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58
358화
차분하게 검을 늘어뜨린 검혜가 고요한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주어 고맙군.”
“기다려? 누가 말인가?”
“……?”
“저 정도의 녀석들은 반나절의 거리가 떨어진다 해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
“광오하군.”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노인을 응시하는 검혜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짙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보다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감각이 뛰어난 그녀임에도 도무지 그 힘을 가늠할 수가 없다.
평소라면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추격대가 충분히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피윳!
가볍게 디딘 일보와 함께 검이 곧게 뻗는다.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백광을 머금은 검은 빛살처럼 빨랐다.
땅!
피식 웃은 노인이 가볍게 발을 들어 검면을 차 올림과 동시에 도약하더니 곧장 발길질을 해 왔다.
슈슉! 슉!
허공에서 채찍처럼 뻗어 오는 발은 검혜의 검이 닿지 못하는 곳을 교묘하게 노렸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이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탐색전이라는 것을 인지한 듯 공격에 무게를 싣고 있지 않았기에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짧은 공방을 주고받은 뒤 훌쩍 뒤로 물러난 검혜는 확신했다.
눈앞의 노인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허점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고, 수차례 이어진 그녀의 검격에도 뒷짐 진 손을 풀지 않았다.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수는 충분히 주고받은 셈.
생각을 정리한 검혜가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도 궁주……라는 자인가?”
“다 아는 처지에 감출 게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이궁주 노국태라고 한다.”
“이궁주…….”
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검을 나누어 볼 만한 상대로군. 나는…….”
“검혜 벽운영.”
“……!”
알고 있다고?
“정무칠성, 사패오왕, 마도육제. 그들에 대한 정보는 확보한 지 오래다. 너희가 사용하는 무공, 내공 수위, 깨달음의 경지까지.”
“…….”
“또한, 너의 비검(飛劍)이 일천 마리 해조의 날개를 베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노인의 말에 검혜가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중원으로 오기 직전에 이룩한 경지였거늘, 그걸 어찌?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이다. 보타문 내부에 첩자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놈들, 감히 보타문에 사람을 심었던 것이냐?”
“뭐 그리 놀랄 일인가? 정무칠성의 한 사람인 자네는 요주의 인물. 보타문에 눈과 귀를 심어 둔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는 쓸모없게 되었다만, 연락은 지속적으로 주고받고 있지.”
망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깨달은 검혜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이봐, 검혜. 지금 자네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뭐?”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자네 앞에 당당하게 홀로 나선 나라는 사람에 대해 걱정해야 하지 않겠나?”
“…….”
여유작작한 노국태의 태도에 검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옳은 말이다.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나섰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추격대에게 도망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 보려 했던 생각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자신을 낱낱이 알지만, 자신은 그에 관한 어떠한 패도 손에 쥐지 못한 상황.
“자,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났으면 시작하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무릎을 꿇어 줬으면 좋겠고.”
“…….”
명백히 자신을 아래로 깔아 보는 말에 검혜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 내가 무시를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
“무릎을 꿇으라니…… 이 내게 말이야.”
“…….”
“비검을 파악했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늘어뜨렸던 검이 천천히 위로 오른다.
하단을 지나 중단, 그리고 상단에 이르러 하늘을 향해 곧게 떠오르는 순간.
검을 놓았던 그녀의 양손이 합장하듯 모여 위로 들렸다가 좌우를 향해 원을 그리며 내려왔다.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다시 넷으로 나뉘니, 이내 무수한 손들이 광배(光背)처럼 그녀의 몸 주위에 자리 잡는다.
한차례 깊게 감았다 뜬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신광이 이내 전신으로 퍼졌다. 찬연한 광휘로 온몸을 에두른 그녀는 마치 육관음의 하나인 천수관음처럼 보였다.
보타문은 속가이되 불가의 한 갈래.
원을 그리고 돌아온 검혜의 손이 명치에서 겹쳐 인(印)을 만들어 내자 불기를 담은 그녀의 살갗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우우우웅!
은은하게 퍼진 기운은 바람 없는 수면처럼 잔잔했고, 차디찬 한기 대신 따뜻함을 가득히 머금고 있었다.
천 개의 칼날을 잡은 천 개의 손.
비검, 천수관음(千手觀音).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알지언정 겉만 보았을 뿐 속을 보진 못했을 터. 시간을 끄는 것은 아무런 효용이 없으니 전력을 다해 일거에 적을 말살한다.
우우웅!
농밀하게 중첩된 기운이 스스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극의에 다다른 그 불기가 잔잔함을 버리고 터져 버릴 듯한 폭풍을 담았다.
단 일 합의 승부.
비록 살계는 불가의 금기이나 그는 짐승의 무리.
한 번의 살계를 열어 만민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불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이리라.
결심은 하였으되 어디까지나 신중해야 할 일. 그러니 육안을 버리고 심안으로 볼 것이다.
검혜가 눈을 감는다.
사방을 환히 비추던 신광이 사라지고 인을 맺었던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뻗어 나갔다.
쿠우우우.
느린 손짓에 대기가 밀려 나가고 주변의 숲이 일제히 몸을 누인다.
이내 세상을 가득 메웠던 천 개의 칼날이 검극을 세워 노국태를 향해 황금빛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천 개의 금빛 강기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금빛 섬전의 향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국태가 뒷짐을 지었던 손을 풀어 펼쳤다.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군. 무릎을 꿇으라던 것은…… 너를 살려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걸레 조각 같은 넝마가 아니라.”
한 발을 앞으로 쭉 빼서 밟고 양손을 뒤로 뻗는 노국태.
종려군, 상관평, 송여방과 함께 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
끌어 올린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휘말아 오르고, 힘이 실린 발바닥이 땅바닥을 짓누른다.
뒤로 뻗은 손에도 기운이 둥글게 뭉치더니 이내 방패처럼 거대해져 앞으로 돌아오는 손길을 따라 그의 몸을 가렸다.
콰아아아앙!
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가 충돌한 지점에서 발생한 폭발이 사방을 뒤흔들고 숲을 집어삼켰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여기저기 비산해 오르고 대지가 황폐해진다.
폭발이 만든 먼지 폭풍이 사위를 잠식했다.
격돌은 단 한 번뿐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두 번이라는 것은 없었다.
검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고, 노국태는 피하지도 물러나지도 않았으니까.
휘오오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먼지를 걷어 내고 이 싸움의 결말을 알렸다.
“크윽…….”
넝마가 되어 버린 의복.
전신 곳곳에 상처를 입은 노국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과연…… 천 개로 나누었음에도 무거움은 그대로인가?”
검혜의 비검은 달랐다.
하나를 나누어 둘이 되면 그 안에 담긴 힘 또한 약해지기 마련인데, 모든 검에 담긴 힘이 처음 하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첩자는 모든 것을 보았으되 그 속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막지 못한 다섯 개의 섬광에 몸이 뚫려 버렸다. 사혈은 피했으나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운 노국태가 한 곳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토해 낸 검혜가 힘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죽일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지금과 같은 상처도 입지 않았을 테니까.
“이궁주님!”
꺼져 가는 촛불처럼 숨을 할딱이는 검혜를 바라보던 노국태의 곁으로 묵검대의 무인들이 합류했다.
“살려라. 소궁주님께 바칠 제물이다.”
“예!”
“놈들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각쯤 지체되었으니 곧장 추격하라. 나는 잠시 몸을 추스른 뒤에 따르겠다.”
“예!”
무인 두엇이 검혜의 몸을 수습하고, 나머지가 남쪽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 * *
쩌어엉!
설산을 뒤흔든 폭음.
“…….”
진무는 턱을 치켜들고 전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요 새끼들…….
양진과 북쪽으로 이동하며 삼동천의 영역까지 들어와 토끼 사냥의 참맛을 즐기던 진무는 예상치 못한 놈들과 맞닥뜨렸다.
처음엔 무슨 거대한 눈 폭풍이 밀려오는 줄만 알았다.
자세히 보니 토끼 떼였다.
설마 복수를 하러 온 건가?
신기하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위력만큼은 어마어마했다.
선기의 폭풍처럼 진무를 습격한 놈들의 반수 이상을 썰어 버리고 설산을 피로 물들인 끝에 나머지 절반의 토끼 떼와 저 대장 놈이 남았다.
수백 마리의 무리를 이끌고 찾아온, 몸집이 웬만한 늑대만큼이나 크고 푸른빛이 감도는 토끼.
토끼가 작고 귀여운 맛이 있어야지, 늑대만 한 크기가 웬 말이람?
와중에 시뻘건 눈과 고기 잘 뜯게 생긴 기다란 앞니, 사람 손가락만 한 발톱.
확실하다. 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이놈이 천산설묘의 대장이다.
귀하디귀한 천산설초를 열심히 처먹고 완전한 영물이 되어 버린 놈.
대체 천산설초를 얼마나 뜯어 먹었으면 저 정도 힘과 덩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겨우 토끼 주제에.
이 정도 힘이면 신강 짐승계의 제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하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북쪽으로 사냥을 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천산설초는 철저히 토끼들만의 밥이었다.
사슴이나 노루처럼 신분이 귀한 놈들은 그 쌉쌀함이 싫었던 것인지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아마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또한 천산설초를 향해 다가서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하는 것을 보면 토끼 놈들도 독식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양진을 줘 팰 정도의 힘을 얻은 것은 물론 대화까지 가능한 놈들이 좋은 걸 남 주려 할 리가 없겠지.
그리고 모든 토끼가 내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내단이 쌓이는 토끼는 극히 일부. 열 몇 마리가 전부였다.
아마도 개중 돌연변이 특성을 가진 놈들만 내단을 쌓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저 괴물 같은 놈은 돌연변이 중의 돌연변이겠지.
어쨌든 저만한 덩치와 털이 파랗다 못해 퍼렇게 빛날 정도로 막대한 양의 선기를 머금었다면?
“양진!”
“예!”
토끼 떼를 피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우양진이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머진 너 다 먹어라.”
“……?”
비지떡은 니가 먹어라.
나는 한 놈. 저 덩치 큰 대장 한 놈이면 충분하다.
잠시 인생관을 타협할 뻔했다. 티끌을 모아 다져 태산을 만들고 물방울을 모아 샘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한 방이다.
저 대장 새끼를 잡아서 단번에 육양진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진무는 희열과 탐욕으로 물든 눈동자를 빛냈다.
쓰읍.
혀를 쓸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진무가 곧장 토끼 대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다.
어서 오너라, 거대한 한 방이여.
내 너를 잡아 몸보신을 제대로 해야겠구나!
천산설묘의 대장 놈이 대단하긴 했으나 일찍이 모두에게 괴물로 평가받고 있는 진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태생이 토끼이기에 힘은 가지고 있었어도 싸울 줄 모른다.
귀엽기라도 했으면 머뭇거렸겠지. 근데 너는 아니다, 이 늑대만 한 징그러운 놈아.
몇 번의 공방이 이어진 끝에 질기기 짝이 없던 가죽이 벗겨지고 날카롭던 앞니가 부러졌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혼이 담긴 진무의 구타.
쿵짜작, 쿵뻑쩍.
가죽은 추운 날 바들바들 떠는 우리 양진이 옷 해 입히고.
단단한 발톱은 남김없이 뽑아내어 황신이랑 소동보 암기 삼으라고 던져 주고.
선기로 단련된 두툼한 넓적다리 뼈는 각출을 주자.
나는 그리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니 선기 충만한 내단 하나면 족하다.
얼씨구나 절씨구나.
과연 동해 용왕이 약해서 먹겠다고 별주부를 보냈다는 토끼로구나.
간처럼 내단을 바위에 말려 놓는다는 거짓말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고기에 가죽에 뼈에 내단까지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으니 알차기 한량없도다.
흥겨운 영물 구타 한마당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선기를 쌓아 어쩌면 신수(神獸)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를 천산설묘의 대장은 역사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종말을 고했다.
사람 중에서도 하필이면 그 악독하고, 기부심까지 투철한 진무를 만나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