 진무는 뜨끔한 느낌이 들었다.
스승인 명진만 생각하면 괜스레 미안해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무에 대한 비판이 점점 더 거세지던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흥분을 어루만져 가라앉힌다.
사악함을 쫓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항마불기(降魔佛氣)를 담은 목소리.
“허허, 모두 진정들 하시오. 아직 그 연유조차 듣지 못했잖소이까?”
“…….”
진무는 혜조가 자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물론 그것은 무당지검에 한정되어 있을 테지만.
“창천 시주, 진무 도장이 허투루 말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으니 이리 말하는 연유나 들어 봅시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에게 길을 내어 주라는 것은.”
남궁무휴가 반발하듯이 대답했지만 혜조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들어 본다 하여 문제 될 것은 없지 않겠소? 다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망할 늙은이.
나이가 들었으면 숭산에 앉아서 열반에 오를 준비나 하지 어찌 사사건건 나서서 자신을 방해한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나 무시하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음, 알겠습니다. 대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남궁무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아 날이 선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말해 보게. 어찌 그런 주장을 하는지.”
“…….”
허락을 얻어 낸 진무가 살짝 고개를 숙여 혜조에게 감사를 전했다.
저 노인네가 왜 날 도와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됐다.
온갖 쌍욕이 난무하리라는 것을 예상했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한참은 기다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덕분에 말하기가 편해졌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께서는 근자에 무림을 어지럽히는 ‘궁’에 대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
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몇몇은 관심을 보였고 몇몇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로서는 불편한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정무맹의 대대적인 감찰로 인해 대부분의 문파에서 드러난 세작의 정체. 비록 맹주가 책임을 묻지 않는다 했지만, 각 파의 치부임은 틀림없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래전부터 그들과 싸워 왔습니다.”
그 역시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동림전장의 일이나 백마사의 일, 거기다 종남과 무명촌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운 공이 지대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니까.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무당의 양의심공을 익혔습니다. 대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기와 사기를 함께 익혀야 하지요.”
진무의 말에 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서린 사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당대의 무당지검으로 그간 오대도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표주를 다녔고, 화산을 마지막으로 표주를 끝냈습니다.”
태허가 당시 매화검진이 무너지던 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 후 사패천의 영역에 머물렀습니다. 한데 사패천에도 궁의 세력이 존재하더군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말이 길어지자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던 팽의방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사패천의 내전은 바로 그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뭣이? 하면 궁의 인물들이 일부러 저들의 내전을 조장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북진의 참가를 위해 모처럼 밖으로 나선 제갈가의 대가주 제갈웅현이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내전은 저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다만, 그 이유가 사패천 본성이 천인공노할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천인공노할 짓? 우습군. 사파가 그런 것에도 분개하는가?”
두고 보자.
내가 너랑 미친 고양이는 꼭 다시 한번 조진다.
남궁무휴의 싸늘한 비웃음에 진무가 그를 슬쩍 째려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사패천의 반란 세력이 산서상회를 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패천 본성의 재정을 마비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아닙니다.”
제갈웅현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아닙니다.”
“그럼 뭔가?”
“사파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아이들에 대한 납치.”
“……뭣이?”
새끼들, 놀라기는.
그럼 설득하려고 왔는데 그저 그런 이유를 들고 왔을까 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좌중을 둘러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진무는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듯이 설득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유월청, 별로 미안할 일도 아니지만 너를 최대한 나쁜 놈으로 만들어 주마.
일부는 사실로, 일부는 최대한 과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