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30
430화
자금성의 후원, 귀비가 기거하는 곤녕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음산한 기운을 품은 대전각이 있었다.
그곳에 사는 자들 이외에는 누구도 살아 나오지 못한다 하여 원래의 이름이 아닌 불귀전(不歸殿)으로 불리는 곳.
서창 제독부.
황제의 밀명으로 움직이는 동창 제독부가 건청궁의 외당에 위치한 것과 달리 서창은 내궁의 중심인 곤녕궁의 지척에 있었다.
그 이유가 귀비와 서창 제독 왕직 간의 관계에 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창 제독 왕직.
그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이었다.
본디 편전의 청소를 담당하던 직전감 소속의 하급 환관이었는데, 내궁을 관리하는 경사방(敬事房)으로 옮긴 다음부터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삼 년 전 궁녀의 신분에서 귀비의 위에 제수된 만 씨는 그를 총애하여 황제에게 천거했고, 그 직후에 서창이 만들어졌다.
이상한 것은 그가 궁에 들어온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그를 아는 이들은 다른 사람 보듯 했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은 같은데 마치 타인이 되어 버린 것처럼 변한 그.
하지만 그가 서창 제독이 된 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귀비의 반대 세력의 숙청과 황가 핏줄의 의문사에 깊이 관여하게 되자 모두가 그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모조리 삭제되었고, 그에 대해 입을 놀린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어쨌든 그는 지금의 황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 * *
서창 제독부의 거처.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환관 위정필이 왕직과 탁자에 앉아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자의 소식은 없습니까?”
“아직……입니다.”
“저런, 귀비께서 상심이 크시겠군요.”
위정필의 말에 왕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 년 전 그날.
황실의 핏줄을 하나씩 죽여 나가던 그때, 태자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는지 종적을 감춘 태자를 추적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 태자를 도망시킨 놈의 이름만 겨우 알아내었다.
완의궁 소속의 늙은 환관 오상.
“그 망할 놈이 감숙에 감추어 두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동안 순천부와 그 인근의 성만 이 잡듯이 뒤졌는데…….”
“음.”
위정필의 말에 왕직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유일하게 귀비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그의 인생에 있어 오점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어쨌든 제독께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확보하겠지요.”
“당연한 소리!”
“…….”
“태자는 절대로 살아서 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왕직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자 위정필이 답답한 듯 기침을 토했다.
왕직처럼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살기를 온전히 받아 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죄송합니다. 대태감. 제가 너무 흥분하여.”
“콜록, 콜록.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손사래를 치며 기침하는 모습에 기운을 거둔 왕직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젠 많이 늙은 모양입니다. 한창때는 이름난 장수들 앞에서도 이러지 않았는데.”
“이미 칠십의 고령이 아니십니까.”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좀 더 젊었다면 귀비마마와 대궁에 충성할 수 있었을 것을요.”
“그런 약한 말씀 마십시오. 아직 정정하십니다.”
“정정하긴요.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당치 않습니다. 대태감께서 저희 쪽으로 돌아서 주신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나요?”
“암요, 암요. 다른 이도 아니고 대태감이 아닙니까? 저희는 절대로 회유할 수 없으리라 여겼지요.”
“……귀비마마의 뜻이 제 뜻에 부합했을 뿐입니다. 썩을 대로 썩어 버린 이 나라를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다 하셨으니.”
위정필의 말에 왕직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이제 곧 영왕과 그에게 충성하는 좌군 도독 곽종상의 목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군부를 움직이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예, 칙령을 받지 못한 그들이 조바심을 느껴 멋대로 군을 움직이는 순간, 역모죄를 씌울 생각입니다. 그를 위해 서창의 무인 일부를 동원해 영왕부와 곽종상을 감시하고 있지요.”
“다행이군요. 그들은 태자를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하고 죽겠습니다.”
“예.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죽을 것입니다.”
“허허, 듣기만 해도 속이 후련하군요.”
서로를 마주 보며 빙긋 웃은 그들이 사사로운 이야기로 담소를 이어 나가려는 그때였다.
“제독 대인!”
“……?”
자신이 위정필과 대화 중인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휘하에서 전령서를 취합하는 책임자, 조현이 급히 내실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냐?”
환담을 방해받은 왕직이 눈을 흘겼으나 조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하게 말했다.
“영왕부에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뭣이? 그게 무슨 소리냐?”
“영왕을 감시하던 무인 다섯에게서 한 시진마다 올라오던 보고가 중단된 뒤로 연락이 전혀 닿지 않습니다.”
“…….”
“또한, 영왕 감시를 지원하라 명한 이평세에게서도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뭐라?”
왕직이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발각되었단 말이냐?”
“그것은 알 수 없으나 곽종상의 본가를 감시하는 곳에서 이런 것이 올라왔습니다.”
“…….”
조현이 내민 쪽지를 받아 든 왕직의 눈가가 쉴 새 없이 씰룩거렸다.
“무당지검이…… 좌도독의 집에 나타나?”
귀비의 명령으로 행적을 수소문하던 그가 갑자기 곽종상의 본가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예. 그 자리에 이평세가 함께였다고 합니다.”
“함께라고?”
“예.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잡혀 있었다고…….”
콰아앙!
조현의 보고에 분을 참지 못한 왕직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이런 멍청한! 하면 무당지검이라는 놈이 이미 영왕에게 포섭되었단 말이냐?”
“그건 아닌 듯하다 하였습니다. 접견을 청했고, 막 정문으로 들어갔다고…….”
“이…… 이……!”
이 무슨 뜬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여기서 왜 그가 등장한단 말인가?
도대체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콜록, 콜록…….”
“…….”
왕직이 분을 참지 못한 가운데 위정필이 다시 기침해 대기 시작했다.
과하게 끓어오른 왕직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런, 죄송합니다. 대태감. 제가 또 흥분하여…….”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무당지검이라면 귀비께서 찾아 오라던 이가 아닙니까?”
“예. 바로 그자입니다.”
“하면 서둘러야겠군요. 영왕이 그를 포섭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음, 제가 직접 나서야 할 듯합니다.”
“서두르십시오. 태자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당지검까지 저들에게 내주게 되면 귀비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실 것입니다.”
“예. 모처럼의 환담인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죄송이라니요? 대업을 위한 걸음에 도움이 되지 못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습니다. 콜록, 콜록.”
“…….”
위정필이 다시 고통스럽게 기침하자 그것이 자신의 살기 때문이라 여긴 왕직이 못내 미안해하며 휘하에 명했다.
“대태감을 거처까지 모셔라!”
“예!”
“그리고 지금 즉시 황성에 있는 서창의 무인을 전원 소집하라.”
“예? 하지만 감숙에 파견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얼마 되지 않아서…….”
“닥쳐라! 이 사안이 얼마나 중한지 모른단 말이냐! 잠시 황성을 비워도 좋으니 모조리 소집령을 내려 곽종상의 본가 인근에 모이라 전해라!”
“아, 알겠습니다.”
조현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왕직을 뒤로한 위정필은 서창 환관의 부축을 받아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수고하였네. 그만 물러가게.”
“예.”
서창의 환관을 물린 위정필이 비틀거리며 자신의 거처로 들어서자 일을 돌보던 어린 환관이 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좀 쉬어야겠으니 거처에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예. 늘 올리던 음식을 준비할까요?”
“그리하거라.”
“예.”
방 안으로 들어간 위정필은 침상에 누워 어린 환관이 물과 음식을 가져다 놓고 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휴, 갈수록 기력이 쇠하시니…….”
문밖에서 어린 환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성의 밤을 지배하는 대태감 위정필…… 그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윽고 그의 거처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위정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쇠약한 모습을 보였던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불 꺼진 방 안을 쏘아보던 그가 누웠던 자리 뒤편의 병풍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딸깍.
그가 손가락으로 벽과 바닥이 맞닿은 자리를 힘주어 누르자 벽채에 구멍이 나며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가 나왔다.
위정필은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주변이 안전함을 확인한 뒤, 어린 환관이 놓고 간 음식 쟁반을 들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 * *
똑, 똑, 똑…….
습기가 하나로 모여 떨어지는 곳.
작은 호롱불 하나가 밝혀진 그곳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고, 노인 위정필이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엎드려 있었다.
“대태감. 안색이 좋지 않구려.”
“아닙니다, 저하. 볕도 들지 않는 이 습한 곳에 저하를 모셔 놓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니 소신의 죄를 어찌 청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나이 차가 눈에 보일 정도인데도 위정필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비쩍 마른 왜소한 소년을 향해 저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괜찮소. 습하면 어떻고, 건하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대가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 목숨인 것을…….”
“…….”
앳된 목소리에서 세상 다 산 노인과도 같은 허허로움이 느껴지자 위정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밖은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귀비와 숙부는 여전한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으나, 근자에 이상한 일이 있어 양쪽이 다 시끄럽습니다.”
“이상한 일?”
“예. 어떤 무도한 놈들인지는 모르나 감히 태자 저하의 흉내를 내는 놈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를 흉내 내?”
“그렇습니다.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으니 반드시 벼락을 맞을 것이옵니다.”
“……흠.”
위정필의 말에 소년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황성의 감시는 조금이나마 줄었겠군.”
“그렇습니다, 저하. 근자에는 저에 대해서도 완전히 신뢰하는 듯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네. 그간 고생이 많았을 것인데.”
소년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위정필이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위정필, 그는 최근 천하를 떠들썩하게 울리는 태자에 대한 소문이 가짜임을 아는 자였다.
자신의 눈앞에 진짜가 있었으니까.
그가 바로 왕직과 귀비의 손에서 태자를 구하고, 그 행적까지 가짜로 꾸민 장본인이었다.
자신의 거처에 있는 비동에 태자를 모시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황실을 배반하는 척하며 귀비의 손을 잡은 것이 벌써 삼 년이나 되었다.
“그나저나 가짜 태자를 쫓아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겠군.”
“예. 영왕이 금군을 움직이기 위해 폐하의 승인을 얻으려 입시하였으나 귀비의 방해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서창이 움직였겠군. 동창만으로는 부족할 것인데?”
“영왕이 무림인들과 접촉한 모양입니다.”
“무림인들?”
“예.”
“거참 이상하군. 숙부께서는 무림인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원체 세력이 약해진 탓이라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신 게지요.”
“흐음, 숙부께서 무림인들을 이용한다라…….”
소년, 아니 태자가 골똘히 생각하며 눈을 빛내자 눈치를 살피던 위정필이 한마디를 더 꺼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
“예. 일전에 말씀드린 대궁과도 관련이 있는 일인데, 두 세력 모두 한 인물을 만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무당지검, 사패천주, 마교의 교주라는 직함을 가진 자입니다.”
“……!”
위정필의 말에 태자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세 곳의 주인이라니.
황성에 틀어박혀 살다 이제는 이 좁은 비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태자였으나, 소싯적에는 인간의 한계를 넘은 무림인들을 동경했다.
그런데 정파와 사파, 마교라면 전 무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곳의 주인이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
“예. 듣기로 구름을 밟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천하를 제집처럼 자유로이 주유하는 자라고 하더군요.”
“오! 그래?”
힘겨움에 지쳐 있던 태자가 호기심을 보이자 위정필이 빙긋이 웃으며 세간에서 평하는 진무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신분이 태자라 하여도 아이는 아이.
과장을 더한 이야기에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태자의 모습에 위정필은 더욱 신을 내며 말했다.
“참으로 부러운 자가 아닌가?”
“…….”
“태자인 나는 모두가 죽이려 하는데 그는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한다는 것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호기심은 지워지고 침울해진 표정을 한 태자의 목소리가 씁쓸히 비동을 울렸다.
그 눈빛과 목소리에 담긴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태자라는 지고한 신분임에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런 곳에서 처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신세.
닭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천하를 자유로이 활보하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나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으니 저 어린 마음이 어찌 온전할까?
불쌍하고도 여린 분…….
차라리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눈앞에서 자신을 구하고 처참하게 죽어 간 어미의 모습도 보지 못했을 것인데.
문득 위정필은 의문이 들었다.
이대로가 좋은가?
그를 지키기 위해 비동에 숨겼으나 태자의 삶은 그저 연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만약, 정국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진무라는 자가 태자를 구해 준다면?
그래, 그는 천하인이다.
천하에 당할 자가 없고, 하늘 아래 모든 곳이 그의 집이자 쉴 자리라 하지 않던가?
그라면. 비록 귀비가 말하는 대궁에게는 필생의 적이나 의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그라면.
위정필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그를 만나 보자.
만나 보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믿을 수 없는 자라면 가벼운 만남으로 끝날 일이고, 만약 손을 잡는다면 이 비루한 삶에서 태자를 구해 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혹여, 그 과정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태자만 살릴 수 있다면.
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