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40
340화
“거기! 빨리 실어라!”
“예!”
“어허, 이놈들아, 그러다 해 지겠다!”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가마니 하나를 성큼 들어 올려 마차에 실었다.
“아이구, 대행수님. 어찌 직접 물건을 나르십니까요.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상단주님. 내 암치도 않소. 오히려 바람이 찬데 상단주께서 직접 나와 고생이시니 고뿔이나 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또 먼 길을 가시려면 잘 쉬어 두셔야 할 것인데…….”
“한참이나 어린 제가 고생이라니요. 괜찮습니다. 자, 짐도 얼추 다 실은 듯하니 뜨끈하게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비단 장삼의 상인, 유장이 술이 가득 담긴 바가지를 내밀자 노인이 단숨에 비워 내며 다른 손으로 굵은 땀방울을 훔쳤다.
“밤새 많이 힘드셨을 터인데, 마무리는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잠시 쉬십시오.”
“힘이 들다니요?”
“…….”
“거 무슨 섭섭한 소립니까? 내 살면서 이리 힘이 넘친 적이 없었소이다.”
“그렇습니까?”
“암요. 다들 한마음일 겝니다. 자식 놈들이고 손주 놈들이고 배불리 먹이고 등 따습게 재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힘들다 하겠습니까?”
노인의 말에 유장이 빙긋이 웃는다.
그는 나포박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홍진이라는 상인이었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이루어지는 타 지역과의 교역 외에는 할 일이 없었던 터.
일을 할수록 손해이니 아들에게 물려주지도 못하고, 그저 손 놓고 망해 가는 상단을 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오늘이 더없이 좋았다.
사시사철 요즘 같기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마음은 모두가 똑같지 않을까?
육동천과 산서상회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낡고 부서진 마차를 수리하고, 짐을 고정할 새끼줄을 쉼 없이 꼬아야 했다.
그뿐인가? 손님이 늘어나니 파리나 쫓던 객점에 요리하는 칼질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술도가에서는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술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누룩을 떠야만 했다.
긴 잠을 자고 있던 장사꾼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객점과 주루가 취객들로 붐비어 불야성을 이뤘다.
돈이 돌고 사람이 넘쳐 나니 힘없이 죽어 가던 나포박의 거리에 생동감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벌써 토성 밖에 이주해 온 이들이 늘면서 집을 짓는 목수들의 망치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터다.
나홍진과 유장이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환담을 하던 와중이었다.
“아얏!”
당과를 손에 쥐고 상단의 마차 주변을 뛰어다니던 아이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으아앙!”
해진 명주옷 무릎이 까져 피가 철철 넘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싶더니 흙 묻은 당과를 보자마자 와락 울음을 터트린다.
무릎의 상처보다 아비를 졸라 얻어 낸 당과가 못 먹게 된 것이 더욱 서러운 모양이었다.
“아이구, 이놈아!”
아이가 당과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모습에 나홍진이 술 바가지를 놓고 급히 뛰어갔다.
“버려라. 탈이라도 나면 어찌하려고 그걸 털어 먹으려 해?”
“안 돼요! 아깝단 말이에요.”
“…….”
하긴, 아이들이 손에 당과를 쥐고 뛰어다니던 것이 언제였던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당과를 사수하려는 듯이 제 품에 꼭 끌어안는 아이의 모습에 나홍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품 안에서 전낭을 꺼냈다.
“옜다.”
“…….”
손을 활짝 펼친 나홍진의 손에 놓인 철전.
“그건 버리고, 이 돈으로 새것을 사 먹거라.”
“……예?”
아이가 귀여운 눈을 깜빡이며 나홍진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아, 니들도 이리 오너라.”
나홍진의 외침에 사방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자, 싸우지들 말고 하나씩 받거라. 당과를 사 먹든 다른 것을 사든 알아서 하고.”
“예! 할아부지!”
혹여 마음이 바뀔세라 아이들이 나홍진의 손에서 철전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달음질했다.
“원 녀석들하곤. 저리 좋을까?”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미소에 더욱 흥이 오른 나홍진이 유장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는 아이들입니까?”
“어찌 모르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나포박에 사는 아이들이겠지요.”
“……?”
“헛헛, 어떻습니까?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습니다. 이제는 이리 아이들에게 당과를 사 주고도 전낭이 가득하니 어찌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나홍진의 말에 유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 베풀고자 해도 여유가 없으니 행할 수 없었는데, 이제 여유가 생기니 나눔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마교의 사람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중원의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마교의 무인들의 모습뿐이다.
무섭고 잔인하며 인간의 감정조차 사라진 살인귀들.
하지만 마교의 영역 안에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은 중원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상단주님께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제게요?”
“암요. 내 어찌 모르겠소? 중원이 우리와 거래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을.”
“…….”
“용단을 내려 주어 감사드리오. 나뿐 아니라, 우리 나포박의 사람들이 전부 같은 마음일 게요.”
나홍진의 말에 유장이 빙긋이 웃는다.
“대행수님. 저는 그저 상인입니다.”
“……?”
“용단을 내린 것은 새로 부임하신 동천주님이십니다.”
“암요. 내 어찌 그분의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
“그동안 과중했던 세금도 받지 않겠다 하시고, 늘상 행해졌던 수탈도 금하셨지요. 이제는 벌어들인 돈의 일부에서 수수료만 내면 된다고 하니……. 헛헛,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언 놈이고 그분을 욕하는 놈이 있으면 아마 거리에서 맞아 죽을 겝니다.”
나홍진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면서 소리를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상단주님께서는 그분과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인연이라…….”
유장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서상회를 맡게 된 이후 장사 영역을 넓히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마교와의 독점 거래라니, 누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진무,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무공이 뛰어난 젊은 무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정무맹 전역에 이름을 떨친 영웅이 되고, 사패천주가 되더니 이제는 그 이름을 마교에까지 확장하고 있었다.
본인이 예상한 것은 아니겠으나 무인뿐 아니라 민초들에게까지 마음 깊이 신뢰를 받는 인물.
대관절 중원 무림의 역사에 이런 업적을 세운 이가 또 누가 있을까?
감숙성의 작은 상단을 운영하던 자신이 이제는 산서상회라는 중원의 거대 상단의 주인이 되었다.
진무, 그를 만난 이후부터 인생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그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기대마저 생긴다.
“자, 대충 물건도 정리된 듯하니 이걸로 일꾼들과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유장이 품에서 묵직한 전낭을 나홍진에게 건넸다.
“아이구! 상단주님. 이미 대금을 전부 치르시고는…….”
“사양치 마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뇌물입니다.”
“어헛헛, 알았소, 알았소. 내 오늘 덕에 상단 대행수 이름값 좀 하겠구려.”
전낭을 공손하게 받아 든 나홍진이 일을 마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모습에 유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나포박, 육동천의 대전각.
마령대의 무인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주변을 노려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
“누구냐!”
초롱을 들고 어둠을 밝히며 다가오는 인물의 모습에 경계조장을 맡은 마령대의 조장, 춘길이 매섭게 고함치며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산서상회의 유장이오.”
“아, 상단주님!”
유장이 신분을 밝히자 춘길이 반색하며 칼을 놓았다.
유장에 대한 인식은 육동천 무인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방문 이후로 식사의 질과 무기, 무복까지 고급지게 바뀌었는데 더 말해서 무엇할까?
유장은 현 육동천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내일 떠나야 할 참이라 천주님을 뵈러 왔소.”
“그러시군요. 흠…….”
유장의 말에 춘길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왜? 무슨 일이 있소?”
“그게 아니라……. 실은 동천주님과 수뇌들께서 중한 회의 중이십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기에.”
“그랬군요. 어쩐다. 몇 가지 말씀드릴 것도 있었는데…….”
고개를 주억거린 유장이 몸을 돌리려 하자 춘길이 급히 그를 붙잡았다.
“상단주님.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일단은 제가 들어가서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암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단주님이신데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
유장의 걸음을 멈춘 춘길이 안쪽을 향해 날 듯이 뛰어 들어갔다.
* * *
“아이구, 상단주님. 쉬지 않으시고요.”
“아, 수석장로님.”
막 회의가 끝난 참인지 밖으로 나오던 목소산이 유장을 발견하고 버선발로 뛰어와 인사를 건넸다.
“동천주님을 뵈러 오셨다고요?”
“예.”
“하면 같이 들어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회의로 피곤하실 터인데.”
“피곤하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산서상회와 육동천 거래를 총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응당 제가 모셔야지요.”
“하하, 알겠습니다. 같이 들어가시지요.”
목소산의 안내를 받은 유장을 향해 대전각을 나오는 장로들이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왔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저 무서운 마교의 쟁쟁한 무인들이 자신을 이리도 친근하게 대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마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말해 줘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대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황신과 소동보.
그리고 전임 천주였다가 진무의 부장이 된 괴뢰와 그 아들 괴충, 그리고 마령대주 일환.
제자로 삼았다는 우양진과 개방 거지 각출까지.
“어서 와.”
“천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일러둘 일이 있었는데 잘 왔어.”
“제게 일러두실 일이라고요?”
유장의 물음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 빠른 소동보가 급히 접었던 지도를 다시 펼쳤다.
“우린 이제 사동천을 칠 생각이야.”
“사동천이라면?”
“아무래도 상행이 수월하자면 청해보다는 감숙 쪽 관문이 더 편하지 않겠어?”
“흠, 그렇긴 합니다만.”
유장이 아직 안면을 튼 것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기존 마교 무인들을 힐끗 보며 눈치를 살핀다.
“왜? 무슨 문제 있어?”
“…….”
“괜찮아. 저들도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해 봐.”
“예.”
진무가 안심시키자 유장이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너무 시기상조가 아닙니까? 듣기로 칠동천과 육동천의 전력을 합한다고 해도 사동천에 미치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유장의 말에 괴뢰를 비롯한 마교 무인들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고작 얼마 머물지도 않은 상인이 어찌 그런 것을 아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장은 그냥 상인이 아니다.
산서상회주 이전에 적생 휘하의 군사부 영보당 소속이었다.
그 역시 세를 읽고 분석하는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다.
물론 마교인들이야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주님께서 강하신 것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인데요?”
“피해는 없을 거야. 사동천주가 알아서 내부를 비워 줄 테니까.”
“……?”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장은 진무의 싸움을 몇 번이나 보아 온 터였다.
그는 절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싸우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싸운다. 그것이 지리적 이점이든 전략적 이점이든 간에, 무조건 좋은 자리를 점한 뒤에 전쟁을 시작한다.
그런데 어찌?
감숙의 관문을 뚫기 위해 상대적으로 열세임을 알면서…… 잠깐, 감숙? 사동천주가 알아서 비워 준다고 한다면?
유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진무가 씩 웃는다.
눈치 빠른 놈이 벌써 대충의 전략을 알아챈 모양이다.
“이제 돌아가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대충…… 이해가 가는군요.”
“다음엔 좀 더 대규모로 상단을 꾸려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유장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켜보는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벅거렸다.
뭔가 지들끼리 이것저것 둘러 말하고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하는데…….
“수석장로님이 꽤 바빠지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제 곧 세 개 동천과의 거래를 총괄하셔야 할 터이니.”
“……?”
세 개 동천?
수뇌부의 회의에서도 무인대를 이끌 수좌와 각자가 맡아야 할 지역만 나눈 터였는데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데…….
와중에 일환도 대충 이해한 느낌이었다.
상인도 아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진무가 ‘각출아’하고 부르면 큰일이 아니던가?
이럴 땐 그저…….
“핫핫핫!”
“허허허!”
“과연!”
웃으면서 아는 척이나 하는 수밖에.
진무는 그런 괴뢰, 괴충, 목소산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것들 왜 웃지? 뭘 알기는 하고 처웃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