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74
374화
지금의 상태는 처박힌 정도에 불과하다.
옷에 먼지가 조금 묻었고, 몸이 욱신거리며 목구멍으로 핏물이 조금 넘어왔다는 것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다.
놈에게 죽어 간 이들의 비통함과 원한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천천히 몸을 일으킨 진무가 부서진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한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놈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건물 속에 처박힌 자신을 비웃으며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다.
제 딴에는 강자의 여유를 부리려는 것이겠지.
그래, 고맙다.
고마워서 죽여 버리고 싶네, 아주.
건물 잔해를 밀치고 밖으로 나오는 진무를 향해 한승이 이죽거렸다.
“큭큭, 좀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거냐?”
“…….”
“자신만만하게 검을 버리더니, 이제 주워 볼 마음이 좀 생겼더냐?”
“…….”
“너무 걱정 마라. 너는 좀 더 오래 살려 두었다가 먹어 치울 테니까.”
심하게 우쭐거리는 한승의 눈빛은 마치 쥐를 잡아먹기 전 한참을 괴롭히는 고양이 같았다.
문득 웃음이 나온다.
자신이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될 줄이야.
진무는 몸을 툭툭 털며 한승에게 물었다.
“좋냐? 신나?”
“그래, 신난다. 지금까지 먹이가 반항한 적은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놈들투성이였지. 너 같은 놈은 없었거든.”
“…….”
“다들 죽어 가면서 꾸득거리는 소리를 내더군. 너는 어떤 소리를 낼까? 어떤 모습으로 죽을까?”
새하얗게 웃는 미소에 서린 것은 살기가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걸출한 상대에 대한 경외 따위도 아니었다.
그저 죽이는 것이 신날 뿐인, 순수한 미소.
놈은 지금 퇴행 현상을 겪고 있다.
흡성마공으로 막대한 내공을 얻게 되었으나 그 마성이 뇌에 스미어 조금씩 어린아이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깨닫기 전의 어린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탐욕의 동물이다.
허기지면 먹고, 아프면 울고.
인간이 가진 욕구에 가장 충실한 존재.
선악의 구분이 없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다만 너무도 나약하기에 그 잔인함이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을 뿐.
하지만 놈은 다르다.
어린아이의 잔혹함과 동시에 힘을 가졌다.
놈의 눈에는 사람이 그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음식이자 장난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 네놈은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어린 짐승이다.
버릇이 잘못 들었으니 쥐어 패서라도 고쳐야지.
그러나 내가 너를 아끼고 사랑할 일은 없으니, 단죄의 매로써 죄를 물을 것이다.
진무는 한승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놈의 강함은 흡정마공을 통한 생기 흡수에서 기인했다.
흡정마공, 채양보음……. 마교에서조차 금기라고 정해 놓은 그것들의 원형은 묵룡혼원공의 채기법이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채기법을 가르쳤던 스승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분명 그랬다.
진무가 알기로 흡정마공이 사람 하나에게서 흡수해 마기로 변환시킬 수 있는 내공은 겨우 채기법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얼마 전 진무가 열심히 뜯어 먹은 천산설초가 머금고 있는 선기의 양 정도일 터.
그런데 놈을 때린 주먹이 욱신거리고 손목이 시큰거린다.
명검 중의 명검이라는 일휘조차 놈의 몸에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몇인지 기억은 나더냐?”
“……?”
나지막한 진무의 물음에 한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소 수백, 아니면 그 이상이겠지. 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을 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죄책감은 없었더냐? 네놈이 그만한 내공을 얻기 위해 죽인 이들에게 말이다.”
“그들? 내가 그런 쓸모없는 것들에게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느니 내 힘에 보탬이 된 것이 훨씬 좋지 않겠어?”
“…….”
“너도 직접 보고 경험했잖아. 나는 무적이다. 칼보다 강한 신체를 얻었고, 무한에 가까운 내공을 얻었지. 그들은 천하제일인이 된 나의 밑거름이 된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
놈이 자랑스럽게 웃는다.
개새끼.
아니, 너 같은 것과 비교되면 개에게도 욕이지.
그게 그리 좋더냐?
아무런 노력 없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 힘을 얻은 것이.
“그래, 내가 짐승에게 말해 뭐 하겠냐.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지.”
“뭐라고?”
말이 길었다.
네놈이 무적이건 뭐건 반드시 죽여 주마.
그 목을 잘라 받은 피로 너에게 죽어 간 이들의 무덤에 바칠 술잔을 채울 것이다.
진무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 * *
진무가 한승과 마주친 그 시점.
공격 명령을 내린 상관평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엄청난 수의 무인들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열의 허리를 끊어라!”
날카롭게 외치며 좌측에서 뛰어든 여인이 장력을 뿜어 무인들의 머리를 터트렸다.
“느, 능서현? 네년이 어찌?”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크핫핫!”
엄청난 성량의 웃음과 함께 우측에서 등장한 뚱뚱한 노인이 미친 듯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근처에 있던 내궁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썰려 나갔다.
“괴뢰까지?”
저들이 어찌 이곳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설마……?
“궁의 악적들을 죽여라!”
후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상관평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완만한 곡도를 들고 말을 달려 온 무인, 일환이 후방에 있던 내궁 무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포위되었다.
이동천의 무인들을 성벽을 향해 전진시키고 난 후, 놈들이 좌우에서 공격해 대열의 허리를 끊고 후방에서 감싸 왔다.
능서현에 괴뢰에 곡도를 든 놈까지.
놈들은 새롭게 결성된 남부의 동천 연맹이 분명했다.
그들이 이미 삼동천의 영역에 들어와 자신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얼굴을 일그러뜨린 상관평의 시선이 삼동천의 본성으로 향했다.
성벽에서 격돌한 이동천과 삼동천의 무인들로 인해 소궁주 한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한승이 자유로웠다면 성벽은 벌써 뚫려야만 했다. 필시 누군가가 삼동천의 내부에서 한승을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부의 동천 연맹이 나타났다면, 한승을 잡아 둔 것은 분명 동천 연맹주가 되었다는 소문의 중원인일 터.
낭패다. 어찌해야 하는가?
뿌리치고 나아가기에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세 배, 아니 네 배는 족히 될 법한 수였다.
이미 적을 죽이는 숫자보다 이쪽이 죽어 가는 숫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필패다. 자신 홀로 어찌해 보기에는 수적인 열세가 너무 컸다.
퇴각? 그 또한 있을 수 없다.
목표가 목전까지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멈출 수는 없는 일. 만약 여기서 패배한다면 한승을 잃는 것은 둘째 치고, 북리도천과 약속한 중원 정벌이 영영 물 건너간다.
그리되면 대궁이 나선다.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대궁이지만, 중원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대궁은 무림이 아니라 저 배덕한 자들이 만들어 낸 금군과 싸워야 한다.
그 전에 쓰러진다면 자신들이 꿈꿨던 대의는 한 줌 부질없는 희망으로 사라질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상관평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만약 한승이 싸우고 있는 인물이 남부를 통일한 동천 연맹주가 확실하다면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함께 온 내궁의 무인들이 다 죽더라도 놈을 죽이고 한승과 함께 이탈해야만 했다.
“능편!”
“예, 내궁주님!”
“사력을 다해 막아라! 대의를 위해 죽는다는 심정으로 막아야 한다.”
“…….”
“나는 소궁주님을 도우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비장한 명령에 능편이 결의를 다지며 대답했고, 상관평은 삼동천의 본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힘껏 말채찍을 휘둘렀다.
거센 통증에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가 쏜살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채 속도를 내기도 전에 흉흉한 기세를 머금은 장력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가, 상관평을 노리고 세차게 떨어져 내렸다.
쾅! 으저저적!
쏘아진 장력이 급히 뛰어내린 상관평을 대신해 말을 짓눌러 터트렸다.
“놈! 어딜 가려는 것이냐!”
“…….”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귀영마수 능서현이었다.
“네년 따위가 감히…….”
다급한 와중에 길을 막고 선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던 상관평이 수염을 부들부들 떨어 대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휘둘렀다.
퓻! 퓨퓨퓻!
“……!”
암기?
하지만 너무도 쾌속하게 날아온 탓에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단 장력을 연거푸 발출해 막은 능서현이 빠르게 물러났다.
펑! 퍼퍼펑! 펑!
장력과 충돌한 열 개 남짓한 물체가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하지만 하나를 놓쳤다.
미처 제압되지 않은 그것이 장력의 틈새를 비집고 능서현의 목을 노리며 날아왔다.
“하합!”
파아앙!
능서현은 목을 뒤로 꺾으며 물체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손에 기운을 모아 후려쳤다.
퓨윳!
“크윽!”
아릿한 통증과 함께 능서현이 제 손을 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뚝, 뚝, 뚝…….
그녀의 손에서 흐른 피.
손바닥이 뚫린 것이다.
또르륵.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마름모꼴의 물체. 저게 뭐지?
능서현은 의문의 답을 쫓아 상관평의 손에 들린 무기를 주시했다.
철로 만든 주판?
그럼 이 작은 물체가 주판(籌板)의 알맹이란 말인가?
상계의 무인들 중 일부가 그런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은 적은 있었지만…….
“운이 좋았구나. 하나 다음은 없다!”
상관평이 손에 들린 철 주판에 기운을 주입해 당겼다.
“……!”
취리리릿!
기분 나쁜 마찰음에 능서현이 소리의 근원지를 쫓아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녀의 장력에 맞고 떨어진 주판알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더니, 남김없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 올라 상관평의 손에 들린 주판으로 회수되었다.
제기랄! 회귀 능력까지 가진 무기였나?
회수 경로에 있던 능서현이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며 주판알을 피했다.
속도도 속도였거니와 주판알마다 기운이 서려 옷이며 살갗이 끊임없이 베였지만 간신히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착, 차차착!
알이 주판에 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년! 죽어라!”
어느새 몸을 날려 온 상관평이 수직으로 주판을 휘둘렀다.
망할!
몸이 허공에 뜬 터라 피할 수 없었던 능서현이 동귀어진이라도 하려 손을 뻗는데 갑자기 상관평이 휙 하고 몸을 비틀어 뒤로 물러났다.
파파파팍!
그와 동시에 능서현의 몸 앞으로 은사가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능서현! 괜찮나?”
괴뢰, 그가 능서현의 위급함을 보고 재빨리 도우러 온 것이다.
“이런 개 같은 연놈들이…….”
능서현과 함께 선 괴뢰의 모습에 상관평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급한 상황에 이놈 저놈 막아서니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하던 그조차도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다.
놈들을 죽이고 서둘러 한승을 도와야 했다.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상관평이 분노의 일갈을 뱉으며 주판을 흔들자, 그 안을 채웠던 백여 개의 알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허공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