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00
400화
“하아…… 하아…….”
호흡이 가라앉지 않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천산이 고요했기 때문일까?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크게 진무의 귓가를 울렸다.
끝난 건가? 이렇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저 괴물을 쓰러뜨린 것이.
저벅.
묘한 흥분에 휩싸인 진무가 떨리는 발을 힘겹게 떼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쓰러진 북리도천의 곁에 다가섰다.
“…….”
정신을 잃은 북리도천에게서 미약하게 들리는 고통스러운 숨소리.
망할 노인네, 혼신의 힘을 다했건만 명줄이 질기기도 하지.
하지만 다행이다.
죽일 듯이 싸웠으나 그가 죽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으니까.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그의 모습을 곁에서 보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꽈악.
진무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윽.”
싸움에 몰입했던 탓에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이겼는데.
비록 그의 입으로 패배를 시인하는 것은 듣지 못하게 되었으나 이긴 것은 이긴 것이다.
과거의 망령과도 같았던 숙적.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그가 지금 자신의 발 앞에 쓰러져 있다.
진무는 이제야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손안에 넣은 것이다.
“푸하…….”
막혔던 숨을 토해 내고서야 거칠었던 호흡이 안정되었다.
길었던 여정이다.
마음먹기는 했으나 실현할 수 있을까를 의심했던 목표.
비로소 진무는 정사마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이 권좌에서 맛봐야 할 고독을 얼마나 슬기롭게 감내하는가였다.
뭐, 상관없지 않겠는가?
아직 이 무림에는 재미있는 일들투성이니까.
북리도천도 이겼으니 청상이랑 청우, 황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전설 속에 나오는 영물들을 잡으러 다녀 볼까?
만년화리, 천년금구…… 뭐, 그딴 것들.
어쩌면 교룡이라는 놈을 만나서 묵룡혼원공으로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진무는 신나는 생각을 떠올리며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씩 웃었다.
어쨌든 이제 끝났다.
좀 쉬자.
몸이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치료가 웬 말이냐?
이런 기쁜 날은 다 같이 진탕 술을 먹고 며칠 동안 맘 편하게 퍼질러 자 보자꾸나.
* * *
“…….”
둘의 싸움이 끝났을 때, 지켜보던 모두는 말을 잃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승자에 대해 함성을 지르는 것은 최선을 다해 싸운 패자에게 모욕이었기에.
그들은 그저 침묵으로 쓰러진 북리도천과 우뚝 선 진무를 바라보았다.
진무를 따라온 자들의 눈빛에는 희열이 가득했고, 북리도천을 믿고 있던 자들에게는 짙은 절망감이 떠올라 있다는 것만이 달랐다.
털썩.
“교주님…….”
오직 한 사람.
마강만이 패배한 주인을 위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충성했던 주인의 몰락.
마교의 율법은 이제 그의 명줄을 보듬어 주지 않을 것이다.
패배한 자는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함께 죽으리라.
진무가 자신에게 아량을 베푼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인과 함께 최후를 맞으리라.
마강은 얼어붙은 천산의 땅바닥을 움켜쥐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결국…… 성화가 말한 인물은 그였던 것인가? 하늘의 뜻이 남쪽의 푸른 빛을 향해 있던 것이었어.”
침묵을 뚫고 나온 천산신녀의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교의 흥망성쇠를 점쳐 왔던 그녀의 말이 주는 힘이 마교인들의 처진 어깨를 더욱 짓눌렀다.
그리고 지금의 꿈 같은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패배했다.
한 사람의 중원인에게.
마도의 기둥인 육가가 쓰러졌고, 하늘마저 무너졌다.
곳곳에서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무인들이 속출했다.
모두가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와중, 청화 가문의 수장 여백기가 부릅뜬 눈으로 성화를 바라본다.
“저, 저럴 수가!”
“……!”
그의 당혹성에 몇몇의 시선이 여백기의 손가락을 따라 성화를 향했다.
“저, 저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저마다 토해 내는 비명 같은 외침과 당황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표정들.
“이, 이런! 성화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던 천산신녀의 주름진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아, 안 된다! 바람을 막아라. 성화를 살려야 한다! 어서 불을 지필 것들을 모아 오너라!”
다급해진 천산신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화르르…….
꺼지고 있다.
천 년을 버텨 왔던 마교의 성화, 청염이 마치 생을 다한 것처럼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다.
이건 북리도천의 패배와는 다른 문제였다.
그는 한 사람의 교주이나 성화 청염은 마교를 지탱해 온 신물이었다.
마교의 역사에서 청염이 꺼진 적은 없었다.
하필이면 자신의 대에 와서…….
그런데 어째서인가?
성화의 변화가 예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마교의 몰락인가?
아니면?
명을 받은 신녀부의 여인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가운데 천산신녀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녀의 주의 깊은 눈동자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교…… 교주?”
* * *
쿵, 쿵, 쿵…….
심연 속에서 무언가를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목소리가 아닌데, 어찌하여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은가?
그 소리는 점점 더 몸집을 키우며 귀가 멍멍 울릴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북리도천의 앞에 멈추어 섰다.
눈을 뜬 북리도천은 몸을 웅크린 채로 다가온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있음에도 유달리 시커멓게 보이는 물체.
너는 대체 뭐지?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지?
제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일까?
놈이 일렁거림을 만들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글자를 각인하는 것처럼 똑똑히 새겨졌다.
「멍청한 질문이군. 이곳은 너의 마음속이다.」
“마음속?”
「그래.」
“그렇군. 하긴 정신을 잃었으니.”
마음속에서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것이 신기할 만도 한 일인데 북리도천은 그저 피식 웃고는 좌정하고 앉았다.
「어떤가? 처참하게 패배한 기분이?」
“…….”
북리도천은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대답을 들었다는 양 일렁거리며 다시금 말을 걸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참인가?」
“이미 진 싸움이니까.”
처음으로 입을 통해 뱉어진 북리도천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진 싸움? 우습군. 너도 알 텐데?」
“무슨 소리지?”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네 힘.」
북리도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힘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다. 더 이상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
「나는 천 년을 살아온 존재. 마기를 머금은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너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패배에 대한 지독스러운 절망이 느껴지는군.」
그림자의 평가에 북리도천은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대체 무엇이길래?”
「알고 있지 않은가?」
“…….”
조금 전의 일렁임이 마치 미소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너희는 나에게 청염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
“청…… 성화?”
「그래. 너희들이 부르는 이름.」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청염이 살아 있는 존재라고? 그저 불꽃이 아니라?
「그저 불꽃이었지.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너희가 가졌던 수많은 원념(怨念)이 쌓여 나를 완성했다.」
“원념……?”
「당연하지 않은가?」
“…….”
「마(魔)가 어째서 마인가? 시기, 질투, 복수, 원망, 혐오…… 그 모두가 모여 탄생한 것이 바로 마(魔)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자란 것이 바로 나, 너희가 청염이라 부르는 존재이지.」
북리도천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눈앞의 그림자가 정말 청염이라면.
그 천 년 동안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자신들이 가졌던 수많은 부정적 감정 때문이었단 말인가?
참으로 비통하다. 저딴 것을 성화라 부르며 신성시했었다니.
「아, 나를 탓하지는 말라고. 어느 순간부터 꺼지지 않는 나를 귀하게 여긴 것이 바로 그대들이니까.」
“그래…… 그랬지. 참으로 미친 짓이었군.”
허탈하게 웃는 북리도천을 향해 그림자가 묻는다.
「이기고 싶지 않은가?」
“뭐?”
「즉각적인 반응이군.」
“…….”
「이기게 해 줄까?」
지나치게 달콤한 목소리.
그 한마디가 북리도천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순식간에 탐욕을 불어넣었다.
「그저 손을 내밀면 된다.」
“…….”
「지금까지 없었던 힘을 얻어 너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새롭게?
북리도천은 묘한 눈빛으로 그림자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힘이라니. 설마하니 이놈이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란 말인가?
「어떤가? 나를 믿어 볼 텐가?」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북리도천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무너지는 게 좋은가? 저 애송이에게?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할 테냐?」
“…….”
「저놈이 너를 따랐던 이들을 용서할까?」
“…….”
「아마 다 죽을 것이다.」
“…….”
「알잖아. 놈은 마교를 바꾸려 하고 있어. 아마 모조리 뒤집어엎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겠지.」
그림자는 쉬지 않고 그를 충동질했다.
「손만 내밀면 돼. 너는 최강의 이름으로 다시 군림하게 될 것이고 너를 따랐던 이들은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마교는 다시 존속하겠지.」
“…….”
침묵을 거듭하던 북리도천은 고민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얼 고민하고 있단 말인가?
잠시 탐욕스러운 마음이 들긴 했으나 지나간 일을 되돌려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헛소리.”
「……?」
북리도천의 눈이 고고한 빛을 내며 그림자를 비웃었다.
“네놈이 뭐라도 되는 양 이야기하지 마라.”
「…….」
“너는 그저 하찮디하찮은 잡불일 뿐이다.”
「잡불이라.」
“나의 패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내 힘의 전부였고, 놈은 나보다 더 강했으니까. 물론 지고 싶지 않지. 하지만 나는 북리도천이다. 하찮은 네놈 따위의 손을 빌려 무언가를 이루지 않는다.”
「그럼 너의 수하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나를 이긴 녀석을 믿는다.”
「믿어?」
“그래. 녀석은 아마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야. 모두를 품을 만큼 거대한 녀석이니까.”
「어지간히 높이 평가하는군.」
“그래. 최강의 상대였으니까.”
「흐음.」
“그러니 잡소리 늘어놓지 말고 이만 꺼져라. 지금은 몸도 마음도 힘드니까.”
「무척이나 아쉽게 되었군. 스스로 손을 내밀었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인데.」
“……?”
「난 그냥 선택권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뭐긴? 이런 거지.」
스으으으.
“……!”
그림자가 기체처럼 확 흩어졌다.
“이놈…… 감히!”
「큭큭큭, 버티지 마라. 내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천 년을 살아온 원념의 정수.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지.」
“으으으…… 내가 네놈 따위에게 질 것 같으냐?”
「당연한 소리. 이미 너의 마음속에는 탐욕의 씨앗이 자라났다. 최강이라는 이름, 지고 싶지 않다는 욕구…… 네가 부정한다고 해도 패배로 피폐해진 네놈의 마음에 그 탐욕이 자리 잡고 있는 이상 나의 의지를 이길 수 없다.」
“끄아아아!”
어둠이 순식간에 북리도천의 칠공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북리도천이 차분하게 변했을 때, 그의 눈동자는 새파란 귀기를 토해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