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09
309화
전쟁이 끝난 이후, 천중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정문.
우람한 역사들이 불퉁한 근육을 선보이며 둥근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익, 그그그긍.
천중전 가장 아래.
거친 쇳소리와 함께 일 층 대전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그 내부를 훤하게 드러내었다.
흑우선을 들고 소매 넓은 옷을 갖추어 입은 적생이 앞서고, 사패오왕이 그 뒤를 따른다.
정작 진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좌우로 도열해 있던 사패천 본성 소속 무인대의 수좌들은 일체의 의문 없이 즉각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당연했다.
적생의 지위는 총사.
원래 세력이란 것은 무공만으로 그 서열이 결정되지 않는 법이이다.
이미 수차례의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적생은 명실공히 사패천의 서열 이 위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인들의 중심을 걷던 적생이 맨 안쪽의 옥좌가 놓인 단 아래 멈춘다.
그의 좌우로 사패오왕이 둘씩 나누어 서자 적생의 입에서 차분한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일어나세요.”
“…….”
모이라 해서 모이기는 했으나 수뇌들은 소집의 이유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인 이들은 유월청의 편에 섰던 무인대의 수좌들.
혹 유월청을 도왔던 것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해서인가?
묻고 싶었으나 적생은 둘째 치고 사패오왕이 흉흉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입을 떼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다들 들으십시오.”
적생의 말이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끌어모은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비록 서로가 적이 되어 싸웠으나 천주님께서는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하시었습니다.”
“예!”
전후 처리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수뇌들이 안도감에 힘차게 대답했다.
“제가 여러분만 별도로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
“아시는 분은 알 터이나 본성으로 오기 전 저희는 산서상회라는 곳을 무너뜨렸습니다.”
적생의 말에 모두가 쥐 죽은 듯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고, 혹시나 자신이 산서상회와 관련된 일은 없었던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는 상회로 위장한 사악한 집단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일궁이라 칭하더군요.”
“…….”
“산서상회를 이끌던 일궁주 송여방이 천주님의 손에 죽고, 우리는 그 휘하의 무인들을 샅샅이 찾아내 모조리 목을 베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패천의 본성에 세작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작에 관한 내용이 거론되자 수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몇몇의 눈동자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잘게 떨렸다.
“천주님께 죽은 대장로 단경주 이하 모든 장로들 또한 세작이었지요.”
“……그럴 리가?”
어딘가에서 불신을 가득 담은 반문이 작게 들려왔지만 적생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해서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저는 장로들뿐 아니라 각 무인대에도 세작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전쟁이 끝난 후 수뇌들을 모이게 한 진짜 이유였다.
아직도 사패천에 남아 숨죽이고 있을 세작들을 일거에 소탕해 버리기 위해서.
“기회를 드리지요. 지금부터 셋을 세겠습니다.”
“…….”
“여기 계신 분들 중 그들과 내통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세작임을 나서서 밝히는 자가 있으면 목숨만큼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차분하게 권유하는 듯했으나 그 상황에서 나설 인물은 없었다.
“하나!”
“둘!”
“셋!”
약속한 대로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천천히 셋을 센 적생은 적막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적생의 말에 천우명이 신호를 보내자 대야를 든 철검단의 무인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수뇌들의 앞자리에 각각 놓고는 그들의 무기를 전부 회수한다.
대야에 담긴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황갈색의 액체였다.
“이게 뭡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적생이 태연히 대답했다.
“밀랍입니다.”
“이것을 어찌?”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또 누군가의 물음.
“세작들은 실로 교묘한 역용술로 모습을 위장하고 무공과 성격, 말투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도록 훈련된 자들이었습니다.”
“…….”
“하지만 역용술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피면구라 해도 밀랍을 발라 식히면 딱딱하게 굳어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적생의 친절한 설명에 맨 끝에 있는 무인이 벌떡 일어났다.
“총사!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겁니까?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과거를 묻지 않겠다 하시더니!”
“…….”
적생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명세찬이 설명을 덧붙인다.
“남문 호위장 벽료입니다. 유월청이 천주가 된 이후에 임명된 자입니다.”
명세찬의 말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적생의 표정이 일순 싸늘하게 굳는다.
“여러분이 뭔가 잘못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뭐요?”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께 신뢰를 쌓기 위한 과정입니다.”
“……?”
“적의 세작을 품 안에 두면 계속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생의 말에 몇몇이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믿기 위해서 의심이 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그리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적생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흑우선을 들어 올리자 철검단의 무인들이 일제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세를 낮췄다.
죽이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이, 이럴 순 없소! 처, 천주님을 뵙게 해 주시오!”
“…….”
벽료의 다급한 외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적생의 입에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죽이세요.”
스걱! 철컥.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철검단 무인의 검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툭.
너무도 쉽게 떨어져 나뒹구는 머리통과 얼마 지나지 않아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마찬가지로 바닥에 허물어지는 육신.
소름 끼치는 정적이 대전을 가득 메우고, 벽료의 최후를 본 무인들의 눈동자에 강렬한 두려움이 어렸다.
“반발은 허락한 적 없습니다.”
“…….”
그의 죽음이 가져온 효과는 충분했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랬다. 아무리 담력이 출중해도 궁지에 몰리면 사고(思考)가 정지하는 법이다.
세작의 존재와 더불어 그들이 어찌 위장했는지까지도 밝혀 몰아붙이니 정신이 말짱할 놈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와중에 눈조차 감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본다면?
푹, 푸푹.
몇몇이 대야에 고개를 처박는 순간, 수뇌들 틈에 숨어 있던 암영대의 세작들은 심적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
송여방이 죽은 게 확인되었고, 장로로 위장했던 암영대주와 조장들마저 죽었다.
사패오왕에 철검단까지 있으니 도망치기가 요원하겠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생존 확률이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다.
“젠장!”
파학!
철검단을 피해 빠르게 창 쪽으로 몸을 날리는 이들은 좌우를 합해 모두 다섯.
하지만 그들은 적생의 치밀한 성격을 간과했다.
이미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같은 일은 예상되어 있었다.
“컥!”
창문을 넘던 이들이 자신의 몸에 틀어박힌 비수를 바라보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리고 그들의 옆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창가에 은신시켜 둔 살막의 대살주들이었다.
얼굴을 대야에 처박았던 이들이 멍하니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진짜 세작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 얼굴에 닿은 대야의 액체가 이상하다.
분명 밀랍은 아니고…… 물?
어찌 된 일일까?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적생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밀랍? 당연히 거짓말이다.
대야의 수만 열 개가 넘는다. 계속 전쟁을 치른 터에 그 많은 양을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대야에 담겨 있는 것은 그저 비슷하게 색깔을 낸 물이었다.
그저 세작 놈들이 제 발이 저려 움직이도록 계획을 세우고 맛깔스러운 연기로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었다.
“다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생의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세작 색출은 끝났으니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빙긋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적생의 모습에 무인들은 얼떨떨한 모습으로 대전 밖으로 향했다.
“멍청한 새끼들. 하여간 겁들은 많아서는…….”
천우명이 비릿하게 웃으며 죽은 이들을 바라본다.
멍청하다니, 천 단주님께서 하실 말은 아니지요.
적생이 피식 웃고는 소약벽을 바라보았다.
“살막주님.”
“예, 총사.”
“시험에서 통과한 이들에게 대살주들을 은밀하게 붙여 주세요.”
“……예?”
“혹시 모르니까요.”
“아, 예.”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대비하려는 적생의 모습에 소약벽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천주님께선……?”
“사황의 무덤으로 향하셨습니다.”
“무……덤이요?”
“사황께 인사라도 드릴 모양입…… 왜들 그러시죠?”
적생의 대답에 사패오왕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거길 왜?
본인이 본인의 무덤을 뭐 한다고 찾아?
“어쨌든 반드시 처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찾아뵐까 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무덤에요?”
“예.”
“……뭐…… 그러시죠.”
* * *
천중산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큼지막한 무덤이었다.
사람의 키만 한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진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무덤과 연결된 계단을 천천히 오른 적생과 사패오왕.
“천주님.”
적생의 부름에 진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어, 왔어? 세작들은?”
뭔 일이 있었나? 왜 저렇게 못마땅한 얼굴이지?
적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수뇌부에 대한 세작 색출은 얼추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각 무인대에 관련하여서는 하오문에서 확인하고 있으니 곧 처리될 것입니다.”
“그래. 궁의 쥐새끼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싹 청소해. 깨끗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 보이질 않으시네요?”
“…….”
적생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묻자 진무가 깊이 한숨을 내쉬면서 무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슥, 싹, 사삭.
잡초가 무성한 무덤.
팔다리를 둥둥 걷고 땀 흘리며 일정한 높이로 잡초를 베어 내는 황신과 소동보.
아, 절을 올리기 전에 정리부터 하실 모양이구나.
“망할 자식이 벌초 한 번을 안 했어.”
“…….”
“아마 술도 한 잔 안 올렸을 거야.”
“그런 모양이네요.”
적생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무리 싫었어도 벌초는 해 주는 게 예의 아니냐? 내 참. 이건 뭐 한 번 찾지도 않은 것 같다니까? 다시 왔기 망정이지 그냥 뒈졌으면 아무것도 모를 뻔했잖아.”
천주님께서는 스승에 대한 사랑이 남 다르시…… 응? 근데 뭐? 다시 와? 그냥 뒈져? 저게 다 무슨 말이지?
적생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어쩐 일이야? 다들.”
“……아, 일단 사황께 제(祭)부터.”
“제를 올려?”
진무가 피식 웃는다.
제 무덤에 절을 올리는 미친놈이 어디 있다고.
“됐고. 말해 봐.”
진무의 말에 적생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천주님께서 결정해 주실 일이 있어서요.”
“뭔데?”
“폐주, 유월청에 대한 처결 문제입니다.”
“…….”
적생의 말에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와는 달리 사패오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