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15
415화
진룡 풍환자.
일찍이 나이 열둘에 입도하여 운룡대팔식을 새로운 경지까지 이끌어 낸 시대의 무인.
이전 생에서 진무가 정사의 구분을 넘어 그 됨됨이를 흠모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같은 세대를 살았던 그는 이제 늙어 자신의 앞에 서 있었고, 자신은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경지에 올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마주 서 있을 뿐인데도 묘한 위엄을 자아내는 둘의 모습에 모두가 긴장한 눈동자로 마른 침을 삼켰다.
“허허, 대단하네.”
“…….”
무엇을 한 것이 아니다.
딱히 섞이려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서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아니, 자연스럽다는 말조차 너무나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지금의 진무는 그냥 자연과 같다고 해야 할까?
비바람을 맞고 세월을 거쳐 온 산악의 바위가 그러하고, 세찬 바람에 날리며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나무가 그러하듯.
진무는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주변과 어우러져 있었다.
내쉬는 숨은 봄날 미풍 같았고, 손짓과 발짓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았다.
오랜 세월 선도를 닦아 온 풍환은 자신의 눈에 비친 진무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감탄했다.
“선기도 아니고, 마기도 아니며, 사기도 아니로다. 흐음, 대체 자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글쎄요? 딱히 무어라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구분 없는 자유로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구분이 없다라.”
진무의 담담한 대답은 화두가 되어 풍환의 뇌리를 강타했다.
도가 그러하고, 마가 그러하며, 사가 그러하듯 모두가 그 극의에 이르기를 꿈꾼다.
하지만 풍환은 진무를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극의(極意).
그것은 무언가로 구분 지어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나누어지지 않은 처음의 상태.
그곳에서 선이 났으며, 마가 만들어지고, 사가 태어났다.
삼라만상은 하나에서 시작하였으며, 죽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로 돌아간다.
진무와 마주 선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의 문 앞에 서게 된 풍환의 눈동자에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담겼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말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나 아는 말이나 그 뜻은 모르는 그것.
세상을 휘도는 물줄기는 만 갈래이나 결국 바다에 모이게 되니 그것을 물이라 한다.
도랑에 흐르고, 계곡에 흐르고, 하천에 흐르는 그것.
애초에 하나였으나 부르는 이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이름 지어졌을 뿐, 결국 그 본성은 물과 다를 바가 없음이다.
그래, 원래가 하나인 것인데 사람이 이래저래 나누어 놓으니 인위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극의에 이르지 못한 게지.
그 순간 풍환에게 희한한 경험이 찾아왔다.
머리가 맑아지는가 싶더니, 뇌가 열려 버린 듯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깨달음.
그동안 편견으로 박혔던 생각들이 한 번에 부서지듯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새로운 이치가 자리 잡았다.
“아아……!”
그 희열을 어찌 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풍환의 눈동자에 습막이 차오르고, 이내 방울져 떨어지며 땅바닥을 적셨다.
보지 못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야 할 도가 앞에 있음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길을 향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털썩.
무너지듯 주저앉아 무릎을 꿇은 풍환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감돌았다.
“고맙소. 내 삶의 끝자락에서야 겨우 보았구려.”
“…….”
어느새 말투를 존대로 바꾼 풍환은 진무를 지그시 응시했다.
지난 세월 잘못된 길을 찾아 걸어온 허망함인 듯,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밝혀 준 등불 같은 진무에 대한 감사함인 듯.
정의할 수 없는 눈빛으로 진무를 바라보던 풍환이 조심스럽게 절을 올렸다.
“사, 사숙!”
“사조님……!”
갑작스러운 행동에 곤륜의 제자들이 저마다 의아함과 놀람을 담은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 알 길이 없겠지.
도에 이른 이들의 행동은 자못 미친 짓으로 보일 때가 있는 법이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으로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
“죽기 전에 이다지도 큰 깨달음을 주었으니, 그대에게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니겠지.”
풍환은 존대였으나 진무는 더 이상 존대하지 않았다.
장난스러움은 사라졌고, 위엄 대신 담담함이 가득했다.
진무가 그러했듯이 풍환에게 찾아온 깨달음.
불가에 이르기를 돈오점수(頓悟漸修)라 한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나 기실은 이전부터 그것을 위한 점진적인 수행이 있었음을 말함이다.
풍환은 또한 그 과정을 거쳐 오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터.
그를 바라보는 진무의 눈에 어느새 슬픔이 어렸다.
먼저 경험해 보았으니 알고 있었다.
깨달았으니 가야 한다는 것을.
인간이 알지 못해야 할 것을 알았으니 그는 이생에 더 이상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진무는 미련이 많았기에 악착같이 잡았으나 풍환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대의 눈에도 나와 같은 것이 보이는 게요?”
“아니.”
풍환의 물음에 진무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다르고, 걸어온 길이 다르다. 한데 어찌 같겠는가? 나로 인해 깨달았다 하나 그것은 계기였을 뿐. 또한, 고작 깨달았다 하여 어찌 몇 마디의 말로 정의하며 같다 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은 그대의 도(道)이다.”
“하면 그대는 무엇이오?”
“나? 나는 나지.”
선문답과도 같은 진무의 담담한 말에 풍환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야 바로 보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자는 진무이되 진무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러움에 자유분방함이 담긴 너무도 익숙한 느낌.
“혁…….”
“쯧, 깨달음이 영안까지 주었는가? 그 불꽃 잡귀 놈도 알아보더니.”
“…….”
부정하지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쓴웃음을 지을 뿐.
“어찌 그대가?”
“연유는 나도 알지 못한다.”
이전에는 막연히 불로초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태극을 깨닫고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세상에 미련이 남는가?”
“…….”
풍환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진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떤가? 이제 그만 어우러져 보는 것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지금껏 그대의 발목을 잡은 미련이 아닌가?”
“…….”
진무의 말에 풍환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곤륜의 도사들을 훑었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진무와의 비무를 원했던 이유.
“허허, 그렇구려. 지난 일을 말해 무엇 할 것이며, 따진다 하여 해결될 것도 아닐 터인데.”
“…….”
“그대는 진무로구려.”
“암, 진무지.”
진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풍환의 몸짓이 진무와 비슷하게 변했다.
인위적이지 않고 바위처럼 자연스러운.
“모자란다 탓하지 말기를.”
“글쎄. 그래도 실망시키진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나중에 무덤에 술 대신 침을 뱉어 줄 테니까.”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둘은 어느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우러졌다. 물과 기름처럼 층진 것이 아니라, 소금이 물에 녹아들 듯 자연스럽게.
풍환은 맑은 날 흰 구름 사이를 민활하게 노니는 한 마리의 백룡이 되었고, 진무는 여름날 폭우를 쏟아 내는 먹구름 속 뇌전을 뿌리는 묵룡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그들의 손짓과 발짓, 그리고 움직임이 고스란히 무희의 춤사위가 되어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물고 뜯는 싸움이 아닌, 유려한 몸짓을 절묘하게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얽히고설키는 이인무(二人舞).
두 마리의 용이 만들어 내는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풍경에 지켜보는 이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람이…….”
누군가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딱히 둘 중 누구도 손안에 강기를 머금고 산자락을 뒤흔드는 기운을 품지 않았지만, 바람이 그들이 만들어 낸 움직임을 따라 흐르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이에게는 따스함으로 느껴지고, 또 다른 이에게는 차가움으로 느껴진 그 바람.
어느 순간 곤륜의 장문인 운해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어째서였을까?
풍환의 모습이 자꾸만 흐릿해진다.
분명 그는 진무를 맞이해 곤륜이 가진 모든 무학을 펼쳐 내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시간이 갈수록 그의 형체가 아스라이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곤륜의 제자들은 듣거라.”
“……?”
운해의 잔잔한 목소리가 거대한 외침보다 멀리 퍼져 나갔다.
“사숙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마지막 가르침이니라.”
“…….”
“눈에 똑똑히 담고, 가슴에 단단히 새기거라. 저분과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 늘 감사해라.”
운해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슬퍼서였을까?
곤륜의 제자들은 하나둘 눈물을 흘리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한 동작 한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둘의 비무는 해가 중천에 이르고 멀리 서산을 향해 다가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름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이 되어서야 비무가 끝을 맺었다.
진무는 처음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풍환은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무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의 팔다리를 정갈하게 추슬렀다.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육신은 마치 잠을 청하고 있는 듯 고요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쓸데없이 행복해 보이는군.”
진무가 투정처럼 말을 뱉고는 풍환의 곁에서 물러났다.
곤륜의 제자들이 풍환을 향해 묵묵히 절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룡, 풍환은 그렇게 마지막 깨달음을 얻고 등선했다.
진무는 예를 다해 풍환의 시신을 옮기며 멀어지는 곤륜 제자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붉은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와 모든 것을 감추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무는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과거의 기억을 공유했던 또 한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입맛이 무척 쓴 게, 어째 오늘도 술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청…….”
덩그러니 남겨진 청상 등을 바라보던 진무의 시선이 문득 각출에게 닿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감상이 와장창 깨짐과 동시에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각출아.”
“……예?”
여전히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각출이 고개를 돌렸다가 진무의 흉악한 눈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내자식이 놀라긴.
이리 오렴. 슬픈 와중에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니?
우린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꽤 많은 것 같단다.
밤도 길겠다, 어디 한번 찬찬히 얘기해 볼까? 각출아?
곤륜의 밤은 변함없이 고즈넉했다.
비록 진무가 머무는 어느 전각에서는 밤새도록 비명이 끊이지 않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애써 관심을 끊어 버렸다.
쓸데없는 관심은 굳이 깨닫지 않더라도 등선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등선, 도인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꿈의 경지.
그러나 지금은 풍환자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모두에겐 남은 미련이 차고도 넘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