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68
368화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미소와 함께 찾아온 것은 잔인한 살육의 시간이었다.
먹구름도 끼지 않은 곳에 붉디붉은 비가 내리고,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대지가 사납게 진동한다.
수십이 검을 휘두르며 달라붙었음에도 그 안에 선 진무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허공에 떠오른 무인의 멱살을 잡아챈 손이 땅바닥에 세차게 내리꽂히고…….
콰아앙!
인정사정없는 발이 거친 폭음과 함께 처박힌 무인의 가슴뼈를 으적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짓밟고 뛰어오른다.
양손으로 두 개의 머리를 잡아 거세게 부딪쳐 터트리고, 떨어지는 곳에 있는 무인을 그대로 짓밟아 뭉개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진숙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의기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성강의 경지를 넘보는 그였으나 눈 앞에 펼쳐지는 살육에는 몸이 벌벌 떨려 올 정도였다.
그는 학살자였다.
궁의 사람들은 묵검대를 일컬어 전장의 사신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진정으로 사신이라 불려야 할 존재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
꾸우우웅!
힘껏 내리밟은 진각에 진무의 주위가 모조리 터져 오르고, 폭발에 휩쓸린 무인들이 넝마가 되어 튕겨 나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모습을 드러낸 학살자.
진무가 양손에 축 늘어져 버린 묵검대 무인의 머리를 움켜쥐고 진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끔찍한 시간 안에 무연한 고요와 적막이 흐른다.
묵검대는 텅 비어 버린 진무의 주위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포위 대형을 유지하며 연신 물러났다.
“내가 말이다.”
학살자의 음울한 목소리가 침묵으로 가득하던 곳에 스산하게 퍼졌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된 사람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
사방에 시체로 산을 쌓고, 핏물의 웅덩이를 건너오는 이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으나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진한 압박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데 어찌 감히 말을 뱉겠는가?
“그런데…… 니들이 깨워 놓은 거야.”
“…….”
“우리 스승님이, 망할 도동 놈의 기억이 애써 봉인해 놓은 오래된 과거의 모습을 말이야.”
진무가 턱을 살짝 쳐들고 웃는다.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잔인하고도 잔인한 웃음을 머금고 읊조린다.
“희한하지? 사람을 죽이다 보면 죄책감이라는 것이 들었는데 너희에겐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왜냐고? 니들은 그저 네발 달린 짐승에 불과하니까.”
“……!”
올라갔던 턱이 제자리를 찾음과 동시에 진무의 눈동자에 흉흉한 안광이 어리자, 어느샌가 그의 주위를 감싸던 북풍 같은 한기가 살기를 머금고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오래 끌지 말자. 시간은 소중하니까.”
진무의 자세가 달라졌다.
쭉 뻗어 낸 손에 빨려들었던 묵빛 검이 발검을 앞둔 모양새로 허리춤에 가 닿고, 형형하던 안광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어 어둡게 가라앉는다.
진무의 손에서 한 초식의 발검술로 다시 태어난 무당의 구혼탈백.
쓰레기들의 목을 한 번에 따 버리기에는 최적의 무공이다. 다행히 근처에 아군도 없으니 신경 쓸 것 없이 죄 베어 주마.
우우우웅!
허리춤에 닿은 묵검에 검은 사기가 회오리처럼 몰려들더니, 거목의 뿌리가 뽑혀 나오듯 커다란 원을 그리며 장중하게 휘둘러졌다.
쓰아앙!
빠른 듯, 느린 듯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속도에 검과 대기가 마찰하며 고막이 터질 듯한 소음을 이루고, 기다란 묵빛 강사가 나선을 이루며 뻗어 나간다.
“이, 이런 젠장! 피해라!”
진숙의 다급한 외침에 묵검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도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늦었다.
얇디얇은 실선처럼 뿜어진 강사가 이미 세상을 상하로 가르고 있었으니까.
스거걱!
나무든 바위든 가리지 않는다.
묵빛 강사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닿는 모든 것들을 잘라 버렸다.
도망치던 묵검대의 무인들 중 강사의 이동 경로에 속한 자들은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반으로 갈라졌으며, 개중 비껴 나간 자들은 팔다리가 잘린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경로의 한중간,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진숙은 온 힘을 다해 검에 기운을 밀어 넣고 강사를 후려쳤다.
까아아앙!
“크으윽!”
하지만 함강의 끝자락에 선 진무의 강기는 진숙의 어설픈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쥐어짜듯이 만들어 낸 강기를 부수고 들어와 검을 잘라 낸다.
다행히 속도를 줄였기에 몸이 베이는 것은 피했으나 충돌로 인해 생겨난 반탄력에 튕겨 나간 진숙의 몸이 아름드리나무에 거세게 처박혔다.
“커억!”
척추가 조각나는 듯한 충격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으나, 진숙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고 진무의 종적을 찾았다.
놈은…….
슈아악!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구혼탈백을 펼친 진무가 곧장 진숙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숙인 고개 위로 진무의 주먹이 스치고.
쩌어어엉!
아름드리나무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언제 한 몸이었냐는 듯 잘게 쪼개져 허공에 비산하는 나뭇조각들.
도망쳐야 한다.
진숙이 익혀 온 수많은 무공은 눈앞의 학살자를 상대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고수라는 것은 진작에 깨달았다.
진숙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온 힘을 다해 숲의 한쪽으로 몸을 틀었다.
콱!
“어딜 가? 이 쥐새끼 같은 놈아.”
“……!”
후욱!
강한 힘으로 당겨진 머리카락이 찌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리 가죽이 통으로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강제로 위를 향한 진숙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제 머리칼을 움켜쥔 채 음산하게 웃고 있는 괴물이었다.
“아…….”
“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콰직!
검게 물든 주먹이 진숙의 코뼈를 부수고 파고들었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진무의 주먹이 진숙의 안면을 무참히 짓이긴다.
콰직! 퍽! 퍼퍽! 퍽!
몇 번이라는 의문은 불필요했다.
진무의 주먹은 비명을 내지를 틈조차 주지 않았다.
뼈가 바수어지는 소리가 흐릿해졌을 때쯤 진숙의 다리가 축 늘어졌다.
“자, 다음은 어떤 놈으로 할까?”
진무가 흉흉함이 감도는 눈빛으로 주변을 쓸어 본다.
진숙의 허무한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몰고 온 파장.
“으으…….”
뒷걸음질 친다.
스스로 최강이라 자부했던 묵검대의 무인들은 깨달았다.
아무리 쥐가 궁지에 몰려 고양이를 문다고 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임을.
물린 고양이는 놀랄 뿐이지만 쥐는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으아악!”
대개 두려움과 공포의 끝은 주저앉음이나 무인으로 단련되어 온 그들은 도주를 선택했다. 사력을 다해서, 조금이나마 살 수 있는 방향을 찾아.
포수의 화승총 소리에 놀라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참새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치는 그 모습에 진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개자식들…… 남의 목숨은 파리처럼 하찮게 여기면서 제 목숨은 귀한가 보지?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
이곳에 두 발 딛고 서 있던 놈들, 아이들의 납치에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었던 놈들은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죽여 버리겠다.
파아앙!
아무렇게나 덜렁거리는 진숙을 놓은 진무는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사냥꾼과 사냥감.
그러나 포획하려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죽음을 안겨 주려는 사냥이었다.
* * *
“진숙에게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것인가?”
“예. 적들이 객랍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
묵검 일 호, 경태진의 보고를 들은 사마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진숙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진숙의 연락을 받고 객랍 주위에 포위망을 구성했음에도 적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설마 적들이 각개 격파를 노리고 자신을 여기로 유인한 것이란 말인가?
진숙과 백오십의 무인들을 죽여 이쪽의 수를 줄이기 위해 함정을 팠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정예 중의 정예만을 선발해 만들고 자신이 직접 무공을 가르친 묵검대다.
그런 이들이 백오십이나 되는데 고작 함정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느 것 하나 쉬이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사마도의 미간에 팬 골이 점점 깊어졌다.
이미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삼동천 본성 앞에 다다라 본대를 기다렸어야 했었다.
본진과의 거리는 약 반나절.
강제로 규합한 이동천의 무인들을 앞세워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으니 지금은 더욱 거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하는가?
깊은 고민에 휩싸였던 사마도는 결국 적을 뒤쫓기 전에 진숙을 확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젠장, 태진!”
“예, 대주님.”
경태진이 즉시 부름에 답했다.
“지금 즉시 진숙의 위치를…….”
피이잉!
채 명령을 끝맺지 못한 사마도가 귓가를 스치는 미세한 파공성에 고개를 돌렸다.
쐐애액!
공기를 꿰뚫으며 무인들의 틈새를 비집고 날아오는 무언가.
화살?
아무리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고 해도 고작 화살 따위에 어찌 될 사마도가 아니었다.
타악!
가볍게 휘저은 손에 화살이 잡혔다.
“…….”
시중에서 흔히 볼 법한 화살촉에 단단히 묶인 천 쪼가리.
머뭇거리는군. 두려운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마도의 시야에 멀리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 초입에서 활을 들고 자신을 향해 손목을 까딱거리는 무인 하나가 들어왔다.
“이 개자식이…….”
방금의 결론을 단번에 날려 버리는 그의 도발에 사마도의 눈 주변이 잘게 떨렸다.
분명 묵검대 백오십을 깔아서 객랍 일대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놈은 유유히 포위망을 뚫고 지나가 약 올리듯이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네놈들이 정말로 나를 열 받게 하는구나.”
뿌드득.
어금니를 부서져라 갈아 댄 사마도가 흉흉한 안광을 발하며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쫓아라!”
벼락처럼 쏘아져 나간 사마도의 움직임에 포위망을 구성했던 묵검대가 일제히 몸을 틀어 달렸다.
“…….”
대궁은 객랍을 부채꼴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던 묵검대가 사마도의 뒤를 따라 자신이라는 한 점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에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시 뛰어야 할 때다.
이제부터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적의 습격조들에 의해 구해진 삼동천의 무인들은 모종의 장소에 이동해 방어막을 구성하고 있었다.
진무는 대궁에게 놈들을 그곳까지 끌어들이라 했다.
놈들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 화를 있는 대로 돋웠으니 이제 꼬리를 잡혀 주어야만 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애가 닳은 놈들이 추격을 멈추지 않도록.
대궁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마도의 신형을 미리 재어 놓았던 나무의 크기에 빗댔다.
그 둘의 크기가 동일해지는 지점.
거리는 오십 장.
“후우…….”
천천히 내쉬는 숨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두 다리를 향해 뻗은 내력이 용천혈에 담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마도가 거칠게 일검을 휘둘러 강기를 날려 오는 순간.
꾸우욱.
접혔던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부풀어 스침과 동시에 빠르게 펴졌다.
파아앙!
대궁의 몸이 비틀려 돌아가며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간다.
슈아악!
찰나의 사이에 사마도의 강기가 대궁의 잔상을 갈랐다.
“놓칠 것 같으냐!”
간발의 차이로 먹잇감을 놓친 사마도의 눈동자에는 이제 대궁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넷이 아니라 하나인지.
왜 자신이 공격할 때까지 멈춰서 기다렸는지 생각했어야 함에도.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잡힐 듯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