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34
434화
진무를 바라보는 영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람 세워 놓고 똑바로 보면서 차만 홀짝거리는 재수 없는 태도와 세상을 전부 제 아래로 보는 듯한 반들반들한 낯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파에서 태어나 사파인으로 자랐기 때문인가?
관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은 법이 규정하는 틀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파인들의 습성과도 같았다.
지닌 무공의 고하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속세를 벗어나 신선의 반열에 오를 뻔한 반인반선(半人半仙) 진무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인이 박인 그 습성은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하물며 관의 대장인 황실 놈 아닌가.
아주 찝찝하고 꺼림칙한 것이…….
그런데 어째 저 깜박이지조차 않는 눈과 입가에만 야릇하게 걸친 속 모를 미소.
지금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당장에라도 목을 꺾어 놓을 수 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위축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진무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뭐가 됐든 이기고 본다.
위를 향해 비쭉 치솟은 눈썹 아래 부릅뜬 눈을 더욱 부릅뜨고 턱까지 살짝 치켜든 채로 영왕을 위협한다.
오만함을 가득 품은 비웃음은 덤이었다.
고귀한 핏줄로 태어난 놈들은 자연적으로 사람의 고하를 나누기 마련이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대접받아 온 놈들의 고질적인 특징이었다.
또한 그런 놈들은 아랫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법이라 작은 도발에도 쉽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관대작도 그러할진대 황가의 핏줄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게 맞는데. 그래야 말이 되는데.
영왕은 진무의 도발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되레 진무의 그 버릇없는 모습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곽종산과 좌군의 장수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실의 종친 중 실세인 영왕이었다.
지위나 나이를 막론하고 무조건 예를 갖추어야 할 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개 무림인이 그와 마주 앉아 반말을 찍찍 지껄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런 도발적인 눈빛과 자세라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만평, 그가 의롭고 정의감 넘치는 동량이라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이…… 저는 분명 그리 보았는데…….”
곽종산이 이를 악문 채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방만평을 노려보았다.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판이라 영왕을 설득하고 있는데 저리 나오면 어쩌자는 말인가?
난감하긴 방만평도 마찬가지였다.
거침없는 성격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랜 기간 도를 닦아 왔다는 그가 천지 분간 못할 정도로 예의가 없을 줄은…….
“허허, 그만 기세를 거두어 주시오. 내 호신공을 익히기는 하였으나 무학이 낮아 그 눈빛을 받기 힘들구려.”
“…….”
영왕이 차분히 너스레를 떨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젠장, 뭐가 이리 담담한가?
상대가 패배를 인정했는데도 어째 진 듯한 기분이었다.
망할 황실 종친 놈.
소싯적에 어디 산속 암자에서 수련이라도 했나, 뭔 참을성이 이리 좋아?
왠지 누군가 팔팔 끓고 있던 솥의 뚜껑을 열어 버리기라도 한 듯 김이 와르르 새 버린 진무가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싸우자고 달려들었는데 상대가 고개를 숙여 버리면 방법이 없다.
길 가던 개를 잡고 싸울 수도 없고, 이래선 힘없는 이에게 자신이 생짜를 부리는 꼴이 아닌가?
진무가 씁쓸하게 웃으며 단숨에 찻잔을 비워 버리자 영왕이 온화하게 웃으며 잔을 채워 주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시오. 좌군 참장영의 군사들은 오군의 최정예나 다름없는 이들인데.”
“…….”
“그대의 강함은 충분히 입증하였으니 나를 찾아온 이유나 말해 보시오.”
차분하기만 한 영왕의 질문에 진무가 자세를 바로 하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대가 나를 보고자 하였다 해서.”
“흐음, 그랬었지.”
“…….”
그렇다가 아니라 그랬었다고?
“안타깝게 되었소이다. 이젠 굳이 그대를 만나고 싶지 않게 되었소.”
“그게 뭔……?”
고개를 젓는 영왕의 모습에 진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
분명 제갈협진과 철지량은 내가 악화된 상황을 풀어낼 열쇠라고 했는데?
내가 직접 찾아가면 좋아서 방실거릴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표정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대에 대한 소문은 좌도독을 통해 익히 들었소. 그대의 헌신으로 군부와 지방 관료들에게 만연했던 비리를 일소할 수 있었다고 들었지.”
“…….”
“내 그대의 쟁쟁한 위명을 듣고 만나 보고 싶어 청하였으나 이리 보았으니 되었소. 차나 한잔하고 그만 돌아가시오.”
“…….”
생각지도 못한 축객령.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얼굴 봤으니 그만 꺼지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래서 진짜 그게 다야?
니들 태자 찾고 있다며? 대궁도 막아야 한다며?
마음이 다급해진 진무가 눈을 빠르게 끔벅거렸다.
이러면 곤란하다.
아무리 진무가 천하제일의 무위를 가졌다고 해도 힘으로 될 것이 있고 안 될 것이 있었다.
금군이 움직이는 것을 막자면 영왕이 필요했다.
거, 사람이 왜 그래?
내가 너무 버릇없어서 화가 난 거야? 난 진짜로 눈싸움하려는 줄 알았다니까?
사과할게, 하면 되잖아.
뭘 그렇게 차분하게 화를 내고 지랄이야.
진무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과를 하려는데…….
“여, 영왕 전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
진무를 노려보던 곽종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영왕에게 청했다.
갑자기 이 양반이 왜 나서지?
진무가 도발하는 와중에도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가 아니던가?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영왕의 저 두꺼운 낯짝에 스친 당황을.
대체 왜?
의아한 생각이 든 진무가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곽종산의 말에 귀를 쫑긋거렸다.
“좌도독.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더는 말하지 마시오.”
곽종산이 끼어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영왕은 느긋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조바심을 내며 곽종산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이미 진무의 눈은 무언가 낌새를 채고 게슴츠레해졌지만.
“좌도독, 그만하시오.”
영왕이 재차 막아 보려 했지만, 평생 전장에서 살아온 심지 굳은 노장수의 충성과 눈치는 참으로 우직했다.
“비록 예를 알지 못하는 무림의 범부라고 하지만, 무림의 중심이며 좌군의 정예를 뚫고 온 실력만큼은 진짜입니다. 귀비의 방해로 금군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림을 대표하는 저자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그를 내치셔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하아, 좌도독…….”
“…….”
곽종산이 충성스럽게 열변을 토하자 영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구겼다.
오호, 이거 봐라?
금군을 못 움직이신다고? 귀비의 방해 때문에 말이지?
영왕의 책망 어린 눈빛을 바라보던 진무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아직 니들끼리 이야기가 제대로 끝나지 않았구나? 그러니 이리도 손발이 안 맞지.
아니면 곽종산이 생각보다 더 멍청하다든가.
어쨌든 저러니 귀비라는 년에게 휘둘려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지.
뭐, 나로서는 정말 다행인 일이지만 말이야.
“아, 금군을 움직이지 못하신다고요?”
“…….”
상황 파악이 끝난 진무가 안면을 싹 바꾸고 웃자 영왕의 고요했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요 새끼, 이제 알겠네.
하마터면 저 노련한 정치인의 차분한 표정과 연기력에 속을 뻔했다.
내 참,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황실의 핏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축되어 제대로 말도 못 한 자신이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하지 않은가.
타고난 피가 다를 뿐, 그 역시 같은 사람인 것을.
그가 가진 배경, 지위 등이 무엇이라고 시작도 하기 전에 위축되었단 말인가?
평소에 무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영왕.
아무리 수양을 쌓아도 중이 되지 않는 이상 본질을 바꿀 순 없는 법이다.
평생을 대접받으며 남 위에서 살아온 놈이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정무맹과 손을 잡았으나 당당하게 면책권을 요구하는 꼴이 고까웠을 것이 틀림없다.
해서 잘됐다 싶었겠지.
극비로 진행해 온 태자에 관련된 이야기가 소문이 나면서 정무맹을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안 그래도 그가 접견을 마다한 덕분에 정무맹이 면책권은 진작에 포기하고 태자 확보에 관련된 내용을 공개적으로 돌리면서 총력을 다하고 있지 않던가?
아마 그동안 수소문해 온 나까지 자신을 직접 찾아왔으니 더욱 잘 되었다고 생각했겠지.
제갈협진조차도 금군이 움직이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판에 영왕이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고, 내가 온 목적을 어림잡아 짐작했을 것이다.
즉, 처음부터 우위에 서서 대화를 이끌어 가고 싶었겠지.
축객령을 내리고 무시하면 진무가 스스로 몸이 달아 간이며 쓸개며 빼 줄 것으로 생각했을 테고.
이런 기특한 도독 녀석. 너의 충성스러움이 승부의 향방을 결정지어 주는구나.
이제 어쩔 것이냐?
니가 가진 가장 강한 패가 그것이었다면 안타깝게 되었구나.
감히 이 몸을 이용해 먹으려고 해?
어디 꺼내 놓는 것이 누구의 간이며 쓸개인지 보자꾸나.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
진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영왕은 당황했고, 곽종산은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어, 어딜 가는가?”
“어디라니요? 높으신 분께서 돌아가라 하시니 돌아갈 수밖에. 다만 들고 온 물건이 제법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다른 곳에서 흥정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만.”
“…….”
싱긋이 웃으며 약 올리듯 존대하는 진무의 말에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굴리는 가운데, 영왕만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네놈! 설마 귀비에게 가서 흥정할 참이더냐!”
영왕은 더 이상 차분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그가 귀비와 자신을 놓고 흥정을 하려 들 줄이야.
“방만평 도독동지께 들으셨다시피 저는 장사꾼입니다. 예를 배우지 못한 무뢰배이기도 하구요. 허니 값이 맞으면 물건은 어디에나 팔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따위 생각을!”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뭐?”
“저는 무림인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누가 되든 간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영왕 전하?”
“이, 이…….”
진무의 말에 영왕은 차마 다음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태연함으로 진무를 이용하려 했던 계략이 역공이 되어 돌아와 버린 것이다.
“참, 오는 길에 영왕부에 들렀다가 이상한 놈을 주웠지 뭡니까?”
“……?”
“글쎄 이놈이 영왕부를 은밀하게 감시하고 있지 뭡니까. 듣자 하니 서창 소속의 이평세인가 뭔가 하는 놈이라던데. 그놈에게 길 안내를 시켜야겠군요.”
진무의 말에 영왕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졌고,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좌도독 곽종산이 살기를 뿜어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 어찌 정의를 실현해 온 도사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과 결탁하겠다 한단 말이냐!”
“…….”
곽종산에 이어 방만평까지 각기 검을 들고 앞을 막아서자 진무가 피식 웃고는 스산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미친놈들, 누가 그래?
내가 정의로운 도사라고.
“막아 보시겠다고요? 저를요? 좋네요. 지금 상황에서 제가 여기 계신 분들의 목을 모조리 뽑아 들고 가면 물건값이 훨씬 더 오를 테니.”
“이, 이놈이…….”
진무의 말에 곽종산이 눈가를 잘게 떨며 영왕의 앞을 막아섰다.
노련한 무장이니만큼 수백의 군병과 참장영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진무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왕을 지키려는 그의 충성심은 실로 높이 살 만했다.
잠시간의 대치를 끊어 낸 것은 영왕이었다.
패를 들킨 이상 더 이상의 흥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힘이 잔뜩 빠진 영왕의 모습에 진무가 속으로 씩 웃었다.
그래 그 표정, 딱 보기 좋네.
하지만 이대로 끝날 것이라 생각진 마라.
“글쎄요. 뭘 원해야 할까요? 그보다 영왕께서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실 수 있을지가 의문이네요.”
“…….”
영왕은 진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처음엔 작아 보였다.
그저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무림인일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모습이 더없이 거대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산악이 자신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넨 참으로…… 광오하군.”
“…….”
“하지만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 것이 아닌가? 가진바 무력은 대단하지만, 고작해야 자네 하나일세.”
영왕이 매섭게 눈을 빛내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픽 웃었다.
이게 아직도 지가 위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네.
갑질만 하다 보니 당해 본 경험이 없지? 이제 알려 줄게. 진짜 갑질이 어떤 건지.
“영왕께선 아직도 뭔가 착각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뭐?”
탁자에 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인 진무가 영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니가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선택하러 온 거지.
그리고…….
“제가 곧 무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