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32
332화
진무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충성을 맹세한 뒤로 일환이 알아서 약강지부를 빠르게 통제해 나갔기 때문이다.
진무는 당장에라도 인접한 육동천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일환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극구 만류했다.
전에는 맞을까 봐 눈도 못 마주치던 게 수하가 되더니 제법 직언도 할 줄 안다.
또한, 일환이 신분을 절대로 드러내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진무는 늘 써 온 가명, 무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역시 인복이 있는 건가?
적생도 그렇고, 일환도 그렇고 아주 쓸 만하다.
“…….”
진무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심각하게 논의를 하고 있던 황신과 아이들이 그를 쳐다본다.
대충 들어 보니 각출이 서열 정하기를 다시 요청했고, 타구봉법의 위력에 위기감을 느낀 황신과 소동보가 한사코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진무가 계속 응시하고 있자 소동보가 대표로 물어 왔다.
시킬 일?
묻지 말고 알아서 좀 해라, 이 수동적인 자식들아.
이제 막 부하로 삼은 일환도 저리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어?
하등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
“니들도 놀지만 말고 가서 정보 좀 모아 와라.”
“…….”
놀다니!
이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천주는 지금 모른다.
자신들의 운명이 걸린 일을 폄하하는 말에 황신과 아이들이 발끈할 뻔했지만…….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소동보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일단은 육동천과 칠동천 무인들의 불만과 욕망에 대한 내용이 필요해.”
“…….”
“그들을 규합하자면 마음부터 얻어야 할 것 아냐?”
“……알겠습니다. 곧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명을 받은 황신과 아이들은 반문 한번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노는 애들은 일을 시켰고, 이제 뭘 한다?
누가 뭐라도 시켜 주면 좋을 텐데. 애들 보내지 말고 쌈질이나 시켜놓고 구경할 걸 그랬나.
진무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우등과 그 큰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은공, 아침밥이 준비되었습니다.”
“…….”
우등, 때 빼고 광내더니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그 아들도 마찬가지고.
다들 무슨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등 가족은 여전히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우등은 진무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돌보는 집사, 뭐 그딴 직함을 받았고, 그의 안사람 향란은 시비들을 총괄하는 내당총녀가 되었단다.
작은아들은 약강에서 제일가는 학자를 초빙하여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젖먹이에게는 별도의 유모가 붙었다.
다들 아주 팔자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생활은 어때?”
“……좋습니다. 모두가 은공의 덕택입니다.”
우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보고 있자니 참, 마음이 다 훈훈해질 정도로 순박한 미소다.
하긴 화전민으로 살아온 그가 언감생심 이런 삶을 꿈꾸어 보기나 했을까? 그저 부러워하고 말았겠지.
뭐, 어쨌든 다행이다.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본 수많은 이 중 한 가족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되어서.
“어려웠던 마음 잊지 말아. 그래야 변하지 않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등의 대답에 진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모든 것이 위대하신 나 때문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넌, 동생처럼 글공부는 안 해?”
“글공부는 어린 동생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아버님을 도와 은공께서 머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을 생각입니다.”
“…….”
진무가 소년을 흐뭇한 눈길로 응시했다.
우등의 큰아들.
진무가 기억하는 것은 사막을 지날 때였다.
무공을 익힌 황신과 아이들조차 힘에 겨워하는 길을 힘든 내색조차 없이 묵묵히 걷고 또 걸으며, 와중에 동생까지 챙기던 모습.
사람이 극한에 이르면 본성이 나오는 법인데 타고난 성정이 좋다.
그것은 꾸민다고 꾸며지는 것이 아니었다.
“몇 살이지?”
“열다섯입니다.”
“이름은?”
“우양진입니다.”
열다섯, 무언가를 익히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심심하던 차에 뭔가 잘되었다 싶었다.
“제법 쓸 만하게 생겼네. 이리 와 봐.”
“……예?”
진무의 손길에 우양진과 우등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
갑자기 아들의 앞을 막고 경계하는 우등과 그 뒤에서 약간의 두려움으로 진무를 바라보는 우양진.
어째 모양새가…….
야! 설마 니들 나를 막 그 어린아이들에게 몹쓸 짓이나 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냐?
이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진무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후욱!
진무가 뿌린 경기에 우양진이 힘없이 끌려와 손에 잡혀 버렸다.
“으, 은공! 어찌 이러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
우등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엎드려 고한다.
맞네, 맞아. 그렇게 봤네.
아…… 이 망할 자식……. 그냥 죽여 버릴까?
심지어 진무가 우양진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몸 이곳저곳을 더듬기까지 하자 고개를 살짝 들어 그 광경을 본 우등의 눈에는 급기야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오해는 둘째 치고…… 허, 이건 뭐야?
우등이 울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더듬거리던 진무의 얼굴이 어느 순간 심각하게 변하더니, 손길이 점점 더 분주해지고 세밀해졌다.
이 자식, 화전민 아들이 뭐가 이렇게 근골이 좋아?
딱히 하늘이 내린 체질 따위를 타고난 것은 아니다.
대신에 후천적인 강골(强骨)이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정갈하고 바른 호흡이라니.
산속에서 좋은 공기만 처먹어서 그런가? 기혈이 뭐 이리 깨끗해?
어쩐지 사막에서 잘 지치지 않더라니……. 도대체 그 가난한 화전민촌에서 뭘 처먹고 살았길래.
우양진의 골격에 이어 기경팔맥까지 샅샅이 뒤져 본 진무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와, 이거 복 받은 놈이네.
이 정도면 강골을 넘어 완벽한 무골(武骨)인데?
마지막까지 놀란 표정을 유지하던 진무의 손이 멈추자 우양진이 급히 도망쳐 우등의 뒤로 숨는다.
은혜를 입은 터라 도망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진무는 그런 우양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화전민으로 돌아가면 곧 기혈이 막혀 아무것도 아닌 민초가 될 소년.
하지만 누군가 길을 열어 주기만 한다면 언젠가 중원을 호령할 수 있을 만큼의 뛰어난 근골을 가진 기재.
이상하게 탐이 난다.
팔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군가를 가르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사패오왕은 물론 천재성을 가진 청상도, 우직함을 가진 청우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마음이었다.
이것도 탐욕의 일종일까?
그런데 저놈은 글도 모른다 하고……. 혹시나 천우명이나 청우처럼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면 어쩌지?
짓다 만 밥이 되어 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뭐, 내가 천우명도 강의 고수로 키워 낸 사람이다, 이거야. 머리가 이해를 못 하면 몸이 이해하게 만들면 되는 게지.
결정을 내린 진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돈다.
“어이, 우등.”
“……예?”
“자네 아들…… 날 주게.”
“……!”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우등이 식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등 뒤로 아들을 감춘다.
대체 뭘 상상하고 있는 거냐? 그만해, 제발.
진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우등의 뒤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양진이 입술을 한 번 꼭 물더니 자신을 붙잡은 팔을 뿌리친다.
“양진아!”
“……전 괜찮습니다. 어차피 은공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우리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양진아…….”
“걱정 마세요. 죽기야 하겠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제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들 논다.
뭘 울고 뭘 달래. 어처구니가 없으려니까, 진짜.
한참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가 천천히 다가와 진무의 앞에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는 소년, 우양진.
심중의 고민을 모두 떨친 듯 굳은 결의마저 드러내는 그 표정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은공, 도시의 부호들이 가진 은밀한 취미에 대해 건너 건너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눈을 똑바로 맞춰 오는 우양진의 모습에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니 대체 열다섯 소년이 저런 결심을 하게 만든 부호 놈들은 대체 어떤 자식들이지?
감히 이 건전한 나를 상대로 저딴 오해나 가지게 만들다니. 나중에 하나씩 찾아내서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은공, 제게 무엇을 바라시든 저는 절대로 원망치 않을 것입니다. 늘 감사하고 복종하겠…….”
딱!
“악!”
우양진의 머리에 진무의 꿀밤이 떨어졌다.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우양진은 물론, 우등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골이 제법 쓸 만해 보이는데, 어때? 내게 맡겨 보는 게?”
“……그, 맡기라 하심은?”
“뭐, 제자로 삼아 볼까 하고.”
한 박자 늦게 진무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우등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제자라고? 자기 아들이 저 대단한 무인의 제자라고?
우등이 감격한 표정으로 납작 엎드렸다.
“으, 은공!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화전민 주제에 문자 쓰기는.
그리고 백골이 흙이 되면 죽은 건데 어떻게 은혜를 안 잊나, 이 사람아.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배가 고프군. 식사는 이곳으로 가져오도록 하지.”
“예! 은공!”
우등이 대답과 동시에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우양진은 난데없이 자신에게 찾아든 기연이 영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이거…… 청우나 우명보다 멍청한 건 아니겠지? 그럼 꽤 골치 아파지는데…….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의 입가에 잠시 쓴웃음이 어렸다.
* * *
약강지부에 머무른 지 열흘째.
소일거리 삼아 가르치기 시작한 우양진에게서 제법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 때쯤, 일환이 찾아왔다.
“주군.”
이젠 아예 충성을 호칭으로 드러낸다.
“어, 왔나?”
“예. 저 소년, 아니 소공자를 수련시키는 중이셨군요.”
일환이 무거운 추 두 개를 손목에 달고 마보 자세를 취한 채 땀을 뻘뻘 흘려 대고 있는 우양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공자.
진무의 호칭이 바뀐 것처럼 우양진에 대한 대접도 변해 있었다.
“대단하군요. 이제 막 입문한 소년이 저 큰 철구를 묶고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다니.”
“대단은 무슨. 기초를 쌓으려면 아직 멀었어.”
기초가 제법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괴물의 제자가 되었다 하니 알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엄청난 무인이 될 터인데.
“그 세 분…… 그러니까 호위, 전령, 제……자께선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뭣 좀 알아보라고 보냈어. 마교를 얻을 생각인데 마교를 몰라서야 쓰겠나.”
“저런, 제게 물으시지 않고요.”
“바쁜데 뭐 하러.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어쩐 일이야?”
“아, 중간 사항을 보고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
“현재 칠동천의 세력은 거의 규합이 끝났습니다.”
“호오? 그렇게 빨리?”
“빠를 것도 없습니다. 이미 대부분 육동천에 넘어가 버린 터라 남아 있는 세력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래?”
“예. 문제는 쓸 만한 무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상관없어.”
진무의 대답에 일환이 의아함을 머금는다.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육동천이 알아서 우리 대신 규합해 줬을 테니까.”
“…….”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괴뢰만 잡으면 육동천과 칠동천이 한 번에 우리 손에 떨어지지 않겠냐, 이 말이야.”
“……아!”
하긴 그렇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일환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곳이기에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육동천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고, 괴뢰는 그리 호락호락한 무인이 아니었다.
“괴뢰를 쓰러뜨리자면 저들의 방어벽부터 뚫어야 합니다. 꽤 많은 고수가 포진하고 있기에……. 주군이야 걱정되지 않으나 괴뢰와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아군의 희생이 많을까 걱정입니다.”
“흠, 그쪽에서도 약강이 내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칠동천의 잔당을 흡수하는 동안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서 따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잘되었군.”
“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육동천을 먹을 수 있겠어.”
“……?”
일환은 도무지 진무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괴뢰를 잡으려면 육동천 나포박의 중심에 위치한 그를 찾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전투는 필수적으로 일어날 일이었다.
“전쟁이란 건 말이야. 무조건 힘 싸움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주어진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도 알아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잊었어? 우리가 이곳 약강지부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 말씀은 혹시?”
짚이는 바가 있는 것인지 일환의 표정이 밝아지자 진무가 음흉하게 웃었다.
“설마하니 집에 돌아온 자식새끼에게 칼이야 들이밀겠어?”
“아!”
“자, 그럼 계획은 나왔고. 무인들을 소집해. 많을 필요 없어. 대충 돌아가는 것으로 꾸미자고.”
“알겠습니다, 주군!”
일환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자, 그럼 출발해 보자고.
돌아온 자식새끼 때문에 육동천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칠 아비 놈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