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86
386화
잔인한 구타는 이각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서야 끝이 났다.
머리카락이 잡힌 채 허공에 매달려 속절없이 얻어맞은 갈무천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고, 그 무시무시한 구타의 현장을 목도한 갈가의 무인들은 갈무천을 돕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다.
태반의 전력이 진무의 일격에 전투력을 상실한 뒤였고, 남은 자들은 청상 일행이 합류한 동천주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휘이이.
스산하게 불어온 바람이 전장을 흉흉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전장은 정리되었고, 살아남았으나 부상당한 갈가의 무인들은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무심한 눈으로 갈무천을 바라보던 진무가 이내 그를 갈성혁의 근처에 툭 던졌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부터 네놈은 네 아비를 업어야 할 것이다. 오직 네놈의 육체가 가진 힘만으로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
그 잔인한 구타에서도 정신을 잃지 못한 갈무천의 귓가에 진무의 잔잔한 목소리가 때려 박혔다.
“사람이 죽어 간다는 지옥이 진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지금부터 네놈이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지옥이 될 것이다.”
“…….”
“내게서 한 걸음 뒤처질 때마다 네놈이 걷는 데 불필요한 뼈다귀를 하나씩 바스러뜨릴 것이고, 비틀거리다 쓰러져 아비의 몸에 흙먼지라도 묻히면 네놈 몸에 난 솜털 한 가닥까지 고통에 몸서리치도록 해 줄 것이다.”
낮게 으르렁거리며 갈무천을 위협한 진무가 천천히 몸을 돌려 갈가의 무인들을 향해 말했다.
“똑똑히 보아라. 강함을 추구해 온 너희의 이념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
이루 말할 수 없이 스산한 기세가 그들을 옥죄어 짓눌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전통과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온 마교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뜻을 세울 것이다.”
“…….”
“나의 마교, 아니 신교(新敎)의 무인으로 살아갈 자는 일어나 따르라.”
조금씩 높아지는 진무의 음성이 무인들의 귓가를 파고든다.
천명(天命).
마교의 심장부인 천산에서 진무는 공언하듯이 외쳤다.
마교가 아닌 신교.
승계가 아닌 창건의 역사를 말함은 귀가 아닌 마음을 울리고, 목소리에 담긴 힘은 심장을 뛰게 하며 빨라진 피의 흐름은 묘한 흥분을 일깨웠다.
“강요치 않겠다.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 다만 따르지 않으려거든 저놈이 열 걸음을 걷기 전에 이곳에서 떠나라. 따르지 않고 남아 있는 자는 나의 뜻에 반한다 생각하고 모조리 벨 것이다.”
말을 마친 진무가 침묵의 공간에서 시선을 거두어 갈무천을 바라보았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의 등에 멍에처럼 걸쳐진 지게 위, 각출이 갈성혁을 묶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상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딛는 그들의 뒤로 장고를 마친 이들의 행동이 갈렸다.
진무의 무위에 경외를 느끼고 새로운 세상에 합류하려 남은 자들과 도망치듯 산 아래로 몸을 날리는 자들.
그리고, 갈무천이 열 걸음을 걸었다.
“……죽여.”
생사를 가르는 싸늘한 한마디에 황신과 소동보가 머뭇거림 없이 움직였고, 송곳과 비수가 번뜩일 때마다 결정하지 못한 자들의 머리가 떨어져 뒹굴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을 때.
천천히 앞서 걷는 진무의 뒤로 무거운 표정의 청상과 청우, 그리고 동천주들이 따라 걸었다.
진무에게 의탁하기로 결정한 갈가의 무인들과 함께.
그렇게 진무는 천산의 정상을 향해 첫 계단을 올랐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새로운 뜻을 세울 때는 잔인할지언정 단호해야 한다. 아량을 베풀고, 용서를 거듭하면 곧 전철이 되니까.
뜻하는 바가 옳다면 하늘마저도 갈라야 하는 법.
막는 모든 것들을 부수더라도 기초부터 탄탄하게 세워 신강의 전역에 내 의지를 전할 것이다.
* * *
천산을 지탱해 온 여섯 가문에 찾아온 혼란.
찾아온 자는 마치 자신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 비웃듯 거침없이 천산을 오르고 있었다.
파죽지세와 같은 그의 등정에 마룡의 갈가는 무너졌고, 광혈의 묵가는 쓰러졌으며, 현재는 청화의 여가에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누대를 거쳐 온 교주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피의 길을 걸었으되 굴복시킨 이들을 보듬어 세를 불렸다.
처음에는 몇몇이었던 것이 이제는 수백의 긴 꼬리를 만들고 찬찬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천명한 신교의 창건.
여섯 가문과 천산이 누려 왔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마교가 지켜 온 전통과 피의 율법마저 지워 놓겠다는 그의 의지에 많은 이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해가 졌다.
석양이 천산을 붉게 물들이고, 치열했던 전장은 고요한 어둠으로 변했다.
한가롭기까지 한 진무의 발걸음과는 달리 천산은 밤 부엉이처럼 잠들지 못한 채 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타타타.
한껏 곤두선 적막을 깨우는 소리가 울렸다.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뛰어든 전령이 땀을 뚝뚝 떨구며 급히 무릎을 꿇었다.
“청화가 위태롭습니다.”
“무너졌더냐?”
“풍전등화입니다.”
“음…….”
인사조차 생략한 무례였건만, 돌아온 것은 질책이 아닌 침음성이었다.
긴 침묵이 이어진 끝에 한 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찌할 참이오?”
일렁이는 불빛에 드러난 노인은 날카로운 백미에 뱀처럼 차가운 눈을 가진 흑살(黑殺) 화가의 주인 화불유였다.
“놈이 천산에 발을 들인 지 사흘. 이미 자격을 시험하려던 세 개의 가문이 무너졌소. 이제 청화까지 무너진다면 놈에게 남은 것은 우리뿐이오.”
나지막하게 내부를 울리는 음성에도 함께 앉은 두 노인은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놈이 신교의 뜻을 내비친 것은 교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오. 마교를 지탱해 온 가문의 하나로 더 이상 교주님의 침묵을 방관할 수 없소.”
“…….”
“비록 세 개의 가문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가문의 무인들이 있고, 원로원과 장로부의 무인들이 남아 있으니…….”
“……지금 떼거지로 막아 보자는 말이냐?”
화불유의 말을 듣고 있던 왼쪽의 노인이 불쾌한 낯으로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장대한 체구를 가진 노인의 이름은 북리도평.
염인 북리가의 주인이자 현 교주인 북리도천의 아우로, 여섯 가문 중 가장 큰 세를 이끄는 무인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외인에게 우리가 학수고대해 온 자리를 고이 넘겨줄 순 없지 않은가.”
화불유의 투덜거림에 북리도평이 입꼬리를 말아 올려 비웃었다.
“천하의 화불유도 늙었군.”
“뭣이?”
북리도평이 빈정거리자 대번에 화불유가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그는 교주께서 초청한 자이자, 성화가 예언한 자다.”
“성화의 예언? 걷어차 버린 것은 놈이다.”
“그건 그의 선택이지.”
화불유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북리도평을 노려보았다.
“왜? 두려운가?”
“……?”
“네놈과 네놈의 가문이 누린 기득권을 잃게 될 것 같아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그는 당당하게 찾아왔다. 몇몇이 따라붙긴 했으나 종자라면 모를까, 세력이라 칭할 수준이 아니었지. 여기서 그를 따르기 시작한 놈들은 당연히 논외고…… 충분히 홀로 천산을 오르고 있는 이를 개떼처럼 덤벼들어서 막자고?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 자식이……!”
화불유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듣지 못했느냐? 놈은 신녀의 뜻마저 거부하고 마교의 전통을…….”
“전통? 착각하지 마라, 불유.”
“…….”
“성화를 신물로 받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참고일 뿐이다. 지금까지 마교를 지탱해 온 가장 중요한 이념은 강자존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뜻이 아니란 말이다. 가장 강한 자의 뜻이 곧 마교의 법. 그게 싫다면 목숨을 걸고 당당히 맞서라.”
차디찬 조소에 화불유의 눈 주위가 잘게 떨렸다.
“이런 미친! 그러고도 네놈이 육가의 주인이란 말이냐? 벌써 세 개의 가문이 무너졌다.”
“…….”
“지금 지켜 내지 못하면…….”
“그래서?”
“뭐?”
“겁이라도 먹어야 하는가?”
“뭣이?”
“나는 염인 북리가의 주인이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강하다면 나 역시 그에게 고개를 조아릴 것이고, 그 뜻이 옳다면 따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교주님께서 질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도평! 교주님께서는 이미 늙었다. 보고도 모르나? 얼마나 나약해지셨으면 저 중원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느냔 말이다!”
“……!”
선을 넘는 그의 열변에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던 북리도평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는군.”
“…….”
순식간에 피어난 마기가 전각의 내부를 잠식하고, 가공할 살기가 담긴 북리도평의 눈동자가 화불유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이 자식, 지금 해보자는 거냐?”
질세라 화불유마저 마기를 끌어 올리자 전각 내부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만들 해라! 이 시국에 우리끼리 싸우면 어찌하자는 말인가!”
“…….”
“…….”
또 다른 한 명의 노인, 효독의 가문을 이끄는 양춘백이 중재를 나섰지만 그들의 기세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합이라고 하나 육가는 독자적인 세력.
마도육제라 불리는 각 가문의 주인들은 이제껏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었다.
“젠장…… 이러다 놈과 싸우기 전에 우리끼리 나자빠질 판이로군. 불유, 네가 먼저 물러나라. 교주님에 대한 언사는 심하였다.”
“흥!”
양춘백의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아 댄 화불유가 고개를 돌려 버리자 북리도평 또한 불쾌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의미한 회합이었군. 협잡질이나 다름없는 너의 생각에 나를 끼워 넣지 말아라. 교주님이 인정하신 상대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그가 권좌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할 생각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북리도평은 문을 거칠게 닫으며 전각을 빠져나가 버렸다.
“망할 자식…….”
회합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자 화불유는 욕설과 함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씩씩거렸다.
“불유.”
잠시 침묵하던 양춘백이 나지막하게 화불유를 불렀다.
“나는 너의 생각에 동의한다.”
“…….”
“우리 셋을 불러 모았으니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겠지? 말해 봐, 너의 계획이 뭔지.”
호흡을 고르며 분을 삭인 화불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원로원과 장로부를 움직였다.”
“호오, 교주님의 승인도 없이 말인가? 교주의 눈을 피해 그들에게 손을 뻗고 있었나?”
“그래. 아주 오래전부터.”
“꽤 위험천만한 일을 했군. 잘못하면 가문 자체가 털려 나갈 수 있는 일인데.”
“교주님이 칩거한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마교의 존폐가 달려 있으니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겠지.”
“어쨌거나 다행이군. 하지만 교주께서 아시게 되면 당장에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그 전에 움직인다.”
“그 전에?”
“세 곳 가문과 싸우며 놈들은 지쳐 있을 것이다.”
“해서 일거에 몰아붙인다?”
“그래.”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이 동의했으나 무인 하나를 막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양춘백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흠, 어쩔 수가 없겠지?”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다.”
“총력전이군.”
“그래……. 지금부터 정상으로 향하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기어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말살한다.”
“그게 누구라도 말이지.”
양춘백이 화불유의 말을 거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명운이 걸린 싸움.
돌아설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막지 못하면 그동안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천산을 피로 씻어 내리는 한이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