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6
36화
취리릿!
가을빛을 닮은 푸른 검기가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았다.
구름을 타고 흐르듯이 유려하게 흘렀다가 천둥처럼 호쾌하게 떨어진다.
청상의 손에서 펼쳐지는 유운검법은 검기를 깨달은 이후로 훨씬 더 정교해져 있었다.
아, 망할.
그냥 가르쳐 주지 말걸.
“청상아.”
“예. 사숙!”
진무의 부름에 수련을 멈춘 청상이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
진무의 가르침으로 인해 현기의 경지에 도달했다. 이대제자들은 상대도 안 되고 일대제자와 비견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만약 진무를 만나지 못했다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허니 진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멧돼지.”
“예?”
“잡아 와.”
“아직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데요?”
그렇다.
아침을 먹은 지 아직 한 시진밖에 되지 않았다.
진무는 괜한 배가 아파 심술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은 강의 경지에 아직 올라서지 못했는데 저 자식은 말 한마디에 검기의 경지에 떡하니 올라서다니.
“익히려면 오래 걸려.”
“아,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청상은 군말 없이 수련을 멈추고 진무의 말에 따랐다.
“청우야, 가자.”
“아니! 너 혼자.”
“예?”
“혼자 가라고!”
진무가 신경질을 부렸지만.
‘아, 청우에게 수련 시간을 더 주려고 하시는구나. 사숙의 저런 마음 씀씀이란. 커다란 놈을 잡아 와서 사숙의 은혜에 작게나마 보답해야겠다.’
청상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산 아래 숲으로 달려갔다.
“청우야.”
“예! 사숙!”
청우는 청상 홀로 식사 거리를 준비하러 보내는 진무의 모습에 기대감을 품고 대답했다.
혹여 수련이라도 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무가 자신의 도포를 벗었다.
“깨끗이 빨아 와.”
“예?”
“핏자국 하나도 남지 않게.”
“……예.”
청상의 각혈이 선명히 남아 있는 도포였다.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하필이면 사형은 사숙 방향으로 각혈을 해서는…….’
청우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도포를 받아 들고 개울가로 뛰어갔다.
이러다가 점점 더 무공이 세지는 거 아냐, 설마? 내 자리를 위협하는 건 아니겠지?
자고로 대가리가 굵으면 말을 듣지 않는 법이다.
안 되겠어. 이놈의 자식들. 이제부터는 체력을 단련시켜야겠어.
진무가 이룩한 의기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무리 뛰어난 청상이라 해도 두 번의 벽을 더 경험해야 했다.
성취 빠른 청상이라고 해도 진무의 경지를 따라잡기는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무는 더욱 열심히 심법 수련을 해야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청우와 청상의 수련을 방해해야겠다 생각했다.
진무가 중얼거리며 모닥불을 만들 나무를 준비하는데 충허암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무야, 잘 지냈느냐?”
“어?”
장문인 명현과 장로들이었다.
이것들이 떼거지로 웬일이지?
“어쩐 일이세요?”
“이놈, 어쩐 일은. 아무리 근래에 바빠서 찾아오지 않았기로서니 섭섭하구나.”
명현이 샐쭉하게 눈을 뜨고는 진무를 흘겨보았다.
거짓말.
안 바빠도 잘 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그들의 방문은 언제나 귀찮기만 했으니까.
이번엔 또 뭘 뜯어 가려고.
“명진, 안에 있는가?”
“어서 오십시오. 사형.”
목소리를 들었음인지 명진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냥 들어가세.”
“예?”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할 말이라 하시면?”
“진무야. 너도 들어 오너라. 함께 들어야 할 일이니.”
“예.”
옆으로 비켜선 명진을 지나 장문인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진무가 뒤따랐다.
좁은 방 안에 장문인과 각 궁의 수장인 장로들, 명진과 진무까지 앉으니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 진짜. 쓸데없이.
그냥 밖에서 이야기하지.
“이번에 장로 회의를 통해 무너졌던 오룡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네.”
“오, 오룡궁을 말입니까?”
“그렇네.”
명현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명진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오룡궁(五龍宮).
충허암의 인근에 위치하였던 곳.
무당 팔궁 중 하나로 사패천주 혁련무강의 습격 때 불타 버린 곳이었다.
다른 팔궁이 그러하듯 오룡궁 또한 맡은 역할이 있었다.
본궁인 자소, 계율의 영은, 대외 협력의 우진, 단약을 제조하는 정동, 병장기를 취급하는 옥허, 내부 살림을 맡은 원화관.
그리고 오룡은 무당을 지키는 호법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룡궁을 무당의 ‘수호자’라 불렀다.
선대였던 현오가 궁주였고, 명진은 실무자였다.
그렇기에 명진은 다른 명자 배와는 달리 정사대전에 나서지 않고 무당에 남았고.
사패천주의 앞을 막아선 명진이 자소궁을 지켜 냈던 것이다.
“오룡궁을…… 오룡궁을 재건하다니. 생전에 다시는 못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룡궁이 무엇이기에?
진무는 명진의 눈동자에 어째서 습막이 차오르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허허, 이 사람. 그리도 좋은가?”
“좋지요. 좋고 말고요. 이제야 죽어 스승님을 뵐 면목이 생겼습니다. 진무가 있고, 청우와 청상이 있다 자랑도 하구요.”
어느새 명진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지 알 길은 없었으나, 스승의 눈물에 진무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씨,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어쨌든 스승이 저리도 기뻐하니 다행이었다.
“허나, 과거와는 좀 다를 것이네.”
“예?”
“나는 오룡궁이 앞으로 남암궁의 역할을 했으면 하네.”
“남암궁의 역할을요?”
“그렇네. 무당을 수호하는 것은 특정 궁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생각했네.”
“음.”
옳은 말이었다.
과거 오룡궁에만 맡겨 두고 모두가 싸움에 나섰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재건되는 오룡궁은 이름은 오룡궁이되 실질적으로는 남암궁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네.”
명진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슬쩍 진무를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룡궁이면 오룡궁이지 남암궁의 역할을 한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린지.
하여간 도사들의 머릿속은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자네가 오룡궁을 맡아 주게.”
“예? 하지만.”
명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당은 무가였다.
일궁의 주인은 응당 강해야 했고, 특히나 남암궁의 역할을 하는 오룡궁 주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자신이 궁주라니.
지금의 무당에 자신이 폐인이 되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보게, 명진.”
“…….”
“자네는 누구보다 강했던 무당의 제자였네. 그리고 이미 진무를 훌륭히 키워 내고 있지 않은가?”
뭐라냐? 알아서 컸거든?
“나는 잘 해내리라 믿네.”
명현의 은근한 어조와 장로들의 동조하는 눈빛에 명진이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래, 그래. 허허, 잘 결정하였네.”
“장문인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한참 전에 해야 했던 일일세.”
명현이 명진의 어깨를 살포시 두들겨 주었다.
“허나 당장은 어렵다네. 근래에 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일궁을 재건할 정도는 아닐세. 그래도 명선이 최대한 아껴 준비해 보겠다 하니 수년 내로는 가능할 것이네.”
“십 년인들 못 기다리겠습니까.”
“헛헛, 그러니 자네도 서둘러 몸을 회복하고, 앞으로 오룡궁을 이끌어 갈 제자들을 늘려 가게나.”
“예. 장문인.”
명진이 결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무당의 이름을 중원에 드높일 것이네. 벌써 세 곳의 상단과 연을 맺었고, 속세로 내려간 진궁이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야.”
“기쁜 소식이군요.”
함박웃음을 짓는 명현을 향해 명진이 마주 웃었다.
“진무야.”
“예. 장문인.”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많을 터이다.”
뭔 할 일.
수련할 시간도 없는데.
그리고 뭘 시키려면 보상을 해 줘야지.
“네가 앞으로 무당을 이끌어 갈 든든한 재목임을 내 믿어 의심치 않음이야.”
그러니까 뭘 주든가.
양의심공이나 뭐 그런.
마음의 소리를 꺼내지 못한 채 진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 * *
장문인과 장로들이 돌아간 이후.
명진은 점심도 거른 채 진무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꾸에엑!
멧돼지를 잡아 온 청상도.
펄럭!
진무의 도포를 깨끗하게 빨아 널어놓은 청우도 함께였다.
명진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충허암이 위치한 봉우리의 가장 높은 오로봉이었다.
어?
이곳은?
과거에 직접 불태워 버린 곳이니 진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곳이 오룡궁이니라.”
아, 그랬나?
“내 스승님이신 현오자께선 오룡궁의 궁주셨고, 나는 그 아래의 일대제자였느니라.”
아…… 그랬구나. 그래서…….
진무는 스승이 어째서 그리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이해했다.
괜히 좀 미안한데.
“그 사악한 혁련무강 때문에.”
뭐, 그렇게 표현할 것까지는.
“진무야.”
“예. 스승님.”
“오룡궁과 남암궁에 대해 아느냐?”
진무가 알 리가 없다.
딱히 관심도 없었고.
“하긴 말해 준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이미 네가 도동이 되기 전에 불태워진 곳이었다. 그 사악한 혁련무강에 의해서.”
거참, 그만하라니까.
“오룡궁은 무당의 수호자였다. 대대로 무당을 지켜 온 호법이었지. 그리고 남암궁은…….”
무당의 검과 방패.
오룡궁은 무당을 지키는 방패였고 남암궁은 검이었다.
남암궁(南岩宮).
사람들은 그곳을 무당의 ‘무력(武力)’이라 불렀다. 무당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무인들로 구성된 곳.
남암궁은 무당과 엮인 수많은 곳에 무인을 파견해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당에서 유일하게 ‘살계(殺戒)’가 허락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뭐 대놓고 죽일 수 있다니 나쁘진 않은데.
“앞으로 이곳이 재건되면 진무 너는 앞으로 오룡궁의 제자이자 무당의 검으로서 무림에 나서게 될 것이다. 너는 무당의 얼굴이자 자존심이 될 것이니라.”
“예. 스승…… 예?”
잠깐만, 뭐라고?
뭘 한다고?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한다. 청상과 청우도 마찬가지니라.”
“예. 사조님.”
청우와 청상이 결연히 대답했지만, 진무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이봐.
그러니까 내가 왜?
수련할 시간도 부족하다니까?
하지만 스승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니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외칠 뿐이다.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겠구나. 토목 공사도 그렇고 전각을 세우는 일만 해도 엄청난 자금이 들 터인데…….”
스승의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이 진무의 가슴을 쥐어짜듯 눌러 왔다.
망할 금고아!
망할 도동의 기억 때문에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은 사패천의 비동을 털어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한데 사조님.”
청상이 넌지시 물었다.
“사조님께서 궁의 주인이 되시면 사숙께서도 대제자가 될 자격이 주어지는 건가요?”
“흠, 그렇겠구나. 일궁의 실무자가 되어 공적을 쌓으면 훨씬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겠지. 하지만 대대로 남암궁의 제자가 대제자가 된 경우는 없었는데.”
응? 뭐?
순간 귀가 확 열리는 것 같았다.
뒷이야기는 제쳐 두고, 대제자의 자격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리지?
그런 게 있었냐?
“스승님, 대제자가 되는 것에 자격이 있었습니까?”
“응?”
진무의 물음에 명진이 눈을 끔벅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구나.”
“…….”
“오냐. 너 정도 무재(武才)라면 그런 꿈을 꾸어도 나쁘지 않겠지.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대제자가 되려면 무공만 강해서는 안 되느니라. 각궁의 실무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해 업적을 쌓아야 하고, 사문의 동배들에게 평판도 쌓아야만 한다.”
“…….”
“해서 장로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회의를 통해 장문인께서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지.”
이런 망할!
그런 이야기는 진작에 해 줬어야지, 이 멍청한 스승아!
아니, 그리고 뭔 신경 쓸 게 그리도 많은 거냐!
당연히 강한 놈이 대제자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