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23
323화
휘이이…….
삭풍이 스치고 간 절벽에 먼지바람이 인다.
펄럭.
절벽의 상단에 고정된 녹슨 철대에 매인 깃발이 나부껴 그 안에 적힌 글귀와 문양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비바람과 작열하는 볕에 노출되어 색이 바랜 해와 달 문양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피처럼 붉은 수실로 쓰인 한 글자.
마(魔).
바람에 나부끼며 황톳빛 먼지를 털어 낸 그것은 당장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듯 음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거기에 주변의 협곡에서 오는 황량함까지 더해지니 스산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하나가 아닌 깃발.
삭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꽂힌 깃발이 이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일제히 펄럭인다.
신강과 청해의 경계에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깃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신강, 마교의 대지.
들어갈 수는 있으나 돌아올 수 없는 그곳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해 왔다.
때때로 청해로 넘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또한 중원 정벌을 위해 세상을 피로 씻어 놓는 그들은 두려움의 상징이자 잔혹함의 표상이었다.
마교 역사상 최강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현 교주 북리도천의 천명.
자신이 있다면 넘어오라.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그는 자신의 말을 굳건히 지켰고, 경계를 넘은 이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속세의 소문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높은 성곽도, 수천의 무인도 지키지 않는 경계선에는 오로지 깃발만이 존재했으나 그 어떤 방벽보다도 튼튼하고 높았다.
신강은 오직 마교의 영역이었다.
* * *
드르륵, 드르륵.
울퉁불퉁한 황무지 바닥을 밟으며 험로를 넘어가는 마차.
나이와 성별이 다른 다섯 명의 인물이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며 걷는다.
말고삐를 잡은 사십 대 중반의 사내와 마차를 미는 어린 티를 막 벗어난 소년, 그리고 젖먹이를 안은 여인과 그녀의 치맛자락을 꼭 잡은 예닐곱 살의 아이.
한 가족으로 보이는 그들이 신강의 깃발을 넘고 있었다.
신강과 청해를 잇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인 그 길은 불귀의 협로라 불리는 곳이었다.
까악, 까아악.
아무도 없는 그곳에 절벽에 떼 지어 앉은 까마귀가 저마다 소리 내며 검은 눈을 휘돌리는 모습은 소름이 절로 돋아 오를 만큼 섬찟했다.
“아, 아부지. 괜찮을까요?”
마차를 밀던 소년이 불안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아비라 불린 사십 대 중반의 사내, 우등 또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가장의 무게 때문인지 의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겁먹지 말아라. 이미 깃발을 넘은 지 한참이 되었는데 아무 일도 없지 않으냐.”
“그래도…….”
“괜찮다. 곧 협로가 끝나니 안전할 것이야.”
우등의 토닥임에도 소년의 얼굴에 서린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교의 영역,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
그곳에 사람이 사는지 살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디든 우리 살던 곳보다야 나을 것이다.”
“…….”
우등이 달래듯 말하자 청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살던 평화로운 터전은 이미 사라졌고, 돌아갈 곳도 없었으니까.
덜컥.
협로가 거의 끝나 가는 지점이었다.
“워!”
우등이 말을 세우자 마차를 밀던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더는 마차가 못 갈 듯하구나.”
그들이 바라보는 협로의 끝자락에는 길은 있되 마차가 지나갈 만큼 평탄하지 않았다. 아까까지의 흙바닥과는 달리 크고 작은 돌들이 길에 가득히 널려 있었다.
“어쩌죠?”
“음…….”
아들의 물음에 우등이 미간을 찌푸렸다.
멀지 않았다.
이제 언덕만 넘으면 신강이었다.
무시무시한 마교의 무인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넋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일단 등에 나누어 메도록 하자.”
“예.”
“저도 멜게요.”
마차 위의 짐을 풀어내는 손길에 여인이 다가와 한 짐을 거들려 했다. 사내의 부인이었다.
“아니야. 자네는 애들이나 돌보면 족하네.”
우등이 고개를 저으며 짐에 닿은 부인, 향란의 손길을 부드럽게 물렸다.
“아버지, 그럼 제가 들게요.”
“…….”
어미의 손을 잡은 예닐곱의 꼬마 아이가 고사리손을 내밀어 제 몸만 한 짐을 잡았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우등이 눈을 휘어 웃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삼아.”
“예?”
“짐은 아비와 형이 들도록 하마. 남은 짐은 말에 실으면 된다. 그러니 너는 네 어미와 동생을 지켜 주거라.”
“엄마를요?”
“그래. 이제 너도 다 컸으니 할 수 있지?”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예!”
일곱……. 뭘 하는 것도 힘들 만큼 어리디어린 나이였으나 우등은 그 대답이 기특했던지 둘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짐을 메고 일어났다.
“자, 가자. 서둘러 신강으로 넘어가 거처할 곳을 찾아보자꾸나. 괜스레 날이 저물어 짐승들이라도 나타나면 곤란하니.”
“예!”
가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힘들고 불안해도, 혹은 자신의 힘이 못 미치는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가족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낼 수 있기에…….
아비의 환한 미소에 어미의 품 안에 안긴 젖먹이조차 생글거리며 웃으니 어찌 힘들어도 얼굴을 찌푸릴까?
하지만 때로 시련은 사람이 이겨 낼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찾아올 때도 있는 법이었다.
막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보이기 시작한 검은 옷의 인물.
순간 우등과 그 식솔들이 얼어붙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이전에 없던 불안감에 우등이 식솔들을 보호하듯이 앞으로 나서며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눈앞의 인물을 주시했다.
검은 옷의 인물은 무척이나 창백한 피부에 깡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은 둘째 치고 피부가 너무 창백해서인지 살결 아래 푸른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거 참 희한하네…….”
“…….”
고작 한마디였음에도 섬뜩함이 들게 하는 얇은 목소리는 여인의 그것이 분명한데, 외양은 사내가 분명하니 이래저래 요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우등은 비로소 깨달았다.
흰자위의 구분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은 새카만 눈동자.
마교인이다.
이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마교인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등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
납작 엎드린 우등이 대뜸 외쳤다.
화전민에 불과한 그가 무슨 힘이 있어서 마교의 악마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한단 말인가?
일단은 빌어야 했다. 가진 것을 달라면 모두 주어야 했다. 그것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흐음……. 분명히 그냥 무지렁이 촌놈인데…….”
고개를 처박고 있는 우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흑안의 마교인이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다.
“혹시 말이다.”
“……예?”
부드러운 마교인의 음성에 우등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헉!”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아 있는 마교인의 모습에 우등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놀라긴. 그보다 하나 묻자꾸나.”
“……마, 말씀하십시오.”
“오면서 다른 이들은 못 봤니?”
“…….”
다른 이?
우등은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까마귀 떼 외에는 본 것이 없었다.
“어, 없었습니다.”
“없어?”
“예. 아무것도…….”
“흐흠, 거참.”
“…….”
“이놈들이 낮잠이라도 처자고 있는 건가?”
언짢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교인의 모습에 우등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쉴 새 없이 마른침을 집어삼킨다.
“뭐, 어찌 되었든…… 못 보았다니 어쩔 수 없구나.”
“…….”
마교인이 히죽 웃으며 일어나 우등과 그 식솔을 지나쳐 걸었다.
아, 그저 누군가를 찾는 중이었나?
우등은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잔혹하다는 마교인을 만났으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감사합니다!”
우등은 크게 외쳤다.
살았다는 것이 너무도 감격스러웠기에, 가족들이 모두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뭐가?”
“……예?”
“뭐가 고맙냐고.”
흑안의 마교인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살려…… 주셔서…….”
“누가?”
“…….”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
마교인의 미소가 진해지고, 잠시 후 우등의 좌우에 있던 바위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음, 저놈은 커서 안 되겠고……. 저기 어린 녀석 둘만 챙겨. 훈련소에 집어넣으면 딱 좋을 나이니까. 나머진 죽여라. 쓸모없어.”
마교인의 말에 나타난 이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우등과 그 식솔들을 향해 다가왔다.
“으으…….”
우등은 필사적으로 겁에 질린 가족들을 제 팔 안으로 모아 부둥켜안았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자, 그럼 제 할 일 안 하고 낮잠이나 자는 놈들 모가지나 따러 가 볼까?”
우등 일가의 죽음을 머릿속에 그린 마교인이 몸을 돌려 걷는데, 그의 앞에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응? 이건 또 뭐야? 이번엔…… 무림인이네? 이것들이 정말 미쳤나.”
마교인의 미간이 깊이 찡그려졌다.
대충 약관 언저리로 보이는 나이에 헝클어진 머리, 검은 피풍의로 몸을 감싼 사내.
어깨에 검을 대충 걸친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금도 괴리감이 들지 않는다.
잠깐만, 근데 언제부터 걸어온 거지?
우등의 가족들이야 그렇다 치고, 뒤에 누군가 뒤따르고 있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마교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야, 너! 거기 서!”
“…….”
마교인의 말에 다가오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쳐 온다.
무언가 의아한 표정.
“너 뭐야? 너도 오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거야?”
“…….”
마교인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자식이,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마교인의 짜증 섞인 다그침에 사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었냐?”
“……뭐?”
“생겨 먹은 것하고는……. 사람 아닌 줄 알았다. 목소리는 뭔 내시처럼 앵앵거리지를 않나, 몸도 어지간히 비쩍 곯은 게……. 마교 놈들이 꼬추 없다고 밥도 안 주디?”
“…….”
순간 마교인은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 생소하게 주둥이를 터는 놈은?
마교인의 이름은 추성균.
마교 육동천 소속의 무인으로 청해와 곤륜의 경계를 지키는 관문의 수장이었다.
그가 이곳 협곡을 지켜 온 세월이 십 년이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가끔 관문을 넘어오는 이들이 있기는 있었다.
마지막 방문객이 언제였더라, 몇 해 전인 것 같은데…….
어쨌든 자신이 기억하기로 겁 없이 마교의 영역을 넘어온 이들의 운명은 딱 두 가지뿐이다.
살려 달라 빌며 죽든가, 덤비다 죽든가.
근데 이놈은 대체?
“뭘 꼬나봐, 이 새끼야. 비켜, 길 처막지 말고.”
“…….”
미친놈이 갈수록 가관이다.
마교의 땅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당당한 놈은 처음 본다.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말하다니.
매우 신박한 반응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추성균의 입가에 어느 순간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쪼개? 웃기냐 이 새끼야?”
그의 반응에 사내가 양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눈을 부라린다.
“하아, 별…….”
추성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신박함에 속아 잠시 머뭇거렸다. 수하들을 시켜서 그냥 죽여 버려야지. 귀찮기만 한 벌레 같은 것들.
“얘들아! 이것부터 치우…….”
추성균은 고개를 돌려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려다 기괴한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이런 씨발 것들이 어디 감히 길을 처막고 있어?”
“약하군.”
“에라, 이 새끼들은 돈도 없네.”
욕하며 피 묻은 비수를 혀로 핥고 있는 곱상한 어린놈,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멀대 같은 놈, 그리고 죽은 시신의 품을 뒤지는…… 거지새끼?
“개방?”
추성균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른 두 놈은 그렇다 치고 거지라고? 그리고 대체 언제 자신의 뒤에……. 느끼지도 못했는데?
추성균이 익숙지 않은 상황에 다시금 멍한 표정을 짓는데 싸가지 없이 주둥이를 털던 사내가 그의 옆을 지나가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각출아, 그러게 옷 갈아입으랬잖아. 너 때문에 신분이 금세 들킨다고.”
“하, 하지만 이 옷은 개방의…….”
“토 다냐? 맞을래?”
사내가 주먹을 움켜쥐고 슬쩍 들어 올리자 각출이 번개 같은 속도로 죽은 마교인의 옷을 벗겨 걸쳤다.
“네놈은 대체…….”
추성균의 물음에 사내, 진무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긴 관문이나 지키는 네놈이 내 얼굴을 어찌 알겠냐.
본명은 좀 그렇고……. 그래, 전에 천웅방에서 사용했던 가명.
“나? 무진.”
“무진?”
“앞으로 이 마교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
그 말에 진무를 멍하니 바라보던 추성균의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이런 미친놈이!”
파학!
동시에 추성균이 강맹한 마기가 담긴 주먹을 거칠게 뻗어 내었다.
이건 뭐, 상대하기도 허접하네. 검은 쓸 필요도 없겠다.
작게 한숨을 내쉰 진무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파리 쫓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