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정말 지독한 싸움이었다.
시커먼 기운으로 주변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피에 젖어 혈신이 된 와중에도 세상을 칼질로 빼곡히 뒤덮은 놈은, 법술이 아니어도 지나치게 강했다.
하마터면 봉인이 아닌 소멸이 될 뻔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겼다.
자신은 버텼고, 놈은 자신의 일격에 격중당해 쓰러졌다.
“헉, 헉…….”
청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진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망할 놈.
이렇게나 짓이겨지고 갈가리 찢어진 몸으로 자신을 괴롭혀 대다니…….
툭툭.
발로 엉망진창이 된 몸을 건드려 봤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졌던 사기도, 자신을 괴롭히던 선기도, 심지어 호흡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유심히 살펴봤지만 역시나였다.
초점 없이 활짝 열린 동공.
흐르는 핏물에서는 더 이상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어느 모로 봐도 싸늘히 식어 가고 있다.
확실히 죽었다.
자신을 위협할 수 있었던 최강의 상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 것이다.
“크핫핫핫!”
진무의 죽음을 확신한 청염이 고개를 쳐들고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천 년이나 산 나다.
네놈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한낱 인간 주제에 그 긴 세월을 버텨 온 내게 지구력으로 승부를 걸다니.
너는 처음부터 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청염은 그렇게 자신의 승리를 만끽하며 한참을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웃음을 그친 청염이 멀찍이서 자신을 보고 선 이들을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숙…….”
울먹이는 청우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검을 세워 든 청상.
“천주님이…….”
“저 괴물 같은 사람이…….”
불신 가득한 눈빛의 황신과 아이들, 그리고 대궁.
“큰일이오. 마성에 빠진 교주님을 이제 어찌 막는단 말인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된 마교의 무인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천 년의 역사가 끝나는 것을 이대로 두고 보아야 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소. 모두 힘을 합해 막아야 하오!”
한참을 고민하던 북리도평이 기운을 모조리 끌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
사사로이는 자신이 믿고 따랐던 형님이었고, 공적으로는 마음속 깊이 존경해 온 마교의 주인이었으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그에게 칼을 들어야 한다면 자신이 먼저여야 했다.
이미 중원인에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성에 빠져 버린 교주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남은 것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를 죽여 천년마교를 존속시키는 일이었다.
“북리가, 아니 전 마교는 들어라! 지금부터 교주를 죽인다!”
“…….”
심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이겨 낸 그의 명령에 마교의 무인들은 고뇌를 떨치고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교주를 막지 않으면 자신들이, 천산이, 마교의 운명이 이곳에서 종지부를 찍을 것을 모두가 알기에.
“도와주시겠소?”
마교인들에게서 시선을 뗀 북리도평이 청상을 응시했다.
한눈에도 알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나 진무와 함께 온 이들 중 그가 수좌임을.
“알겠습니다. 돕겠습니다.”
“고맙소.”
청상이 검을 거꾸로 쥐며 포권하자 북리도평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청우야.”
“……예 사형.”
“그만 울고 주먹을 쥐어라.”
“…….”
“이것은 사숙의 복수이기도 하나, 한 사람의 도사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마성에 빠진 북리 교주는 필시 세상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
“민생의 평안을 지키는 무당의 도사로서 북리 교주를 절대로 세상으로 내보내서는 안 될 일. 목숨을 잃게 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천산에 묶어 두어야 한다.”
결기 어린 말에 소매로 눈물을 닦아 거둔 청우가 화광이 형형한 눈으로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능서현은 두 사형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으로 인정한 진무를 따라다닌 사질이라더니 참으로 잘 배웠다.
아니, 본디 그만한 역량을 가진 자가 사숙을 잘 만난 것이라 해야 하나?
어쩌면 그는 죽은 진무를 대신해 능히 정파의 큰 기둥으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진무가 죽은 이상 그들과의 인연은 끝났고, 후에 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나 지금은 모두가 일어나 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북리 교주를 막아야 했다.
“돕겠소이다, 청상 도장.”
“예.”
능서현이 청상의 옆에 자리하자 황신이 송곳을 날카롭게 세웠고, 소동보가 비수를 양손에 감아쥐었다.
뼈다귀를 든 각출과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은사를 늘어뜨린 괴충, 철궁의 시위를 당긴 대궁도 함께였다.
“크크크. 미친놈들.”
각기 뿜어낸 전의가 주변을 가득히 채우는 것을 느낀 청염이 비웃음을 한껏 머금었다.
지금 자신과 싸우려 하는 것인가?
북리도천도, 저 망할 도사 놈도 막지 못한 자신을 고작 그 정도의 무위로?
청염의 눈에는 죄 쓸모없는 것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여 줄 것들이 한가득이구나.”
진득한 살기로 번득이는 눈을 빛내며 나서던 청염이 문득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 형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넝마가 되어 버린 발.
죽은 진무처럼 자신이 차지한 북리도천의 몸도 온전치 못했다.
진무의 주먹에 뼈마디가 온전한 곳이 없었고, 휘두른 칼에 베인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다.
“뭐, 상관없지.”
애초에 팔십을 넘은 노구였다. 오래 차지할 마음은 없었다.
“흐흠…….”
청염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들을 스산한 눈길로 훑다가, 청상에게서 멈췄다.
“아깝군. 젊고 싱싱하고…… 몸 안에 쌓인 선기만 아니라면 바로 옮겨 갔을 것인데.”
빙의.
혼이 육신에 스며드는 것.
이미 한 번 해 보았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하지만 탐이 나도 선기를 머금은 놈에게 들러붙을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으니까.
“조금 늙기는 했으나 저놈이 그나마 가장 강한가? 마기를 머금고 있으니 차지하기도 쉬울 테고.”
청염이 아쉬운 듯 청상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으로 나선 북리도평을 바라보았다.
“좋아, 일단은 네놈으로 정하도록 하지.”
기괴한 미소를 머금은 청염이 그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굳이 급할 것이 없었다.
영으로 존재하는 자신이 아닌가?
어차피 늙어 죽을 것도 아니고…….
청염은 지금의 짜릿한 기분을 최대한 즐길 참이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한 놈씩 부숴서 고통스러운 신음에 담긴 원한을 만끽하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를 찬찬히 감상할 것이다.
“크크크.”
청염은 그들의 눈에서 느껴지는 독기와 분노, 그리고 두려움을 하나씩 귀기 어린 눈동자에 담으며 진무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청염이 나섰음에도 그를 막고자 결의한 이들은 좀처럼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새파랗게 귀기를 흘리는 눈빛은 절로 공포심을 가지게 했고 무지막지한 살의는 대기를 짓눌러 숨 쉬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모조리 죽여…….”
“흐헙! 쿨럭!”
“……?”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밭은 숨소리에 이어 무언가를 토해 내는 소리가 들리자 청염이 우뚝 멈췄다.
분명 뒤에서…… 설마 놈이?
숨이 끊어졌었다. 선기도 사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데 이 소리는……?
청염이 불안함과 의문이 뒤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엎드려 피를 게우는 진무의 모습이 청염의 떨리는 눈동자에 비쳤다.
어째서, 어째서 죽은 놈이 다시 일어난단 말인가?
“후우…….”
한참을 그렇게 검은 핏물을 게워 내던 진무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씨발, 하마터면 팔자에도 없는 신선이 될 뻔했네.”
“…….”
정말 살아……났다?
죽어도 세 번은 족히 죽었을 것 같은 행색을 하고서 일어나더니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당황, 황당.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청염도, 북리도평도, 청상을 비롯해 지켜보는 모두가.
“휴우, 어쨌든 별일 없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한동안 멍하니 진무를 쳐다보던 청염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놈이 어떻게?”
허리를 꼿꼿이 편 진무가 청염을 힐끗 쳐다봤다.
어떻게는, 이 새끼야.
등선하려던 중에 돌아왔지.
저승차사 놈이 머리카락 휘어잡고 다녔을 때도 버틴 나야.
이제 와서 등선을 하겠냐?
“오래 기다렸어? 망할 신선 노인네들이 하도 붙잡아서 말이야.”
“……네놈 대체 무슨 소리를?”
청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해하지 마라, 귀신 새끼야.
나도 지금 처음 겪은 일이라 뭐가 현실이고 뭐가 꿈인지조차 헷갈리니까.
그리고.
“어이, 북리도천.”
“…….”
북리도천이라고?
죽었다가 살아오더니 미친 걸까?
이미 자신에게 혼을 잠식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그리 부른단 말인가?
청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진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최대한 빨리 구해 주마.”
“…….”
제정신인가?
황당함이 물씬 느껴지는 청염의 표정에 진무가 피식 웃는다.
새끼, 놀라기는.
아까까진 몰랐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냥 딱 보니까 보인다.
태극을 이루었기 때문인가?
“…….”
북리도천의 몸 안에 자리 잡은 두 개의 색깔, 푸름과 붉음.
아마 푸른 놈은 저 잡불 놈일 터이고 붉은 건 북리도천이겠지.
북리도천 녀석, 끈질기게 버티고 있구나.
그래, 열 받겠지. 잡귀 따위에게 이용당하고 있으니.
나라도 그랬겠다.
“빨리 끝내자. 아무리 태극을 이루었다곤 해도 지금의 몸으론 나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
“천 년간 쌓인 원한? 세상을 피로 물들이겠다고? 미친 새끼. 자, 와 봐. 지독한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줄 테니까.”
턱을 살짝 치켜든 진무가 청염을 깔아보며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렸다.
“이 개자식이…….”
“…….”
기분 나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잡불 주제에 겨우 등선을 면한 도사에게 욕을 지껄이네.
“와 보라니까? 뭘 기다려?”
“…….”
거듭된 도발에 청염이 눈 주위를 씰룩거리며 진무를 노려보았다.
저 눈빛……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막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투명함이 느껴지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
그런데 어째서 주저함이 드는 것일까?
청염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진무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모든 기운을 잃고 일반인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살피고 또 살펴도 진무의 몸에서 한 올의 진기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청염이 사악하게 웃었다.
미친놈은 네놈이다.
죽었다 살아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한 게야.
오냐, 다시 죽여 주마.
숨이 끊어졌던 놈이 무슨 이유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여 주마.
“크크크.”
“…….”
북리도천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시금 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진하고 강해진 귀기에도 진무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강하긴 하지만 선명히 보인다. 그가 뿜어낸 귀기의 흐름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해서 조금 더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파아앙!
거칠게 지면을 박찬 청염이 새파란 안광을 토하며 진무를 향해 쇄도해 왔다.
빠르고 강하다.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면전으로 다가온 그가 진무의 몸을 찢어발길 듯이 손가락을 세워 뻗었다.
진무는 그저 담담히 양손을 뻗어 귀기의 흐름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볍게 밀었다.
투우웅!
빠르게 교차하며 휘둘러지던 손아귀가 허공을 찢으며 청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
공격에 실패한 청염이 곧바로 튕기듯이 몸을 내밀며 주먹을 뻗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였으나 진무에게는 달랐다.
주먹에 담긴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디를 어떻게 부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흘려 버려야 할지.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가 흐르는 모양이니 순(㵌)이라 하자.
진무는 날아드는 주먹에 손을 뻗어 기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후웅.
재차 헛손질을 해 버린 청염이 이상함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물렸다.
그 순간 또 다른 것이 보였다.
밝게 빛나는 하나의 점.
모든 흐름이 그곳을 향해 뭉치고 있었다.
진무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디디며 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떠어어엉!
그저 가벼운 손짓이었을 뿐인데 진무의 손이 닿는 순간 거친 충격음과 함께 청염이 비틀거렸다.
“크으윽.”
“…….”
진무는 진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청염을 보면서도 그를 쫓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그건 또 무엇이었을까? 허점? 그런 건가?
이거 참, 신선이라는 놈들이 태극을 이룬 첫 번째 인간이라 칭찬하더니.
이건 뭐 이름 지어 놓을 것들이 꽤나 많구나.
하지만 그마저도 좋다.
뭔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기가 한 점에 모였으니 혈(穴)이라 하고, 터트렸으니 폭(爆)이라 하자.
청염은 더욱 분노해서 다가섰고, 진무는 여유롭게 맞이했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흐름의 순, 모이는 혈, 터트리는 폭.
그 세 가지가 전부였으나 그 어떤 무공도 비견하지 못하리라.
태극합일.
정말이지 이루어 내길 잘했다.
지금의 기분을 더 느껴 보고 싶지만 이제 끝내자.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할 것만 같다. 너도, 나도…….
스윽.
진무가 다시 한 발을 걸었다.
발을 뗄 때는 멀었으나 짚을 때는 어느새 청염의 품 안이었다.
이윽고 진무의 손바닥이 가볍게 청염의 이마에 닿았다.
“이제 그만 소멸시켜 주마. 불 새끼야.”
쩌어어엉!
절세의 무공도 아니었고, 눈부신 강기를 뿌려 댄 것도 아니었다.
한 번의 손짓이 있었을 뿐이었다.
“크으윽…… 아, 안돼!”
안 되긴, 이 잡불 새끼야.
천 년? 지랄하고 있네.
오늘이 네 제상에 술 올리는 날이다. 올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귀기가 사라진다.
북리도천의 몸에 숨어 있던 푸른 빛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종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털썩.
혼백이 빠져나가 버린 북리도천의 육신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진무의 발 앞에.
“…….”
길고도 길게 이어졌던 전투가 종결을 맺었다.
고요함으로 물든 세상 한가운데에 자리한 진무가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눈…… 오네.”
나풀거리며 허공에 흩날리던 눈이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운 작은 솜뭉치처럼 변해 천산의 전역에 내려앉는다.
그 뜨거웠던 열기를 식히고,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흉한 풍경을 조금씩 덮으며.
그렇게 진무는 오랜 숙적과의 싸움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