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멀리 수탉의 홰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어슴푸레한 새벽.
전쟁이 끝난 천중산이 조금씩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허! 정말로 무너뜨릴 줄이야.”
멀리 천중산이 보이는 야산에 자리를 깔고 전쟁을 지켜보던 양소방이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무당지검이라는 인물은…….”
양소방의 옆에 있던 중년의 거지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쳇, 우리 개방 제자 중엔 어째서 저런 놈이 없는지.”
질경이 풀을 거칠게 씹어 뱉으며 한탄하는 중년 거지의 모습에 양소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자신을 가리킨다.
“나 있잖아, 나.”
“…….”
양소방의 말에 중년 거지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이, 웃어?”
“그럼 웁니까?”
“뭐?”
“다 늙어서 호승심은 염병, 그러게 진작에 제자를 하나 들이라고 했잖습니까!”
“……아, 그…… 흠흠.”
중년 거지의 말에 양소방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아니,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어디 한번 해 봅시다.”
“…….”
“대체 사숙께서는 그동안 한 일이 뭡니까? 예?”
“아니, 이 사람아. 꼭 그렇게까지야. 내 실언을 했네. 그 이야기는 그만하세나.”
“그만해요? 왜요? 맨날 그놈의 정무맹, 정무맹.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숙께서 개방을 위해서 뭘 했냐구요?”
중년 거지의 말에 양소방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정파의 큰 어른으로 통하는 양소방이라 해도 눈 앞의 거지에게만큼은 절대로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원래의 천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을 덧대 기운 옷.
허리춤에는 조롱박으로 만든 낡은 술병 외에도 벽옥으로 만든 몽둥이 하나와 그의 신분을 표시하는 아홉 결의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그가 바로 십만 개방도를 영도하는 개방주, 취룡개(醉龍丐)였다.
“아니, 쓸 만한 놈들을 수차례 권했는데 대체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와중에 용봉관에 들어간 취구개 녀석에게 들으니 황보세가의 애새끼를 가르치신다면서요?”
“아, 아니 그건 바빠서…….”
“바빠요? 내 참, 그게 말이야 방구야?”
“바, 방구……. 이, 이보게. 내 말 좀.”
양소방이 주변에 있는 제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려 보려는데 이미 독이 잔뜩 오른 취룡개는 입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씨, 생각해 보니까 진짜 열 받네. 개방이 무슨 정무맹 따까립니까? 사숙이 뭔데 나서서 자꾸 개방을 움직입니까? 뭔 사건만 있으면 이쪽을 조사해라, 저쪽을 조사해라. 젠장, 이거 원 거지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진행비도 쥐꼬리만큼 줘 가면서. 그 시간에 비럭질을 해도 그것보단 더 벌겠네. 이럴 거면 갈라서요, 그냥! 우리도 하오문처럼 정보나 팔아먹고 돈이나 좀 벌게.”
“어허! 말이 심하네. 그건 정파 수호의 뜻을 가지고 우리 개방이…….”
“시끄러워요!”
“…….”
입술을 기이하게 비틀며 무섭게 눈을 부라리는 취룡개의 모습에 양소방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계속 그럴 거면 이참에 약속이나 해요! 두말 않고 정무맹에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까.”
“……뭘?”
“제자!”
“아니 그건…….”
“이런 시부럴, 그리고 제 허락도 안 받고 무당지검한테 협전을 줘요? 내 모를 줄 알았어요? 그래요. 저런 인물이면 인연을 맺어 두는 것도 좋다고 칩시다. 근데 그거 누가 알아줍니까? 예? 죄다 무당지검 어쩌구 하는 말뿐이더만. 우리 개방이 한 일은 아주 쏙 빼놓고 말입니다. 와중에 그 사황의 무공을 얻은 것도 숨겨 줬다면서요?”
“아 그건 개방의 명예가.”
“명예 같은 소리 하네. 아, 뭐, 백번 양보해서 큰 사건은 진무라는 도사가 처리했다 칩시다. 근데 나머진요? 밑에서 뺑이 치는 건 우린데! 예? 예? 예?!”
취룡개가 그간 쌓였던 한을 모조리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대들자 양소방이 방주를 따라온 장로들에게 눈짓을 보내 본다.
하지만 누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고 싶겠는가?
철저한 외면, 무시……. 이놈의 새끼들이…….
“제자 들여요! 이젠 더는 못 물러납니다!”
“……음.”
똑바로 쏘아보는 취룡개의 눈빛에 양소방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들이 천중산을 살피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진무 때문이었다.
북진에서 양소방에게 날아온 서신.
양소방은 ‘속았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진무가 그 망할 혁련무강 놈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을 줄이야.
인간 영약 취급을 당하며 내공을 빨릴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망할 놈,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맞다, 몰랐다고 했지?
뭐,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단강구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무는 누구보다 바른길을 걷는 무인이었다.
고리타분한 도사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대신 뭔가 조금 더 진솔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혁련무강 본인도 아니고, 선기를 익힌 무당의 도사이니만큼 양소방으로서는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라는 답신을 보냈고, 진무는 소림의 금강나한진을 상대로 이겨 내었으며, 반란 세력을 이끌고 천중산으로 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남궁무휴가 개 맞듯이 처맞고 화병에 내상까지 도지는 바람에 반년은 족히 정양하게 되었지만, 속 더럽게 시원했고…….
더욱이 사사건건 정무맹의 일에 반대만 하던 남궁무휴가 그리되고 난 뒤부터는 광호 팽의방도 입을 다물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와중에 그동안 칩거했던 소림의 혜조가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하자 철지량을 중심으로 한 정무맹의 집권 체제가 더욱 탄탄해졌다.
어찌 되었건 모든 연결점에 진무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진무만 끼어들면 정무맹이 항상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당지검이 사패천을 장악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말로는 돕고 있다 했으나 사황의 무공을 익힌 그가 아니면 누가 사패천을 손에 넣는단 말인가.
하여간에 그런 이유로 제갈협진이 개방에 정식으로 요청서를 보내 천중산을 살피게 한 것인데, 하필이면 취룡개가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다.
뻔하다. 방주인 그가 직접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천중산까지 온 걸 보면 애초에 노리고 온 것이다. 자신에게 후학을 약속받기 위해서.
“어쩌실래요?”
“……뭘 어째? 이미 그러려고 와 놓고.”
“잘 아시네요. 그럼 결정하시죠.”
“휴, 알겠네. 하긴 늦긴 했지. 내 나이도 있으니…….”
끝내 버티지 못한 양소방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제서야 취룡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양소방, 개방이 배출한 최강의 고수이자 만인의 존경을 받는 협사(俠士).
그는 절대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 약속을 받아 내었으니 취룡개는 방주직을 내려놔도 여한이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간의 숙원이 아니었던가?
“각출아!”
취룡개의 부름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개방도 각출이 섬전처럼 뛰어왔다.
그런데 잠깐만!
“이, 이보게 방주, 각출이라면?”
“시끄러워요. 방주인 제가 결정한 겁니다.”
“…….”
이건 또 뭔…….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인물에 양소방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각출, 그는 그냥 개방도가 아니다. 허리에 매듭이 무려 일곱 개다.
“아, 아니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후개를?”
후개, 개방의 다음 대 개방주.
하지만 양소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않는 듯이 취룡개는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각출, 너를 오늘부로 후개직에서 파면한다. 이후 너는 무풍개의 제자가 될 것이니, 어서 배사지례(拜師之禮)를 올려라!”
“예!”
충격적인 이야기임에도 반박 한마디 없이 납작 엎드리는 각출.
……사전에 짜 둔 게 틀림없다.
아니, 그런데 다른 건 다 양보한다고 해도 배사지례를 하자면 절차가 있고 예법이 있어야 하는데 어찌 이딴 곳에서 한단 말인가?
“이보게. 배사례라면 응당 총단에서 올려야…….”
“뭐 어때서요?”
“……어?”
“거지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누우면 방이고 모이면 집이지.”
“…….”
“총단 그딴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세요.”
“……?”
취룡개가 손짓하자 개방의 장로들이 무언가를 잔뜩 들고 다가온다.
“위, 위패를?”
이 미친놈들이 점점…….
“됐지요? 방주 있고 장로들 있고 제자에 위패, 아! 때마침 술도 있네요.”
“허!”
취룡개가 허리춤에 끼운 조롱박 술병을 꺼내 들자 양소방이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이건 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도 아니고, 강매도 이런 강매가 없다.
하지만 양소방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배사지례를 올릴 장소는 착착 마련되었고, 눈 뜨고 당한 양소방이 헛웃음만 흘리는 사이 각출이 잽싸게 구배지례를 올렸다.
엎드린 각출을 대신하여 대장로 염현개가 양소방을 향해 술잔을 올렸다.
이런 망할 자식들을 보았나.
동선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수차례 예행연습까지 해 둔 것이 분명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양소방은 화를 내기보다는 미안함을 느꼈다.
개방의 가장 어른인 그가 바쁘다는 핑계로 내내 방주와 장로들에게 큰 짐을 안긴 것 같아서였다.
술잔을 들이킨 양소방이 엎드린 각출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 일어나거라.”
“…….”
각출이 일어나자 양소방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의 허리에서 팔결의 매듭을 뜯어 반으로 접고는 각출의 허리에 묶는다.
그 모습에 취룡개는 물론 장로들까지 뿌듯한 표정을 했다.
배사지례의 끝.
제자가 인사를 드렸고, 스승이 표식을 주었으니 이로써 각출은 정식으로 무풍개의 첫 번째 제자가 된 셈이었다.
“일단은 다른 일이 있으니 긴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꾸나.”
“예. 스승님.”
양소방의 말에 각출이 일어나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취룡개의 뒤가 아닌 양소방의 뒤편으로.
“원하는 대로 되어서 좋은가?”
“당연하지요.”
양소방이 짓궂은 표정을 짓자 취룡개가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쯧쯧, 아무리 그래도 사숙을 이리도 몰아붙이다니.”
“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심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과한 행동으로 고개를 숙이는 취룡개의 모습에 양소방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너무하였어. 정무맹과 갈라서려 하다니…… 진심은 아니지?”
“사숙 하시는 거 봐서 결정하려 했지요.”
“…….”
양소방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취룡개가 급히 말을 돌린다.
“그나저나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사패천이 무당지검에게 무너졌으니.”
“일단은 대군사가 그의 뜻을 알아보라 하였네.”
“직접 만나 보실 모양이군요?”
“그래야겠지.”
화제 전환에 성공한 취룡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다.
“어쨌든 대단한 친구입니다. 저 사패천의 성이 며칠 만에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 우리가 그토록 두들겨 대어도 열리지 않던 그 문을 저리도 쉽게 활짝 열었으니…….”
오래전 철지량과 함께 성문 앞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았던 기억을 떠올린 양소방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막말로 창천 어른을 그리 만들었으니 이미 정파의 최고수나 다름없는데…… 이제는 정사를 통틀어 그의 이름을 넘을 자가 없겠군요.”
“그러게 말일세. 허참, 처음부터 범상치는 않다 생각하였는데…….”
“화산의 매화, 소림의 나한…… 왠지 한번 도전해 보고 싶군요.”
“타구봉진?”
“예. 왠지 자랑거리가 될 것 같아서요.”
“자랑거리?”
양소방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취룡개가 사패천의 본성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런 고수가 또 나오겠습니까? 제 생각엔 앞으로 백 년 안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
양소방은 취룡개의 말뜻을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사에 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으나 발자취를 남긴 무인은 손에 꼽는다.
진무는 이제껏 누구도 하지 못했던 길을 걷고 있었다.
정사 무림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어쩌면 마도에도…….
이렇게 된 마당이니 그와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맞서서 버텨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절진이 되는 것이다.
“허허,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구먼, 우리 타구진이 얼마나 버틸지.”
“예. 돌아가는 대로 가다듬어야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할지도.
어쩌면 화산도 소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갈지 모른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전쟁이 끝났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하게.”
“아이들을 남겨 둘까요?”
“아닐세. 막 전쟁이 끝난 곳에 손님이 찾아가는 것도 결례 아니겠는가.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각출이와 함께 찾아가 보도록 하겠네.”
“예. 그럼 대군사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취룡개의 말에 양소방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제껏 불어 본 적 없는 신선한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