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95
395화
천산에 폭설이 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쿡쿡 쑤시는 무릎을 두들기는 것이 일인 노인네들조차 이런 폭설은 난생처음이라 했으니 많이 오긴 하는 모양이었다.
내리 닷새를 내린 눈은 안 그래도 곳곳이 하얀 천산을 빠짐없이 순백으로 물들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발이 푹푹 들어갔고, 심하면 가슴께까지 오는 곳도 있었다.
너무 많은 눈이 내린 탓일까?
마교는 창건 이래 가장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체 사건 사고가 잦은 탓에 매일 회의가 열렸던 장로부의 대전은 벌써 며칠째 사람이 들지 않아 화로가 싸늘히 식었다.
하루도 쉬지 않던 무인대의 훈련도 중단되었다.
처음 맞은 휴식을 만끽하듯, 온통 눈밭이 된 천산의 연무장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몸을 회복한 진무는 긴 시간 명상을 했다.
도동의 몸에 혼이 스민 이후 가장 오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인 듯했다.
하지만 좌정한 그의 머릿속은 매 순간이 치열한 생사의 기로였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북리도천을 강제로 끄집어낸 진무는 그의 움직임을 그리며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싸웠다.
패배, 패배, 패배…….
염병할 노인네. 알고는 있었지만 더럽게 강하네.
내 머릿속인데도 당최 뚫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는다.
종일 패배로 보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진무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방법을 찾았다.
날이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몇 번쯤 반복했을까. 겨우 한 가닥 승기를 잡아 연전연승을 그리고 있을 때쯤 사위가 또다시 희붐하게 밝아 왔다.
“후우…….”
내쉬는 숨에 마음이 평온을 찾았다.
뭔가 이루어 냈다는 느낌에 머릿속은 맑았고, 몸은 더없이 상쾌했다.
하지만…….
“씻어야겠네.”
땀으로 흠뻑 젖은 터라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꼬르륵.
밥도 좀 먹어야 할 것 같고.
강렬한 허기가 밀려오자 득달같이 현기증이 일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나온 진무의 눈앞에 보인 것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이었다.
더불어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아 오르게 만드는 한기까지.
눈이…… 그새 엄청나게 왔잖아?
“사숙!”
“천주님!”
긴 회복을 끝내고 나온 진무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다가와 진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
역시나 사람은 학습의 동물인가?
일전에 괜한 걱정을 했다가 죄 머리통을 두들겨 맞은 전례가 있어서인지 섣불리 몸에 손을 대거나 상태를 캐묻지는 않았으나, 눈동자 하나하나에 진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청상만은 꿋꿋이 물었다.
“괜찮아.”
툇마루에 걸터앉은 진무는 짧게 답한 뒤, 곧장 물었다.
“그보다 며칠이나 지났냐?”
“닷새 남았습니다.”
질문의 의미를 가장 빨리 깨달은 능서현이 미리 준비했던 것인지 진무의 허기를 달랠 뜨거운 국물이 담긴 그릇을 건네며 답했다.
“닷새라…….”
그릇을 받아 호로록 소리가 나게 들이켠 진무는 하얀 세상을 응시하며 담담히 되뇌었다.
북리도천과의 결전까지 앞으로 닷새.
지금쯤 놈은 뭘 하고 있을까? 지난 닷새간 무엇을 했을까?
놀고 있을까?
잠시 북리도천을 떠올리던 진무는 피식 웃었다.
지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놈이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을 불러들이긴 했지만 순순히 권좌를 내어 줄 놈이 아니다.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범이다.
하물며 범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녀석이 놀고 있을 리 없지.
아마 지나간 닷새, 그리고 앞으로의 닷새 동안 자신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중일 터였다.
열흘은 무척이나 짧지만 한순간의 깨달음을 얻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니 이쪽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머릿속으로 그리는 대결은 무의미했다.
남아 있는 기억은 과거의 북리도천이지 지금의 북리도천이 아니니까.
남은 것은 실전을 통해 감각을 극도로 끌어 올리는 것인데…….
진무는 자신의 주위에 모인 이들을 하나하나 시야에 담았다.
어린 나이에 완숙한 의기의 경지에 오른 청상. 이제 곧 강기의 경지를 넘볼 것이다.
망할 천재 자식. 나도 저 나이 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우걱우걱.
“…….”
그리고 뒤편에서 열심히 뭔가를 처먹고 있는 청우.
저런 돼…….
아직 이 사숙께서도 식사를 끝내지 못했거늘. 하여간 먹는 것 앞에서는 영 버르장머리가 없다.
그래, 뭐. 청우니까.
그래도 꽤 번듯하게 성장했다.
청상이 잘 가르쳤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 멍청한 놈이 탄기를 넘어 의기의 경지를 바라볼 정도인 것을 보면.
그리고 황신과 아이들.
황신과 소동보는 익히고 있는 기예가 남다르니 경지는 크게 의미가 없다.
시기와 상황만 잘 맞으면 막 성강을 이룬 놈들의 모가지도 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각출.
지금처럼 수련에 매진한다면 차후엔 능히 개방의 주축이 될 것이다.
능서현이야 원래 성강의 경지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괴충은…… 차차 나아지겠지.
대궁이야 은위단 소속이니 지금의 경지로도 충분할 것이고.
다들 각기 뛰어나긴 한데 문제는…… 내 실전 감각을 끌어 올릴 만큼 강한 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상대가 안 된다.
여덟에게 합공을 하라고 한다고 해도 능서현 빼고는 차 한잔 마실 시간이면 죄 눈밭에 피떡이 되어 쓰러질 것이다.
아, 쓸모없는 것들.
어째서 내 주위에는 인재가 이렇게 부족하단 말이냐.
갑자기 신세가 처량해졌다.
아마 지금쯤 북리도천 그 자식은 육제 놈들에 염왕대주까지 불러들여서 대련하며 감각을 벼릴 것인데…….
진무의 질투 어린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혼자 할 수밖에 없나?
휴, 이 쓸모없는 것들을 하나로 뭉치면 좋으련만.
실전 같은 대련은 할 수 없어도 저들의 내공을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쓸 만한 상대가 될 텐데.
새롭게 성취를 얻게 된 양의심공의 수련에도 도움이 될 테고…….
젠장, 어쩌지?
눈 쌓인 천산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진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쳤다.
강기의 능서현, 청상을 비롯해 의기에 이른 놈들만 다섯, 의기 비스무리한 청우.
생각났다. 정말이지 기똥찬 방법이!
“얘들아.”
진무가 갑자기 온화한 표정과 따뜻한 목소리로 모두를 불렀다.
“니들이 나 좀 도와야겠다.”
“…….”
싱긋 웃는 모습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도와야지요. 성심을 다해 도와는 드리겠는데…….
소름은 왜 돋는 걸까요?
날이 추워서 그런가?
* * *
드디어 눈이 그치고, 이제 하루가 남았다.
모두가 마교의 주인뿐 아니라 역사가 바뀌어 버릴지도 모를 때를 무언의 약속을 주고받은 것처럼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산 본성의 깊숙한 곳.
수많은 악귀상이 조각된 입구를 지나 긴 복도 형태의 동굴 끝에 이르러 드러나는 거대한 철문.
그리고 그 위에 석벽을 통으로 파 새긴 글씨.
천마동(天魔洞)
성화 청염을 모신 신녀전과 더불어 마교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장소.
일찍이 마교의 초대 교주가 깨달음을 얻은 뒤 대대로 교주들의 폐관 수련장으로 사용된 그곳에서, 지난 며칠간 쉬지 않고 들려오던 굉음이 드디어 멈추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마강은 고요함이 찾아온 지 한참 만에야 철문을 열었다.
그긍, 그그그긍.
닫힌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소름 끼치는 마기가 바람처럼 불어 나왔다.
“…….”
마강은 그 내부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한 위압감과 함께 홀로 선 제 주인과 그리고 지친 기색으로 그 주위에 주저앉은 두 명의 노인.
일찍이 육제라 불리며 마교를 대표해 온 염인 북리가의 주인 북리도평과 청화가의 주인 여백기.
북리도천은 그들과 함께 천마동에 들어간 것이다.
수련하는 내내 육제 중 둘을 상대했음에도, 그는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진무에게 나머지 육제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셋, 아니 넷이 있었어도 그의 상대가 되었을까?
멍하니 북리도천을 바라보던 마강의 눈에 진한 희열이 어렸다.
분명 피부에 와닿은 것은 섬뜩함이었으나, 두려움보다는 흥분에 가까웠다.
수백 명을 채우고 남을 만큼 거대한 천마동에 홀로 섰으나 그 거대한 존재감을 비집고 들어갈 한 뼘의 틈조차 용납하지 않는 무인.
그가 바로 북리도천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상 최강의 무인이며, 마교 역사상 가장 강한 교주.
유일하게 인정했던 숙적, 혁련무강의 사후 단 한 번도 본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가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났다.
짧은 폐관이었으나 그는 전성기 때처럼 흉흉한 기세를 뿌려 내고 있었다.
어떤 놈이 자신의 주인이 늙었다고 말했던가?
마강은 지금이라도 그 부주의한 아가리를 찾아내 찢어 놓고 싶을 정도로 뿌듯한 심정이었다.
혹자는 권좌에 도전한 진무라는 애송이가 이길지도 모른다 말했다.
마교의 역사가 바뀔 것이라며 수군거렸고, 마교가 중원에 패배한 것이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놈들 또한 귓불을 찢어지도록 당겨 소리치고, 두 눈깔을 벌려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의 주인, 북리도천은 무신(武神)이다.
인간의 영역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
세월마저 비껴 버린 그는 여전히 강건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거대해져 있었다. 그저 필요하지 않았기에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
마교의 역사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중원의 애송이는 대단하였으나 결국 패배할 것이고, 교주는 계속해서 그의 치세를 이어 갈 것이며…….
“마강.”
“……!”
북리도천의 부름이 공동을 한 바퀴 돌아 감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마강의 귓가에 스몄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동 안으로 뛰어든 마강이 본능적으로 납작 엎드렸다.
“지존이시여.”
“…….”
평소와 다른 극존칭에 북리도천이 엷게 웃었다.
“지존이라…… 꽤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구나.”
“…….”
담담하지만 즐거움을 담은 목소리에 마강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하였습니다.”
마강의 말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허리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들어와 북리도천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사이 그의 앞뒤로는 탁자가 놓이고 의자가 준비되었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올려졌다.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북리도천이 의자에 앉아 찻잔에서 새어 나온 향긋함을 음미하며 물었다.
“비무장은 다 준비가 되었느냐?”
“예, 교주님.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하고 넓게 만들었습니다.”
“애썼구나.”
고개를 끄덕인 북리도천은 찻잔을 비우며 재차 물었다.
“녀석은 어찌하고 있더냐?”
“…….”
그 말에 마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자 북리도천이 한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말해 보라.”
“그것이…….”
“……?”
염왕대를 배치해 진무가 머무는 정상을 호위하게 한 마강이었다.
그의 근황에 대한 답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것인데, 마강의 무뚝뚝한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떠올라 있었다.
“개의치 말고 말해 보라.”
“……썰매를…….”
“…….”
뭘 한다고?
순간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북리도천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닷새 동안 두문불출하며 초옥에서 나오지 않더니…… 그 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습니다.”
“놀아?”
“예. 함께 온 자들과 사냥을 해서 토끼 고기를 구워 먹는가 하면…… 눈이 내리고 나서는 종일 썰매를 타면서…….”
한마디 한마디에 언짢음이 역력했다.
아마도 이쪽에서 폐관 수련까지 해 가며 일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과 비교되기에 화가 난 것이리라.
“혹시 교주님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포기한 것이 아닐지요?”
“그놈 참…….”
마강의 말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진 북리도천이 찻잔을 놓고 일어났다.
“앞서거라. 허투루 괴행(怪行)을 할 놈이 아니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직접 보아야겠구나.”
“예, 교주님.”
천마동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북리도천의 눈가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썰매를 타며 놀고 있다고?
포기를 해? 그럴 리가 있나?
자신이 보았던 놈은 절대로 그럴 놈이 아니었다.
놈은 시시껄렁한 태도와 말투에 자신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 눈빛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는 맹수의 잔인함을 분명히 목도한 뒤였다.
놈이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필경 노림수다.
그 대단한 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기괴한 짓을 벌일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