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11
411화
이어지는 영왕의 이야기에 모두가 입을 떼지 못했다.
때는 지금의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
거듭되는 폭정에 뜻을 세운 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난세에는 결국 힘 있는 자들이 득세하는 법.
그때 한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를 중심으로 군호(群豪)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현 나라의 태조는 당시 가장 많은 세를 보유한 호걸로 한씨의 신하였다.
하지만 천명(天命)이 이르지 못했기에 주인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고, 해서 권력을 얻기 위해 전쟁에서 패하고 도주하던 한씨의 장자를 자신의 수중에 넣고자 했다.
그를 옹립해 주인이 가진 권력을 탈취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취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장강의 수로를 이용해 주인으로 모신 한씨의 장자를 자신의 보금자리로 데려오던 중, 과보라는 곳에 이르러 강제로 배를 침몰시킨 것이다.
그 결과 한씨의 장자는 죽었고, 신하였던 이는 지금 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과보침사라 칭하며 모든 것을 감추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네. 당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조께서는 끝없는 숙청을 단행하셨지.”
“…….”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었네. 또한 한씨의 혈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벌이라는 명목하에 끊임없이 그들의 뒤를 쫓았네. 감추는 데만 급급하였지.”
“어찌 그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하시는 겁니까?”
“나는 진즉에 자네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네.”
영왕의 담담한 말에 멍하니 그를 보던 제갈협진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설마?”
“짐작이 맞아. 자네들이 궁이라 부르는 자들을 이끄는 것이 바로 과보침사에서 죽은 그의 혈족일세.”
“……!”
제갈협진을 포함한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이 힘을 길렀다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에 그 힘을 쏟아야 할 일이 아닌가.
“한데 그들이 어째서 무림을?”
“두려움 때문일세.”
“……?”
“백 년 전, 태조께서 그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큰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지.”
“…….”
“도를 찾아 세상을 떠돌던 무당의 도사가 구해 주었다더군.”
“설마 그 도사가…… 청무라는 이름이었습니까?”
양소방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가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설마 운공의 이야기가 정말로…….
“그래, 청무. 황가에 남은 기록을 보면 그 이름이 맞네.”
“…….”
“그의 도움으로 무림계의 명숙들이 태조를 도와 그들의 반란을 막아 낼 수 있었고, 그 이후로 관무불침이라는 칙령이 선포되었지.”
“허, 그런…… 그저 운공 어른의 잡담이라 여겼는데.”
양소방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청무,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현 무림의 가장 어른인 철지량, 양소방, 벽운영이 태어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이었다.
게다가 의아하게도 그에 대한 기록은 무당에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자네들은 모를 수도 있네. 그는 태조를 도와 한씨와 싸웠네. 비록 도움을 받긴 했으나 비사를 감추고자 청무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하게 하였으니까.”
“음…….”
무거운 신음이 길게 이어졌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청무라는 자의 위업은 너무도 허황된 것이었지.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두려웠을 터. 아마 그 이유일 것이네. 그들이 무림부터 전복시키려 한 것은…….”
“…….”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제갈협진이 영왕을 향해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시면서 방치하신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네.”
“……?”
“자네라면 알 것이네. 선대가 친정에서 패배하시고 빼앗겼던 황위를 지금의 황제께서 겨우 되찾으셨지. 하나 현 황제께선 간악하기 짝이 없는 여인의 치마폭에 놀아나며 정사는 돌보지 않으신 지 오래일세.”
“귀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갈협진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일개 궁녀였던 여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비의 품계를 받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는 원성이 자자했으니까.
하지만 황가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머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네. 하지만 귀비만의 문제는 아니라네. 귀비도 문제지만 그녀의 천거로 등용된 왕직이라는 환관이 마치 폐하의 혀처럼 행동하고 있지. 감언이설로 폐하를 속여 서창을 만들고 난 뒤에 무고한 충령(忠良)들에게 죄를 씌워 죽이고 있어.”
“압니다. 동창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지요?”
“음, 내 겨우 동창을 수습하였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과거의 반도 안 되는 전력이지.”
영왕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들이 군권은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래. 아직은 오군의 좌도독이 내 사람이니까.”
“…….”
“하지만 움직이지 않을 것이네. 왕직이 서창을 움직여 철퇴를 휘둘러 그의 손발을 자르고 있으니.”
“…….”
“그리고 얼마 전 내가 운용할 수 있는 마지막 전력이 중원에서 꽤 멀리 떨어진 북쪽의 설원에서 자네들이 궁이라 부르는 자들에 의해 몰살당해 버렸지.”
영왕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고,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눈빛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 가며 나에게 전령을 보냈네.”
“…….”
“놈들이 중원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는군.”
“궁이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전령이 몇 굽이를 넘어왔으니 올해 안에 당도할 것이네.”
“음…….”
“내 더는 손쓸 방법이 없어 염치 불고하고 자네들을 찾아온 것이라네. 도와 달라고…….”
분위기가 삽시간에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한 황실의 어른이 일개 무부에 불과할 자신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제갈협진은 냉철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어차피 궁은 무림의 적이기도 했다.
와중에 영왕이 직접 찾아와 부탁하기까지 했으니 이보다 잘된 일은 없었다.
막는 건 막는 것이고 얻을 것은 최대한으로 얻어 내야 했다.
황가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들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정무맹은 명실공히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뿌리내릴 수 있다.
그가 목표했던 대로 정파의 모든 권력을 정무맹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진무 도장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갈협진이 더는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듣기로 그가 과거 태조를 도왔던 도사와 같은 도문의 출신이라 들었네.”
“음.”
“이미 한참 전부터 그의 소문을 들었지. 선대의 뜻을 좇아 중원 무림에 숨어든 궁의 세력을 와해시켰다더군.”
“…….”
선대의 뜻? 그 진무가?
그럴 리가.
어쩌다가 그에게 얻어걸린 것이 궁이었을 뿐임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밝혀서 무엇할까?
상대가 그리 높여 줄 때 의당 그런 척을 해야 물건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또한, 서안 관리들의 비리를 밝히고 원화정의 사당과 복마사에 관련한 일을 해결하였다 들었지.”
“많은 조사를 하셨군요. 순천부에서 섬서와 하남이 가깝지 않을 것인데…….”
제갈협진의 말에 영왕이 힘없이 웃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자면 눈과 귀를 향상 열어 두어야 하는 법이라네.”
“대단하십니다. 영왕 전하는 천 리를 보고 들으시는군요.”
“과찬일세. 어쨌든 그 정도의 의기를 지닌 인물이라면, 그가 과거처럼 우리 황가를 도울 것이라 생각하였네.”
“…….”
의기라…….
진무는 고작 의기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갈협진도 진무의 행보를 살피고 나서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마치 백 년은 족히 산 노고수처럼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였다.
그럼에도 도무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역시 영왕의 착각. 하지만 마찬가지로 물건 값어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착각이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좋습니다. 영왕 전하를 돕도록 하지요. 하면 이제 값을 논해 볼까요?”
“대군사!”
철지량이 국가의 대사를 놓고 흥정을 시도하는 제갈협진을 만류하려는데 영왕이 먼저 입을 뗐다.
“얼마를 원하는가?”
“돈으로 되겠습니까?”
“그럼?”
“정무맹에 폐하의 직인이 찍힌 면책권을 부여해 주십시오.”
“……관무불침으로는 부족한가?”
“관습과 법칙은 다른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곤란하네. 무림인이라 하여도 백성일세. 법의 위에 있을 수는 없어.”
“역모를 꾀하지 않는다는 것과 관과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두 가지 조건을 깜빡하였군요.”
“…….”
제갈협진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던 영왕이 빙긋이 웃었다.
“허허, 자네는 무림의 독립을 꿈꾸는 모양이군.”
“바람일 뿐입니다.”
“정무맹이 면책권을 받게 되면 세력 확장 면에서 사패천이나 마교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되겠군.”
“발 빠른 쪽이 이기는 법이니까요.”
“좋네. 내 책임지고 정무맹의 면책권에 대한 폐하의 칙령을 받아 오도록 하지.”
“…….”
수긍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렇게까지 즉답이 떨어지리라고는 제갈협진으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한 톨의 여지도 남기지 않은 깔끔한 확답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 영왕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처연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셈이군.”
“그, 그렇긴 합니다만…….”
꺼림칙한 기분이 든 제갈협진은 다시 한번 확언을 받고자 했다.
“수결을 맺어 주시겠습니까.”
“허허, 황가엔 허언이 없는 법이라네.”
“…….”
분명 자신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낸 것인데…… 어찌하여 칼자루가 넘어간 것만 같은 느낌이란 말인가?
제갈협진의 눈동자에 어린 의혹을 눈치챈 영왕이 노련하게 답을 꺼내 놓았다.
“이제 손을 잡았으니 사소한 부탁을 하나만 더 해도 되겠는가?”
“……?”
“궁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탁이라네.”
“말씀하십시오. 영왕 전하와 손을 잡은 이상 부탁을 아니 들어 드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철지량이 제갈협진이 고민에 휩싸인 틈을 타 냉큼 답했다.
“사람을 하나 찾아 주게.”
“누구를?”
사람을 찾는 것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나 영왕이 직접 부탁을 했으니 보통의 인물은 아닐 터였다.
“태자일세.”
“예? 그게 무슨?”
생각지 못했던 말에 제갈협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태자라니? 황가의 핏줄이 가출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제갈가의 일원인 자네라면 과거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귀비의 아들이 요절했음을 알 것이네.”
“그, 그렇습니다.”
“그 후 독을 품은 귀비가 황가의 핏줄을 은밀하게 독살하고 있네.”
“아니, 그걸 알고도 그냥 둔단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나. 왕직이 서창을 이용해 관직을 주무른다고……. 알면서도 막지 못하고 있다네. 폐하는 그녀를 총애하고 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증거는 없으니까.”
“…….”
영왕의 말에 제갈협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폐하의 핏줄 중 하나를 빼돌려 숨어 버린 환관이 있었네. 하지만 왕직의 서창으로 인해 동창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찾을 수 없었지.”
“…….”
제갈협진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것이었나? 그가 노린 것이…….
궁은 무림계에서도 반드시 막아 내야 할 존재였으나 태자를 찾는 일은 달랐다.
황가 내부의 문제다.
자신들이 손을 보탠 쪽이 이긴다면 상관없으나, 패한다면 무림은 철퇴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위험하다.
망할, 영왕을 너무 얕잡아 보았구나.
그가 진무를 찾은 이유가 이제야 명확해졌다.
군을 움직일 수 없으니 무림을 대체재로 쓰려는 것.
맨 먼저 진무의 행방을 찾으려 한 것은 그가 정사마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하게 성장해 버린 그가 결정하면 정사마가 모두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행적을 놓쳤으니 차선책으로 자신들을 찾은 것이겠지.
어차피 성사될 수밖에 없는 거래 조건을 미끼로 걸고 자신이 원하는 바까지 쟁취했다.
“대단하시군요. 영왕 전하께 감탄했습니다.”
“과찬일세.”
영왕과 제갈협진이 서로를 보면서 웃었으나 전자는 승자의 여유였고, 후자는 패자의 씁쓸함이었다.
“그럼, 자네들에게 도움을 줄 좌초를 두고 나는 돌아가도록 하겠네.”
“……멀리 못 나가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진이 빠져 버린 제갈협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으나 영왕은 탓하지 않고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진무 도장과 연락이 닿거든 순천부로 찾아오라 전해 주시게. 중원의 영웅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으니.”
“예,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제갈협진이 소태 씹은 얼굴로 욕설을 뱉었다.
“제기랄…….”
당한 것이다.
노회한 정치가는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움켜쥐었고,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려 머리를 굴린 자신은 토끼 올무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영왕은 지금 무림을 이용해 궁을 막고, 황가마저 쓸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황제의 위명이 더 이상 그 세를 떨치지 못하는 지금,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를 손에 쥔다면 명분은 그에게 돌아갈 테니까.
너무 위험한 배를 타 버렸다.
목적지에 무사히 당도한다면 좋겠지만, 과보침사처럼 가다가 좌초할지도 모르는 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