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61
361화
진무를 바라보는 노국태의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먼저 출발했던 묵검대의 전멸.
독이나 진법에 당한 것이 아니다. 원인은 누가 봐도 눈앞에 피 칠갑을 한 심마니 복장의 사내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기도로 봤을 때 그의 경지는 검혜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기운의 정체였다.
분명 마기는 아니다. 사기와…… 아마도 선기? 여하간에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이하게 혼재하는 탓에 내공의 근간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마교의 영역. 더욱이 마인들 중에도 심심파적으로 사공에 손댄 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으니, 그는 필시 일가를 이루지 못하고 은거한 마교의 무인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 중원의 떨거지들을 돕는지 모르겠으나 괜히 부딪혀서 좋을 일이 없다.
끌고 온 묵검대의 무인을 대부분 잃은 지금 포위망을 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사동천과 삼동천의 경계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그와 부딪히는 사이에 놈들이 도망쳐 사동천으로 넘어가 버리면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더 쫓을 수 없을 터.
그렇게 되면 저들을 생포해 오라던 소궁주의 명령을 어기게 되는 셈이다.
선택은 하나뿐이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대는 누군가?”
“…….”
“어떤 이유로 지금의 상황에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
“…….”
진무는 굳은 피로 뻑뻑해진 눈가를 씰룩거리며 노국태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물러나 주면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자네와는 무관한 거기 중원에서 온 종자들이니…….”
이건 또 뭔 신선한 노인네지?
딱 봐도 무인인데 학사인 양 점잖게 개소리를 하고 있네?
사실 눈앞에 나타난 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의 진무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짐승을 키우는 먹잇감으로 사용한 궁의 족속이라면 모조리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뒤편, 거무튀튀한 놈의 손에 잡힌 검혜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딱히 그녀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과거에 적이었던 정도?
대궁에게 말했듯 무인은 무림에 뛰어드는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
검혜, 아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정사의 추격대가 전부 죽는다 하여 새삼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청상과 청우다.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해 그 둘을 구했다.
검혜가 죽는다면 모질지 못한 녀석들의 마음에 평생 빚으로 남을 터. 그건 무인의 운명을 논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분노가 사무쳐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놓지만, 그녀를 구하자면 머리는 차가워져야 한다.
진무는 애써 화를 가라앉히며 상황을 세밀하게 살폈다.
거리가 좀 되었기에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검혜 정도 되는 고수를 허술히 다룰 리는 없으니 최소한 점혈을 당했거나 일시적인 산공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눈앞의 노인은 강하다.
비교하자면 송여방이나 종려군 정도 될 것이다.
단숨에 제압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와 싸우는 사이에 저 까만 놈이 검혜를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켜야만 하는데…….
일단은 가볍게 도발해 볼까?
“야, 하나 묻자.”
“……?”
“니가 궁이라는 것은 알겠어.”
진무의 질문에 노국태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시정잡배처럼 짝다리를 짚고 반말을 툭툭 내뱉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소속을 알고 있다.
마교의 은거 무인인 듯한 그가 어떻게? 그새 중원 놈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나? 마교와 중원은 오랜 세월 적대시해 온 관계일 터인데.
노국태가 의아함을 이어 가는 사이 진무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네. 송여방이 그러더군. 중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백년대계를 세웠다고.”
“……!”
이자가 송여방을 안다고?
그가 마교인에게 궁의 백년대계를 언급했단 말인가?
“대체 그대가 어찌 그걸?”
침착하기만 하던 노국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기자 진무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호기심을 끌어내었으니 시선은 집중시킨 셈이고. 다음은 분노.
“뭐,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니들은 글러 먹었어.”
“…….”
“무림인이라는 새끼들이 제 놈들이 가진 힘으로 이루려고 해야지. 무슨 말인지 알지?”
“…….”
“그리고 애들. 납치해서 짐승을 키워? 그 개새끼에게 저주받은 무공을 익히게 하려고? 야, 니들이 사람 새끼는 맞냐?”
힐난조로 빈정거리는 진무의 말에 노국태의 얼굴이 침중해진다.
얼레?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닌데?
대강 이쯤에서는 눈 까뒤집고 달려들어야 맞는데, 어째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다.
아, 이러면 말짱 황인데.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무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노국태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자책감이었다.
지금의 궁은 그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노국태는 그저 배덕한 무리들에게 변방으로 쫓겨난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송여방, 상관평과 손잡고 대궁주를 옹립해 세력을 키워 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궁은 너무나도 변했다.
상관평의 말처럼 권력이라는 단맛을 깨달아 버린 대궁주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고, 소궁주는 짐승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실망해 버린 오랜 벗 상관평은 이미 새로운 길을 모색한답시고 주씨 놈들보다 더한 악의 표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오기도 했거니와, 여기서 멈추면 이때껏 그들의 대의를 위해 스러진 목숨들은 그야말로 헛된 희생이 되어 버린다.
이미 자신이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끝나면 처음처럼 다시 순수해질 수 있으리라.
처음에 그들이 뜻했던 바대로 모든 이를 평안케 할 수 있으리라.
지금의 속죄는 그때 가서 할 것이다. 남은 평생을 바쳐서라도.
요동치는 마음을 겨우 다잡은 노국태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아. 궁은 변했지.”
무당지검이자 사패천주인 그 도사 놈이 나타나면서부터 모든 게 어그러졌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는 걸 원치는 않았는데. 구차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뜻이 이렇게 퇴색될지는 나 또한 몰랐던 일이라네.”
아니, 화를 내라니까. 갑자기 참회는 왜 하냐고.
“후우, 어찌 되었든 백년대계에 대해 들었을 정도라면 여방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군.”
“…….”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노국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진무가 원했던 분노는 보이지 않았으나 어쨌든 경계심은 약간 누그러진 모습.
길은 달랐으나 원했던 바는 충분히 달성했다.
남은 것은…… 놈이 생각지도 못한 반전.
[청상!]“……?”
갑작스러운 전음에 움찔한 청상이 진무를 바라보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검혜는 니가 직접 구해라.]“……!”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방법이 없다 여겼던 청상의 눈동자에 놀람과 다급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진무는 이미 노국태의 주위를 배회하듯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가 향하는 쪽은 검혜를 구속하고 있는 무인.
재빨리, 그리고 은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노국태가 눈치를 채 버리면 사숙이 만든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청상과 달리 진무의 노림수를 모르는 노국태는 아련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엇이 되었든 여방과 그대의 인연이 선연(善緣)은 아니었겠지?”
“당연하지. 좋은 인연일 리가 있나?”
“그렇군. 허나 마교인인 자네가 그를 만날 일이 흔치 않았을 것인데…… 어떤 인연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
진무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마교인?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나?
근데 이 새낀 끝까지 말투가 고고하네. 더군다나 지금 눈깔에 떠오른 게 송여방에 대한 그리움 뭐, 이딴 거냐?
어쨌거나 필요한 위치는 확보했다.
이제 움직인다.
진무는 씩 웃으며 진실을 말했다.
“그놈 내가 보내 버렸거든.”
“……뭐?”
파앙!
생각지도 못했던 답에 노국태의 눈이 채 커지기도 전에 진무가 공간을 접은 것처럼 다가왔다.
당황하긴 했어도 노국태는 한 개의 궁을 책임지는 절대의 고수.
단숨에 끌어 올린 강기가 그의 쌍장에 어렸다가 진무를 향해 뿌려졌다.
급하게 일으킨 것치곤 대단하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쿠우우우!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강력한 쌍장에 마주한 진무가 별안간 멈추는가 싶더니 방향을 꺾는다.
“……!”
그러곤 곧장 이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목표했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허억!”
그가 노린 곳은 검혜를 잡은 묵검대의 무인.
갑자기 공간을 뛰어넘어 버린 것처럼 눈앞에서 나타난 진무의 모습에 대경한 무인이 멈칫했다가 빠르게 손을 놀렸다.
놈이 검혜를 구하려는 것이다.
상대의 실력으로 봤을 때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다.
빼앗기느니 죽여야 한다.
슈아아악!
잡은 손을 놓음과 동시에 무인의 검이 바닥에 떨어진 검혜의 목덜미를 찔러 갔다.
쩌엉.
“……!”
검극이 검혜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우그러지며 멈췄다. 자신들의 검처럼 검은색을 지닌 손바닥 하나에.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상황 판단이 빠른 놈이네. 까딱하면 늦을 뻔했잖아?”
“…….”
“기특하지만 주인을 잘못 선택한 결과는…… 죽음이야.”
뻐걱, 스걱!
두툼한 주먹이 무인의 옆구리에 틀어박히는 것과 동시에 한 줄기 빛무리가 무인의 목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무의 전음에 준비를 마치고 있다가 은밀하게 다가선 청상과 청우.
청상의 검에 목이 날아간 몸뚱어리는 청우의 주먹에 세차게 튕겨 처박히고, 떠올랐던 머리가 바닥에 뒹굴었다.
“청상, 청우.”
“……?”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휘말리면 다친다.”
“알겠습니다, 사숙.”
진무의 명령에 청상과 청우가 검혜를 부축해 훌쩍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노인네 하나와 거무튀튀한 놈들 몇.
잔챙이들은 됐고, 노인 하나만 잡는다.
“네, 네놈?”
졸지에 검혜를 빼앗겨 버린 노국태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다.
“처음부터 검혜를 노리고?”
“그럼 미쳤다고 너랑 대화를 하고 있었겠냐?”
“놈…….”
빙글거리며 웃는 진무의 모습에 노국태의 눈 주위가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그러다 문득.
“네놈이 송여방을 보내 버렸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
“이해력이 딸리는 거야 뭐야? 죽인 거지.”
“뭐라?”
“그…… 빨간색 채찍 강기를 쓰던 종려군이라는 년은 패 죽였고, 호신강기 비스름한 걸 쓰던 송여방이라는 놈은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서 죽였지.”
“…….”
“다음은 너다.”
진무가 소매로 얼굴을 뒤덮은 피딱지를 대강 닦아 내며 입술을 살짝 벌려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얼굴…… 네, 네놈 설마?”
“뭐야? 이제 알아본 거야? 무공만큼이나 눈썰미가 개판이구만?”
“…….”
노국태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제야 알아보다니.
심마니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몰랐다. 와중에 마교에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피가 닦이고 드러난 그 얼굴을 어찌 못 알아볼까?
“너 아까 참회를 하는 것 같던데, 그딴 개소리 좀 하지 마.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발 벗고 해 놓고 뒷짐 지고 학사처럼 말하면 고고해 보이는 것 같아?”
“…….”
“행동이나 말은 가식을 담을 수 있지만, 본바탕은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노국태의 볼이 거대하게 치솟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변화의 원흉인 놈이 눈앞에 있다.
무당지검이자 사패천주인…… 진무.
종려군과 오랜 벗이었던 송여방을 죽인 놈.
중원에 자리 잡은 궁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대업을 망쳐 놓은 놈. 미루고 미룬 속죄도 장담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놈.
“네놈, 네놈만 아니었다면…….”
“위선 좀 떨지 마. 니 말대로 원하지 않았다 해서 죄가 없을 것 같아?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방관했잖아. 그게 니들 목적을 이루는 길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야.”
“…….”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흰색 천 위에 진무만이 있는 듯 주위 모든 것이 시야에서 날아가고 없었다.
분노와 함께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 없게 된 살기가 그의 주위를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자, 사람은 구했고, 이제 너는 어떻게 죽여 줄까?”
짝다리를 짚고 턱을 든 채 내려다보듯이 자세를 취한 진무의 도발적인 모습에 기어이 노국태의 이성이 끊어졌다.
“찢어 죽여 버리겠다!”
눈동자에 솟구친 핏발이 모조리 터져 버린 것처럼 혈광을 쏟아 내며 노국태가 진무를 향해 쏘아져 들어온다.
뭐야? 어떻게 죽을지 결정한 거야?
에이, 그런데 말이 틀렸네.
‘찢겨서 죽어 버리겠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