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94
394화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북리도천의 명에 의해 천산 정상의 초옥은 진무의 거처가 되었다.
염왕대의 무인들이 호위하듯 외곽을 지켰고, 마교의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것은 진무와 그를 따라온 여덟 명의 무인뿐이었다.
두 사질인 청상과 청우, 이곳저곳에 묵혀 두었던 소식을 전하고 있는 대궁, 그리고 호법을 자처하는 황신과 소동보, 각출.
아, 물론 능서현은 버르장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황신이 꼬박꼬박 하대를 일삼는데도 묵묵히 그의 수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원래 자리라는 게 깡패였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서열전을 다시 한번 하라고 해야겠다.
해독제를 구해 와서 어깨까지 올라온 독기를 말끔히 해제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능서현의 공이었다.
한데 나이도 어리고, 자신의 팔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저놈을 계속 대장 자리에 앉혀 놓을 수 없지 않은가?
어쨌든 진무는 남은 시간 동안 회복에 집중했고, 남은 이들은 초옥 주위를 호위하듯이 지키며 기다렸다.
말이 호위지 염왕대가 지키고 있는 판에 그들이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소일거리를 애써 찾아야 할 정도로.
* * *
“후우…….”
진무는 찬찬히 자신의 호흡을 고르며 선기를 운용했다.
천산설초로 담갔다는 술은 정말 효과가 끝내줬다.
하긴 즙을 짜서 한 병을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천산설초가 들어갔을지 상상도 안 된다.
그걸 여덟 병이나 마셨으니.
북리도천 녀석,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사업 수완은 없는 모양이다. 이런 기가 막힌 특산품을 팔려고 하지 않다니.
나라면 벌써 중원에 팔아서 큰돈을 챙겼을 것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중에 무당에도 알려 주고, 이쪽에서도 좀 만들어서 다른 도문에 비싼 값에 팔아야겠다.
공청석유까진 아니어도 웬만한 영단, 아니 영주(靈酒)는 될 테니까.
아니, 가공만 잘하면 치료용 선단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운기를 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흐뭇한 생각에 진무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자, 이제 육양진기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묵룡혼원공을 회복할 차례였다.
묵룡의 기운이야 애초부터 수련해 왔던 것이니 남은 시간에 여유를 부리며 찬찬히 수련해도 완전히 회복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일단 양의심공을 운용해서 선기를 내보내고 사기…… 사기…… 어?
순간 진무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단전에 사기가 그득 들어찬 것이다.
와중에 방 안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희한한 빛으로 가득했다.
뭔가 검……푸른?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밀려난 선기의 푸른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검은 사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니 두 색이 뒤섞인 듯한 모양새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이지?
천산설묘 대장 놈의 선단을 취했을 때 얻은 약간의 성취로 두 기운이 치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틈이 확 줄어들기는 했었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뭐 틈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과 다름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무가 사기를 거두고 선기를…….
“……허!”
놀란 마음에 속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치환되는 공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
이거 혹시?
진무는 재빨리 기운을 거두고 선기와 사기의 경계점인 백회혈을 살폈으나, 경계는 여전히 명확했다.
그런데 어째서 두 개의 기운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흐른단 말인가?
마치 단전을 중심으로 두 기운의 끝이 연결된 것만 같지 않은가?
설마?
진무는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운기를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무극이태극…….”
다함이 없이 이어지니 이것이 곧 태극이라.
지금의 상태와 일치한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태극 요결의 마지막 구절.
마음에 음양이 닿으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마음…… 이런 의미였나?”
분명 마음을 먹은 순간 선기와 사기가 곧바로 치환되었다.
이거 혹시 태극합일?
하지만 이루었다는 놈도 없고,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진무가 최초이고 유일하다.
한 번 더 확신을 가지기 위해 천산설묘 대장 놈의 선단을 취한 뒤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나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건, 한승 놈에게 선기를 흡정당했던 일?
그리고 천산에 와서 정말 한계까지 사기를 짜냈던 일.
그게 전부다.
딱히 수련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변화가 생겼단 말인가?
설마?
이 도동 놈의 몸뚱어리가 더럽게 박복한 게 아니라 실로 축복받은 몸뚱어리였단 말인가?
따로 수련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뭘 막 이루고 그런?
하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도 있었다.
진무가 무공을 익혀 온 세월 동안 수많은 깨달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각혈은 예사였고, 강기를 깨달았을 때는 열병을 앓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하다못해 무당의 태청신단을 취했을 때는 몸이 훌쩍 자랐었고, 당가의 삼양보명단을 먹고는 적사투관이라는 전설적인 경지를 경험했다.
근데 이건 뭐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태극합일이라는 것이 나름 무당의 전설적인 경지니만큼 이루었다면 뭔가 있어야 마땅했다.
“너무…… 시시한데?”
치환의 틈이 없어졌을 뿐 따로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양의심공의 전반부에 따르면, 정기신이 활성화되면 영(靈)으로서 등선에 이른다고 했다.
물론 양의심공은 선도비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 사기와 마기까지 몸 안에 담는 것이니 등선까지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마땅히 이런 전설적인 경지를 구축하면 몸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동네 꼬마도 심부름하면 잘했다고 철전 몇 푼이나 당과를 안겨 주는 것이 도리인데, 어째서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대로인 거지?
그냥 사기와 마기를 치환하는 아주 작은 틈 하나 사라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그건 양의심공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치환되는 과정에서 공격을 받게 되면 매우 위험할 수 있었다.
북리도천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그 틈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니 그와의 싸움을 앞둔 지금으로서는 꽤나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뭐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전설적인 경지인 환골탈태를 경험하지는 않더라도 각혈 정도는 해 줘야 이루었다고 여길 것인데.
아무것도 없으니 되레 의심스럽다.
그리고 나름 ‘합일(合一)’인데 백회의 경계는 어째서 그대로인 거지?
“이거…… 합일이 된 게 맞겠지?”
어색함과 희열이 공존하는 이상한 표정을 한 진무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어? 분명 합일 맞을 거야, 암.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조금 꺼림칙하긴 해도 해낸 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 그 대단한 청무조사도 못 해낸 것을 내가 해냈다.
청상아, 청우야. 이 사숙이 그런 사람이란다.
스승님, 제가 해냈습니다. 제가 태극합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요, 하하.
좋아. 잡생각 치우자. 이젠 이 상태를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선기와 사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묵룡혼원공과 무당의 무공을 수련한다.
기다려라, 이 자식아. 힘의 차이를 보여 주마.
* * *
진무가 북리도천과의 승부를 준비하며 절치부심하던 시각, 중원에서 꽤 떨어진 북쪽의 설원.
“크아악!”
북풍한설이 일으킨 소음을 뚫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으으.”
번쩍이는 보갑을 갖춘 노회한 무장이 투구가 떨어져 산발이 되어 버린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겁에 질린 눈으로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시체로, 피와 살점으로 가득한 대지.
절정고수들의 강기를 막아 내는 자신의 보갑은 천천히 걸어 다가오는 노인의 손짓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그는 너무나 강했다.
수천에 달한 병력이었으나 노인과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이들이 나타나면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요추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장.
그는 평생 하나의 임무만을 받아 전쟁을 떠돌아다녔다.
한(韓)씨의 말살.
주씨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소명왕의 자손들.
지금 나라의 근본이 되었던 자들이었으며, 태조가 모셨던 인물의 혈족이었다.
황조의 근원이 가진 유일한 오점.
대를 이어 오며 은밀하게 그들을 추적한 끝에 근래 무림에서 그들의 꼬리를 잡았고, 드디어 그 혈족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요추강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정병을 이끌고 북쪽 설원을 공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
아니 도륙당했다고 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결국 요추강은 붉은 띠를 두른 무인들에게 구금당해 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인이 반개한 눈으로 요추강을 내려다보았다.
“요영충의 자손, 대장군 요추강.”
“…….”
“주씨와 결탁해 내 증조부이신 그분을 장강의 물결 아래 수장시키더니, 이제는 그 자손이 대를 이어 우리를 쫓아다니는가. 참으로 길고도 질긴 인연이로구나.”
그저 뒷짐을 지고 있을 뿐인데도 위엄이 넘쳐 흐르는 노인의 읊조림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요추강은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씨의 수장, 한무화.
천자(天子)가 아니면서 하늘의 명이 닿아 있는 또 다른 인물.
군림하는 자의 운명으로 태어났으나 모진 세상에 태어나 비틀어져 버린 그.
“주씨의 칼에 참 많은 혈족이 죽었지. 그럼에도 나는 너희를 벌하지 않았다.”
“…….”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그리도 끈질기게 뒤쫓는 것이냐?”
담담한 목소리에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주씨의 자손은 아직도 우리 한가를 포기하지 못하였더냐? 그토록 우리를 두려워하여 너에게 명하더냐? 나의 목을 가져오라고?”
“…….”
한무화는 황제를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스스로 한가의 핏줄이라 하고, 황제를 주씨의 자손이라 칭하였다.
그 담담한 질문에 요추강이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전장에서 패전한 장수의 운명은 하나뿐이었다.
“죽여라.”
“…….”
요추강이 눈을 똑바로 뜨고 고개를 쳐들자 한무화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연 입김이 흘러 허공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래, 그래야겠지. 너는 이미 패전 소식을 황도로 보냈을 터이니.”
“…….”
“하지만 아느냐? 이제는 더 이상 쫓기지 않으려 한다. 내 직접 찾아갈 것이다.”
한무화의 말에 요추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중원으로 간다고?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단 말인가?
알려야 했다.
그는 능히 세상을 파멸로 몰아갈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알린단 말인가? 이미 소식을 전달할 이라곤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너를 시작으로 나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시산혈해를 이룰 것이다.”
“…….”
노인이 그 말을 끝으로 요추강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퍼억!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터져 나갔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대장군 요추강은 그렇게 죽었고, 한무화와 붉은 띠를 두른 무인들은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눈보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모두가 사라진 동토의 대지에 남은 것은 어느새 눈이 소복하게 쌓인 시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