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97
397화
화르륵.
불타오른다.
마교의 역사 이래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는 푸른 불꽃, 성화 청염이 그 잔인한 혀를 날름거리며 바람에 흔들렸다.
가장 높은 단에 놓인 청염의 화로 아래, 천산신녀가 무릎을 꿇고 자리했다.
청염 아래에 놓인 단에는 일월의 깃발이 나부끼고, 거대한 태사의에 턱을 괴고 앉은 북리도천이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늦군요.”
은은한 노기가 서린 마강의 말에도 북리도천의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저 기다렸다.
지금의 흥분을 차곡차곡 쌓으며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의 침묵에 연무장 주위로 인산인해를 이룬 마교의 무인들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다.
따로 시간을 정하지 않았으니 언제 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북리도천과 마강을 제외한 모두가 새벽부터 기다린 탓에 다소 짜증 어린 표정이었다.
마도의 여섯 가문은 각자의 구역에 자리를 잡았고, 북리도천의 자리 아래 상석에 앉은 장로부와 원로원의 마인들은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산으로 향하는 길.
전령이 먼저 당도해 진무가 오고 있음을 알렸으니 곧 도착할 터였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이르러 그림자가 발끝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멀리 인영이 보였다.
권좌에 다가서려는 자.
마교의 역사를 바꾸려 하는 자.
진무(眞武).
그가 오고 있었다.
귀찮은 듯 검을 어깨에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열망이 차올랐다.
변화인가? 아니면 존속인가?
그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벌어질 싸움이 드디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지이잉!
그의 모습이 가까워 오자 우람한 상체를 드러낸 역사가 두 손으로 채를 들어 올려 힘차게 징을 때렸다.
딱히 신호가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것이 걸린 싸움에 어울리는 절차였다.
징!
두 번째 징 소리는 비록 침묵이 흐르고 있음에도 장내의 소란을 정리하고 모두를 주목시키기 위함이었다.
“교주님.”
“…….”
징 소리로 이미 그의 도착을 알고 있을 터였으나, 마강은 다시금 북리도천에게 고했다.
그리고 드디어 뜨인 북리도천의 눈에서 빛보다 밝은 신광이 뿜어졌다.
나설 때다.
지금껏 잠재운 흥분과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모조리 토출해 낼 시간인 것이다.
팔걸이를 잡고 일어난 북리도천의 시선이 잠시간 진무에게 가 닿더니, 이내 연무장에 모인 모두에게로 옮겨 갔다.
존재감을 숨김없이 드러낸 그의 위엄에 새삼 숨소리가 멎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가 단 위에서 일보를 내디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북리도천은 마치 허공에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내려서듯 천천히 허공을 걸었다.
무의 극한에 이르는 자들만이 가능하다는 천상제(天上帝).
하늘 위에 존재하는 왕이 지상으로 내려서듯이 대기를 짓누르듯이 걸음을 내디디니 실로 군림의 길을 향한 발걸음이라 할 만했다.
그의 걸음을 디딜 때마다 대기가 무거워졌다.
온몸에 존재하는 구멍이란 구멍이 죄다 막혀 토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연무장 전역을 짓눌렀다.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조차 삼킬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걸음은 이제까지 마교인들이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나는 여전히 건재하다.
또한 다가오는 상대에게 전하는 경고였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 오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면에 닿는다.
허공을 걸을 때는 그 압박감에 숨조차 쉴 수 없었으나 닿았을 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푸하!”
누군가를 시작으로 막혔던 숨이 하나둘 토해졌다.
“와아아아!”
북리도천이 걸음으로 행한 답변이 그들의 마음을 진한 흥분으로 가득 채웠으니,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열띤 함성이 잦아들고 다시금 침묵이 생겨났을 때, 북리도천은 어느새 다가오다 멈춰 선 진무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얽히고설키는 둘의 시선.
긴 시간을 돌아와 다시 만난 그들은 승부에 앞서 눈빛으로 수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진무가 피식 웃었다.
참, 지랄을 한다.
기껏 계단을 만들어 놓고는 뭐 하러 천상제로 허공을 걸어 내려온단 말인가? 내공을 낭비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 하늘의 왕은 니가 해라.
나는 네놈을 잡으러 온 지하의 악귀가 될 터이니.
진무는 천산을 내려온 걸음 그대로 천천히 걸었다.
눈을 밟아 사박거리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파고들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저 걸었다.
휘황찬란한 경공술은 없었다.
허공을 밟고 걷지도,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답설무흔도 펼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걸음걸음 눈을 짓밟으며 연무장의 가득히 메운 무인들의 틈새를 지나쳤다.
그 걸음에 신비한 힘이라도 담긴 양, 폭이 충분함에도 그의 행로에 서 있던 무인들이 좌우로 비켜났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걸음에 눈 위로 발자국이 찍혔다.
뒤따른 이들이 연무장의 주위로 자리하니 순백의 대지에 오롯이 진무가 걸어온 흔적만이 남았다.
사박, 사박, 사박.
가까이 있던 이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발소리에 음공이 담긴 것도 아니었고 딱히 내공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보폭은 일정하지 않았고, 발걸음은 정돈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든 일휘처럼 대충 걷는 걸음걸이였으나 범접하기 어려운 기도와 이상하리만큼 잘 어우러졌다.
자연스러움?
굳이 표현하자면 가장 어울릴 듯한 말이었다.
“으음.”
연무대에 가까운 인물 중 하나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길게만 느껴지던 얼마간의 시간 후.
이윽고 그가 연무대에 만들어진 작은 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 북리도천과 마주했다.
왔으니 그냥 넘기긴 그렇고, 인사는 해 주마.
“진무다.”
“…….”
짤막한 한마디.
포부 같은 것도 없이 이름만을 밝힌 그의 인사에는 고집과 오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함성은 없었다.
그저 모두가 진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흠, 시선은 죄 자네가 받아 가는군.”
북리도천이 짐짓 언짢은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원래 주인공이 다 그렇지.”
진무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망할 노인네.
일부러 최대한 늦게 왔는데 동요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되레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시간만 준 모양이었다.
“준비는 끝났느냐?”
“아직.”
“그거 안타깝군.”
“안타까울 것 없어. 그 정도로 충분하니까.”
허세 가득한 말에 북리도천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이다.
느껴지는 진무의 기세가 잔잔한 수면처럼 안정되어 있었다.
급하지 않을 것이니 가진바 모든 것을 보여 주리라.
“검으로 할 테냐? 이기어검이 제법이던데.”
“고민 중이야. 뭘로 할지.”
“자신 있는 것을 꺼내 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자신? 풉!”
언뜻 자상하게까지 들리는 북리도천의 권유에 진무가 짓궂게 웃었다.
“착각하지 마. 뭘로 해도 너보단 나을 테니까.”
“광오한 녀석.”
“기죽어 있는 것보단 낫지.”
“좋구나. 네가 상대라서.”
“마찬가지야.”
둘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잡아 갔다.
틈을 보이지 않는 위치.
조금이라도 상대의 사각을 잡는 유리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거리를 유지한 채 맹수처럼 맴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주변이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듯이 느껴졌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내민 발끝이 바닥에 닿아 멈칫하는 순간 진무의 신형이 쭉 하고 늘어났다.
슈가각!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다가선 진무의 주먹이 빠르게 휘어지며 날아들고, 허리를 젖혀 피한 북리도천의 발이 곧게 뻗어 올랐다.
빠박!
뼈끼리 강하게 충돌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쾌속한 공방이 이어졌다.
마치 구름과 바람처럼 어우러지지만 좀처럼 서로의 영역을 내주지 않는 공방.
공격은 순식간에 막히고, 방어는 첨예한 공격에 꿰뚫려 와해된다.
빠각!
후려 찬 발이 회오리처럼 선풍을 일으키며 날아들었지만 세워진 무릎에 막히고, 뒤따른 주먹이 거악의 무거움을 담고 뻗어졌으나 흩어 놓는 손길에 허공을 때렸다.
파아앙!
몇 수의 교환이 있었는지 명확히 볼 수는 없었으나 맞부딪친 둘의 주변에서 수없이 터져 나가는 파공음이 대략이나마 몇 합이 오고 갔는지를 추측하게 했다.
쩌어어엉!
한 수가 앞서면 한 수가 밀리고, 밀려난 걸음은 곧장 다가서서 상대의 허점을 노렸다.
“…….”
그저 입만 떡하니 벌릴 뿐이었다.
이렇다 할 위력의 무위는 보이지 않았으나 감히 그들이 주고받은 주먹과 발을 평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빨랐고 무엇보다 무거웠으며, 때로는 간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복잡했다.
몇몇은 오를 수 없는 나무 끝을 본 듯한 좌절감에 휩싸였고, 또 몇몇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한 희열로 눈동자를 채웠다.
휘릭, 떠어엉!
손을 휘말아 감았다 내지른 일장에 쭉 밀려난 진무가 연무대의 끝자락을 밟고 튀어 나갔다.
바닥을 낮게 스치며 한 점에서 휘돌려 찬 발이 북리도천의 발목을 향해 채찍처럼 뻗어졌다.
퓻!
뒤로 제비를 돌며 물러난 북리도천이 곧장 진무의 머리를 향해 쌍장을 뻗었다.
쿠릉! 쩌어엉!
쌍장에 담긴 검붉은 열기가 바닥을 때리고, 어느새 훌쩍 물러난 진무가 거리를 벌린 채 멈추었다.
치이익.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연무장 바닥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깝군. 머리카락 몇 올은 그슬려 놓을 줄 알았는데.”
“…….”
움직임을 멈춘 북리도천이 가볍게 이죽거리자 진무의 눈이 가늘게 찡그려졌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그다지…….”
젠장 맞을 노인네.
태생적인 강골도 아니고, 다 늙은 주제에 뼈다귀가 뭐가 이리 튼튼하단 말인가?
뼈끼리 부딪친 곳이 온통 욱신거렸다.
역시 머릿속으로 그려 본 환영과 실체는 괴리가 컸다.
“자, 탐색전은 대충 끝난 듯하고. 제대로 한번 시작해 볼까?”
북리도천이 자세를 잡는 틈을 놓치지 않은 진무가 빠르게 뛰어들었다.
“……!”
잠시 여유를 가졌던 북리도천이 빠르게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누구 마음대로 탐색전을 끝내.
냄새 안 나냐? 코 막혔어?
나 앞머리 탔다. 손톱만큼.
슈우욱! 팍, 파파팍!
단숨에 북리도천의 품 안으로 파고든 진무가 쉼 없이 주먹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북리도천의 방어막은 막강했다.
강맹하게 날아드는 주먹을 죄 흘려 버린 그의 손길이 점점 더 수를 더하더니, 이내 먼저 공격한 진무를 압도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엔 머리카락을 제대로 태워…….”
순간 진무의 몸이 움푹 꺼지듯이 가라앉았다.
“……!”
기겁한 북리도천이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발끝이 창극처럼 솟구쳐 올랐다.
무당 칠성권, 승룡퇴.
“헛!”
북리도천이 급히 고개를 꺾은 순간 진무가 곧게 뻗었던 발을 교묘하게 움직였다.
취잇!
맞는 것은 피했으나 코끝에서 시큰함이 느껴졌다.
몸을 훌쩍 물린 북리도천은 다음 공격에 대비했으나 진무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은 채 자신을 보며 빙긋 웃었다.
주륵.
“…….”
입가에 스며든 액체의 찝찔함에 북리도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코피……?
“자, 이걸로 비겼네? 탐색전은 이 정도로 하지.”
“…….”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이죽거리는 진무의 모습을 바라보던 북리도천의 눈동자에 새하얀 살기가 어렸다.
싱싱하기가 막 잡은 생선 같은 놈.
아주 펄떡펄떡 잘도 뛰는구나.
싸늘한 웃음을 머금은 북리도천이 양손을 활짝 펼치자 마기가 소용돌이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손을 쭉 뻗은 진무의 손에는 어느새 희디흰 나신을 드러낸 일휘가 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