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저벅, 저벅, 저벅.
걷는다.
딱히 무엇을 한 것이 아니다.
진무는 그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천중전을 향해 나아갔다.
걸음마다 내공을 실어 땅을 짓누르지도 않았고, 막대한 기운을 뿜어 억압하지 않았다.
그저 당당히 걸었다.
좌중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천중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히 걷는 진무의 얼굴에는 마치 호법부의 무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또한, 세상을 깔보듯이 묘하게 입꼬리를 올려 짓는 그의 미소에는 고집과 오만이 담겨 있었다.
가까워져 오는 진무의 거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포위망이 물러난다.
그것은 이성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었다.
무리를 짓고 있다고 해도 늑대가 범에게서 태생적인 두려움을 느끼듯.
산중에 군림해 온 제왕처럼 한가로이 걷는 걸음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온 범. 그것이 그들 눈에 비친 진무였다.
“으음…….”
누군가의 신음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 모두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혼란.
비단 그가 강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당지검과 묵룡의 전인.
그가 사황의 전인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의 몸에 둘러진 선명한 사기는 묵룡기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유월청처럼 그의 죽음으로 승계받은 것이 아니라 사황의 무공을 정식으로 사사하였음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사황 그 자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위압감이었다.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말대로 길을 내주어야 하는가?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선택지에 모두가 난감함을 드러낸다.
진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본다. 이대로 천중전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그냥 언짢다.
“길을 좀 열었으면 좋겠는데?”
나지막하지만 무거움이 담긴 한마디. 그저 목소리였을 뿐인데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무를 바라보고 있는 호법부의 무인들은 어째서 본성을 배신한 사패오왕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주인으로서의 대범함을 갖추고 있었고 능히 사패천의 옥좌(玉座)를 놓고 겨루어 볼 만큼 강하다.
하지만 포위망의 뒤편에 선 단경주와 장로들은 무인들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진하게 올라오는 불안감.
공격을 했어도 벌써 했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지켜볼 뿐 움직이지 않는다.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단경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패오왕이 약관에 불과한 그를 따르는 이유, 산서상회가 몰락한 이유, 그리고 정무맹이 북진을 구축하고도 길을 열어 준 이유.
그 모든 중심에는 묵룡의 전인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삼궁이 무너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제는 일궁마저 무너뜨렸다.
위험하다. 장차 능히 정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두 가지 신분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고,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무위가 그 사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일궁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중원을 무너뜨리기 위해 와신상담하며 기다려 온 궁에 더없이 위험한 존재였다.
만에 하나 중원이 하나로 뭉치게 되면 궁의 계획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죽여야 한다. 제 놈이 아무리 강해 봐야 사람이다.
소약벽조차 힘겨워했던 호법부의 무인들 아닌가. 그들을 이용해 몰아붙이고 장로들이 합세한다면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운 단경주는 호법부의 무인들을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적을 앞에 두고 어찌 물러난단 말이냐! 저 어린 핏덩이 놈이 설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단경주의 외침에 호법부의 무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저놈은 사황의 전인이 아니라 적도다! 그런 놈을 방치한다면 네놈들 역시 천주님을 배신하고 반란 세력에 가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인들이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자 단경주가 더욱 발악하듯이 고함을 질러 대었다.
“…….”
진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무인들의 뒤편에 숨은 단경주를 바라본다.
저 새끼…… 왜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고 선동질만 해 대는 거지?
생각해 보니 야영지를 침범해 온 동관이라는 놈이 사람 거죽을 쓰고 장로로 위장했었는데, 설마 저 새끼도?
월청이 놈, 장로들을 싹 갈아 치웠다고 하더니 그 틈에 숨어든 건가?
진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린다.
뭐, 세작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타인의 뒤에 숨어서 고함치는 겁쟁이 따위는 자신의 사패천에 필요하지 않으니까.
잘됐다, 요놈.
어차피 몇 놈 정도는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멈춰 있던 진무의 걸음이 속도를 더하고…….
파앗!
일순간 상상할 수도 없이 빨라졌던 진무의 신형이 쏘아진 화살처럼 포위망 안으로 파고든다.
“이, 이런!”
선두에 있던 무인이 기겁하며 자신도 모르게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후웅!
진무의 신형이 풀숲을 지나는 뱀처럼 휘어지더니 검은 잔상을 베어 낸다.
“젠장, 포위망을 사수해라!”
당황한 무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진무는 오직 한 놈만 바라보며 달렸다.
대장로 단경주, 뒤에서 선동질이나 일삼는 새끼.
너만 뒈지면 되겠구나.
“어, 어디냐! 어디로 간 것이냐!”
포위망으로 파고들어 호법부 무인들 틈으로 진무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자 단경주와 장로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연신 눈을 굴렸다.
미친놈, 이 몸을 니놈 따위가 찾을 수 있을까 봐?
그리고 다 왔다, 이 새끼야!
파앗!
“헉!”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고 솟구친 진무가 단경주를 향해 뛰어들었다.
“대, 대주님!”
놀란 염승이 자신도 모르게 암영대의 직책을 부르며 진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대장로가 아니고 대주?
그럼 그렇지. 너도 대장로라는 새끼도 죄다 쥐새끼였구나.
휘릭!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진무가 두 팔을 내밀어 뻗어진 염승의 주먹을 휘감는다.
투두둑. 뿌드득!
곧장 반대 방향으로 비틀리는 염승의 어깨.
“크악!”
팔이 빨래처럼 비틀려 버린 염승의 비명과 함께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당긴 진무가 그대로 솟구치며 무릎을 박아 넣는다.
콱! 쩌어억!
얼굴이 함몰되어 넘어가는 염승의 몸을 밟고 도약한 진무가 단경주의 머리 위로 날았다.
“젠장! 놈을 죽여라!”
단경주의 외침에 장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허! 이런 개자식들 보게. 눈빛을 보니 한두 놈이 아니라 전부 한패였구만?
쥐새끼…… 한 마리 잡았으니 이제 다섯 마리.
얇게 다물었던 진무의 입술이 벌어지고, 싸늘함을 머금은 송곳니가 하얗게 빛을 발했다.
묵룡의 기운을 담아 검게 변한 손이 아래를 향해 뻗어지고 강맹한 장력이 폭풍처럼 뿜어졌다.
“……!”
그 위력이 무지막지함을 깨달은 단경주가 공격을 멈추고 다급히 뒤로 몸을 물린다.
콰쾅! 쾅!
거칠게 폭발한 지면 주위로 파편이 솟구치고, 피할 틈도 없이 장력을 그대로 얻어맞은 장로 하나가 떡메로 친 찰떡처럼 짜부라졌다.
“놓칠 줄 알아?”
딴 놈은 필요 없다. 대장 놈부터 조진다.
파핫!
내려서자마자 지면을 박찬 진무의 신형이 묵빛 꼬리를 여운처럼 남기며 단경주를 뒤쫓는다.
“이, 이런!”
가공할 추격 속도에 단경주가 급히 검사를 만들어 진무를 향해 간결하게 뻗어 냈다.
참 오랜만에 본다, 무촌경.
근데 이걸 어쩌나, 이젠 내가 더 잘하는데.
쩌어엉!
쏘아져 들어오는 검의 끝을 때려 방향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비틀며 뻗어 낸 발이 단경주가 교차해 막은 팔 위를 때린다.
빠가각!
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경주의 몸이 바닥에 거칠게 처박혔다.
“크으…….”
쩌릿하게 울려오는 충격에 땅바닥을 뒹군 단경주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바닥에 털썩 엎어진다.
“우웩!”
고통스러운 얼굴로 한가득 토해 내는 검은 피. 진무의 발에 실린 기운이 그의 몸에 깊은 내상을 입힌 것이다.
“…….”
진무가 가만히 서서 단경주를 내려다본다.
그걸 막다니, 역시 대장 새끼라 다르다 이건가?
“크으…… 젠장…….”
소매로 피를 닦아 낸 단경주가 일그러진 얼굴로 진무를 노려본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죽이기에는 너무 강하다.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단경주가 진무의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염승과 공척이 죽었다.
적진에 잠입시켰던 동관도 죽었을 것이 틀림없다.
장로로 위장한 암영대원 중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을 제외하고 셋뿐이다.
죽이지 못할 거라면 놈에 대해 알려야만 한다. 자신이 미끼가 되면 장로들이 탈출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단경주는 곽칠성을 비롯한 다른 장로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몸을 일으켰다.
“무당지검……. 이제는 사황의 전인이라…… 참으로 대단하구나. 네놈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네놈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
단경주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린다. 실핏줄이 터지기 시작한 눈이 혈광을 토해 내고, 그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기운이 솟구쳐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네놈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담아…….”
“거, 진짜 더럽게 주절거리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무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귀를 후벼 팠다.
“뭐,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
“해 봐.”
“……뭐?”
“해 보라고.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번 보게.”
진무의 빈정거림에 단경주의 눈가가 분노로 씰룩거렸다.
“아, 참!”
“……?”
“말을 안 해 준 게 있는데.”
진무가 피식 웃으며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빈 검집을 내보였다.
옻칠한 흑색에 금박 장식이 둘러진…… 그런데 검은?
“혹시 너, 막 혼자서 죽을 각오로 시선 끄는 틈에 나머지 놈들에게 도망치라는 전음을 보냈거나 한 건 아니지?”
“……뭐, 뭐라고?”
“안타깝다, 안타까워.”
“…….”
“우선 저 새끼.”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진무의 시선을 단경주가 눈을 부릅뜨고 좇았다.
“크아악!”
동시에 터져 나오는 비명.
진무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차례로 장로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의 몸을 꿰뚫고 돌아와 진무의 머리 위에 자리하는 검, 일휘.
“그, 그건…….”
“얼굴은 알아도 내가 이기어검을 다룬다는 것까진 몰랐나 보지?”
“……이, 이기?”
“최근에 성취가 좀 있어서 말이야. 저 정도 거리쯤은 일도 아니거든.”
수하들의 죽음에 진원지기까지 끌어 올린 단경주가 세차게 쌍장을 뻗는다.
“이런 개자식! 죽어라!”
쿠르릉!
우레 같은 굉음을 만들며 쏘아진 장력이 진무를 향해 날아든다.
그래, 그 정돈 되어야지.
넌 쥐새끼들 대장 정돈 되니까 특별하게 죽여 주마.
진무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구우우우.
대지를 디딘 발에서부터 피어오른 검은 회오리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타고 올라 활짝 펼친 손안에 모인다.
지직, 지지직!
한 점을 향해 거칠게 모여든 검은 기운이 둥글게 모여 한계치까지 응축되며 전격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단경주의 장력이 전면까지 짓쳐들어오는 순간 진무의 손이 가볍게 떨어진다.
단경주의 장력을 파고든 검은 강기의 구슬.
묵룡혼원공 용옥(龍玉).
쿠아악!
용이 머금은 여의주가 조화를 부리듯이 진무의 손을 떠난 강기가 단경주의 장력을 꿰뚫고 쏘아져 나갔다.
퍼억!
“크아악!”
단경주의 손바닥을 꿰뚫고 들어간 강기의 구슬이 그의 팔뼈를 바수고 몸속으로 들어가 폭발했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긴 단경주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폭발로 인한 거대한 구덩이뿐이었다.
스르륵.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호법부의 무인 중 하나가 겨누었던 무기를 내린다.
그리고 그 하나의 선택이 삽시간에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젠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다.
진무,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제 둥지를 찾아온 묵룡이었다.
“잘 생각했군.”
피식 웃은 진무가 몸을 돌려 천중전을 향해 걷는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 결과는 뻔하다.
진무가 호법부의 무인들과 싸우는 동안 소약벽과 돌격대는 동문과 서문을 열 것이고, 내부를 공격당한 사패천은 더 이상 전투를 이어 갈 수 없으리라.
남은 것은 이제 유월청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