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하아, 하아…….”
가쁜 숨이 연신 입김과 함께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
진무는 동토로 변해 버린 대지 위에 무릎을 꿇은 노인을 가만히 주시했다.
푸른 눈썹을 가진 노인, 여백기.
청화(靑火), 푸른 불꽃의 주인.
모르지 않는다.
꽤 오래전에 그를 만나 보았으니까.
냉기를 머금은 그의 기운은 태우는 불이 아니라 얼려 놓는 불이었다.
또한, 그 무공만큼이나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격이었던지라 꽤나 마음에 들었던 녀석이었다.
“……졌다.”
힘없이 주저앉아 버린 여백기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룡을 정면으로 맞섰고, 온 힘을 다해 버티고 버텼으나 청화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진무는 가쁜 호흡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허리를 쭉 펴 세운 뒤, 여백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백기는 의아한 눈길로 그 손을 응시했다.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건가?
패배했으니 고개를 조아리라 말하는 것인가?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
“……?”
“신명 나게 싸워 봤으면 됐잖아. 어차피 패배를 인정한 마당에 끝까지 악다구니 쓸 필요 있나. 대충 끝내지.”
“…….”
“이쪽도 지쳤다고. 이대로 올라갔다간 다음 놈에게 실력 발휘도 제대로 못 하고 죽는 놈이 부지기수일 거야. 물론 나야 상관없지만.”
“…….”
방금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싸운 상대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모습으로 친근하게 말을 건네 온단 말인가?
와중에 무덤덤하기까지 한 진무의 표정에 여백기는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뭐 해? 손잡고 일어나기 자존심 상해서 그래?”
“…….”
“아, 빨리. 목숨 걸고 싸운 상대끼리 밥 한 끼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냐?”
“바, 밥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여백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래. 밥.”
“…….”
“밤도 깊었고, 배도 고프고. 그러니까 일단 배부터 든든히 채우고 푹 쉰 다음 함께 올라가자고. 끝은 봐야 할 테니까.”
씩 웃는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리만큼 상쾌한 기분과 허탈한 기분이 동시에 찾아왔다.
망할, 밥이라니.
짓궂어 보이는 미소에 여백기는 어이없는 와중에도 실없이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찬이 시원찮을지도 모른다.”
“술만 있으면 되지.”
히죽 웃는 진무의 모습에 여백기는 결국 손을 맞잡고 일어난 뒤, 진무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 * *
여백기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청화의 가문은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산의 중턱에 이만한 장원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능선을 따라 자리 잡은 전각들과 높디높은 첨탑, 휘황찬란하게 조각된 동상들까지.
“우와!”
청우가 그 얇은 눈을 힘껏 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탄성만 안 질렀다 뿐이지 진무가 봐도 놀라울 지경이니 마냥 청우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며 앞을 막아서는 놈들을 부수는 데에만 몰두하느라 일일이 살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마교 놈들 생각보다 돈이 많구나.
“이쪽이오.”
여백기가 손님으로 맞이한 진무 일행을 안내한 곳은 작은 전각의 후원이었다.
조촐한 연회상이 준비되어 있긴 했으나 악공의 음율 한 자락 흐르지 않고, 화려한 손짓의 기녀도 없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여백기는 진무를 이끌고 상석에 자리 잡은 뒤 아무런 말 없이 술을 따랐고, 진무는 잔을 채우는 술을 천천히 받아 마셨다.
말로써 이루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술잔을 주고받을 뿐.
잔에 담긴 술이 곧 말이요, 마음이라는 여백기의 태도가 진무는 썩 흡족했다.
전투 중에 긴장된 몸을 이완시키기에는 적절한 휴식이었다.
진무와 여백기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 잡은 황신과 아이들, 대궁과 능서현, 그리고 청상과 청우.
청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게걸스럽게 손을 놀려 음식을 입에 담았고, 청상은 어색하게 웃으며 나무랐다.
“청우, 너는 어찌 이리도 조심성이 없느냐?”
“눼?”
벌써 음식으로 입 안이 가득 찬 청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저들의 초대를 받았다고는 하나 전투가 이어지는 중이다.”
“…….”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괜찮은데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입은 씹기를 멈추지 않았고, 손은 쉬지 않고 수저를 놀렸다.
“어휴, 이 녀석아.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이었다.”
“차암, 사형도. 접대를 받고도 먹지 않는 것은 실례라구요, 실례.”
“…….”
해맑기만 한 청우의 모습에 청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으로 손 많이 가는 녀석이다.
아마 악한 마음을 먹은 자들이 노렸다면 가장 먼저 죽는 건 청우일 터다. 독이든 뭐든 상관없이 입에 욱여넣고 보는 녀석이니까.
“저들을 봐라. 술은 물론 담고 있는 그릇들에까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청상이 황신과 아이들을 힐끗거리자 청우가 눈을 끔벅이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진무를 쳐다봤다.
“사숙은 그냥 드시잖아요.”
“…….”
정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이건 뭐 돼지 귀에 경을 읽어 주는 것도 아니고.
“사숙과 네가 같으냐?”
머리를 쥐어박으며 잔소리를 해 대는 청상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상태에서도 꾸역꾸역 잘만 음식을 삼켜 대는 청우의 모습에 모두가 상황을 잠시 잊고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잔소리를 달고 사는 어미 새와 그것마저 받아먹고 살이 피둥피둥 오른 새끼 새의 느낌이랄까?
“드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형님.”
음식의 확인을 끝낸 소동보의 말에 그제야 모두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넘치도록 주고받는 술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는 와중에 청상이 능서현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능 호위님.”
“말씀하십시오.”
“청화는 어떤 곳입니까?”
“……?”
“성향은 비슷하나 다른 이들과 달리 마기가 진하지 않아서요.”
진무는 관심 없다는 듯 술잔을 기울이는 데 여념이 없었으나 나머지는 궁금하였던 모양인지 금세 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긴 중원에 알려진 것이라고는 동천에 대한 일부의 내용일 뿐일 터.
최강의 무인으로 알려진 북리도천이 자리 잡은 천산은 중원의 어떤 이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그런 천산에 마기가 아닌 기운을 가진 자들이 가문을 이루고 있으니 청상이 궁금해할 만도 했다.
때마침 조촐한 연회이니 잠시 마교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여긴 능서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마교의 그것과는 다르니까요.”
“달라요?”
“예. 청화는 원래 본교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천산 너머 동토에서 살던 이들이지요.”
“동토라면?”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인 곳입니다.”
“그런 곳에도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군요.”
“예. 따뜻한 곳을 찾아 영역을 넓히던 중 천산에서 본교와 부딪혀 패했으나, 푸른 불꽃과도 같은 그들의 힘을 높이 산 당시의 교주께서 일족 전체를 본교의 한 가문으로 받아들이셨지요.”
“그렇군요. 어쩐지 빙공이 뛰어나다 했더니.”
“예. 청화의 빙공은 마교에서도 특히 절예로 손꼽힙니다. 염인 북리가의 무공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지요. 때로 몇몇 교주를 배출하기도 했고요.”
“흐음, 염인 북리가라…… 그들은 극양지기의 무공을 사용하는 모양이군요?”
“하하, 현 교주님의 무명을 모르십니까?”
“아! 적염……?”
“예.”
능서현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백기에게 시선을 옮겼다.
“청화와 염인.”
“…….”
“마교를 대표하는 뛰어난 무공입니다.”
“그렇군요. 한데 그가 어찌 사숙의 손을 잡았을까요? 듣기만 해도 자존심이 강한 인물 같은데.”
“그건 저들의 역사 때문입니다.”
“역사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들도 받아들여졌다고.”
“……아!”
“또한, 그들은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니까요.”
“그렇군요. 그가 사숙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위험은 없었던 것이군요.”
“예.”
“이런, 청우의 말마따나 제가 결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의심부터 했으니…….”
청상이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드는 시비들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괘념치 마세요. 모르고 한 것이니 저들도 용서할 겁니다. 어쨌든 많이 먹고 푹 쉬도록 하시지요. 청화가 우리를 받아들인 이상 안전한 밤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청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일행도 능서현의 말에 마음이 편해져 이내 긴장을 풀고 제 앞에 차려진 음식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막 술잔에 손을 가져가려던 황신이 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가벼운 발소리?
분명 바닥에 닿았으나 뒤꿈치가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리를 죽였다는 것은 무언가를 감춘다는 뜻. 또한 미약한 소리는 정확한 거리의 예측을 어렵게 했다.
이런 씨부럴, 아직 한 점도 못 처먹었는데.
왈칵 솟구치는 짜증에도 황신은 본능적으로 재빨리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에 집중했다.
슥, 스윽.
사박거리는 소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땅바닥이 아니다. 분명 작은 알갱이를 밟았을 때 나는 그것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눈?
황신이 벌떡 일어나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래, 당연히 눈이겠지. 사방 천지가 눈밭인데……. 쌍, 엿 됐다.
갑작스러운 황신의 반응에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형님, 어찌?”
“황 호위님?”
주둥아리들 좀 닥쳐. 잡음 넣어서 방해하지 말고!
황신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이 들은 소리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분명 어딘가에 좋지 않은 뜻을 품은 놈이 접근하고 있었다.
어디냐?
황신이 재빨리 놈의 은신처를 찾았다.
은신의 기본은 사람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사각 지역에 잘 띄지 않는 모습으로 숨어 있는 것.
눈에 확 띄는 무인으로 변장했을 리는 없으니, 후원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가장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는 놈이라면?
황신의 날카로운 눈길이 음식과 술을 나르는 이들과 시중을 드는 이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재수 없이 슥슥거리는 소리와 일치하는 지점…….
찾았다.
“안전하기는 씨발, 개소리하고 있네!”
성마른 욕설과 함께 황신이 곧장 몸을 날렸다.
“어? 황 호위……?”
모두의 시선이 황신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진무와 여백기가 있는 곳이었다.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있던 시비가 별안간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흩뿌렸다.
“이, 이런!”
누군가의 경호성이 터져 나왔으나 이미 하얀 섬광이 여백기와 진무를 뒤덮은 후였고, 시비가 날카로운 예기를 가진 비수를 쥔 채 섬광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파파팍! 까아앙!
절체절명이라 생각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쇳소리.
푹!
“끄으윽.”
하지만 시비는 찰나의 틈새를 파고든 황신으로 인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시비의 목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앞을 막아선 황신의 송곳에서도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런 개새끼가…… 천주님의 개인 호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디서 함부로 칼질이야?”
진무는 욕설과 함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황신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시비는 분명 두 가지 공격을 행했다. 황신이 튕겨 낸 비수와 하얀 섬광.
뚝, 뚝, 뚝.
“…….”
황신의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비수는 송곳으로 막고 하얀 섬광, 암기를 제 몸으로 막은 것이다.
풀썩.
생각보다 암기의 양이 많았기 때문일까?
황신이 비수를 꽉 움켜쥔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멍청한 자식이 그냥 둘 것이지…… 제까짓 게 뭐라고 나를 지키려 위험에 뛰어들어?
황신을 바라보는 진무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크악!”
“으악!”
그것이 신호가 된 것일까?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 문주.”
“…….”
“그대가 준비한 여흥은 아니겠지?”
진무는 싸늘하게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보!”
“예!”
“황신을 살펴.”
“예!”
빠르게 다가선 소동보가 황신의 몸에서 암기를 뽑아내고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피를 지혈했다.
“암습자다. 모두 주위를 경계해라!”
“예.”
진무의 명이 내려지기 전에 일단의 사태를 목도한 무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고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여백기가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황신에게 목이 뚫린 시비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거처에 이토록 쉽게 잠입해 올 수 있는 자.
그리고 삼엄한 경계를 뚫고 자신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면 필시 그들이 자랑하는 암수영(暗手影)일 것이고, 그 말은 화불유가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감히 자신의 가문에 숨어들어 손님으로 청한 이들에게.
“흑살…… 네놈들이 감히.”
쩌저적!
분이 치민 여백기의 눈동자에서 새하얀 광망이 토해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으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허연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들.
독이다.
흑살에 이어 효독까지…….
여백기는 더욱 거대해지는 분노에 수염마저 부들부들 떨어 댔다.
놈들은 지금 모든 힘을 쏟아부을 생각이다.
신교를 천명해 버린 저자에게 자신들이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으려고.
“적어도 자네가 준비한 여흥은 아니란 말이지?”
“…….”
진무는 옷을 툭툭 털고는 일휘를 어깨에 걸쳐 올렸다.
“우리에게 맡겨라! 저들은 내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지. 근데 내 새끼가 다쳤네?”
“…….”
분명 밝게 웃는데 소름이 돋아 오른다.
“실력도 안 되는 게 나를 막아 준다고 말이지. 나도 남 싸우는 걸 구경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데…….”
“…….”
“이렇게 열 받게 만드니까, 내가 가만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푸념하듯이 내뱉는 목소리가, 걸어가는 등이…… 두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마치 그의 주위의 공기가 바뀌어버린 것처럼, 걸음마다 자신이 뿜어낸 한기보다 가일층 냉랭한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