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35
435화
진무의 말에 영왕은 물론 곽종산과 방만평까지 떡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자는…… 미친 걸까?
광오한 것을 넘어 손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은 말을 잘도 내뱉는데, 어찌하여 그 오만한 말이 조금도 우습게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크핫핫핫!”
한참이나 말없이 진무를 응시하던 영왕이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멍해 있는 가운데 혼자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 댄 그가 진무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근래에 들은 말 중에 가장 속이 시원해. 무림이 곧 자신이라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며 눈물을 닦아 내는 영왕의 모습에, 진무가 그 속내를 가늠해 보기라도 하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좋네. 인정하지. 사패천과 마교를 손에 넣은 그대이니까.”
“…….”
“일단 앉으시게.”
못 이기는 척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진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영왕이 진중해진 표정으로 진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감정을 절제하고 흥정을 하려 드는 걸 보면 역시 보통 놈은 아니다.
잠시간 뜸을 들이던 영왕이 불쑥 물었다.
“무얼 원하는가?”
노골적이네, 노골적이야.
아주 나를 이용해 뭔가를 이뤄 보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여, 아주.
하지만 너랑 손잡아 봐야 내가 얻을 게 네놈의 아랫자리밖에 더 되겠냐?
원하는 것은 나중에 진짜 태자 놈한테 톡톡히 받아 낼 것이다.
그러나 자고로 장사꾼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다다익선(多多益善). 일단은 영왕의 옆에 붙어서 빨아먹을 거 철저하게 빨아먹는다.
그러려면 일단 신뢰를 줘야지.
확실한 신분에, 확실한 사기로.
일단 속일 놈은 정해졌고, 이미 탁자에 함께 앉아 있으니 반 이상 성공이다.
와중에 귀까지 기울이며 경청하려 하니 성공 확률은…… 십 할.
“급할 것 없지 않겠습니까?”
“급할 것이 없다?”
영왕의 되물음에 진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꽉 막혀 있던 길이 이제야 뚫리는 것 같을 테지.
그가 원하는 것은 태자다.
비록 가짜를 진짜로 믿고 있기는 했으나 서창이 악착같이 움직이고 있는 이 시점에 그는 무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터.
“암요. 제가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 없지요.”
“자네, 생각한 바가 있는 모양이군.”
진무가 바늘에 미끼도 끼기 전에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영왕이 조바심을 떨었다.
“말해 보게.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
“…….”
좋아, 이쯤에서 크게 선심을 써 주마.
진무가 좌도독의 말을 근거로 지금의 상황을 고려해 핵심에 근접한 추론을 내놓았다.
“지금 영왕께선 귀비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좌군과 동창을 손안에 넣었으나 대신들을 모조리 포섭한 귀비에 비하면 열세겠지요.”
“음…….”
“그 때문에 태자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이네.”
눈치를 살피며 건넨 말에 영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정무맹이 태자에 관련된 일을 공개로 돌렸습니다.”
“알고 있네. 감숙 인근의 문파들에 요청서를 돌려 천라지망에 가까운 포위망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예. 저 또한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사패천과 마교에 연락을 보냈습니다. 최정예 무인들을 급파하라고요.”
“음.”
“아무리 이번 일의 중심이 정무맹이라고는 하지만 사패천과 마교 역시 한 축을 맡고 있으니 최소 포위망의 육 할 이상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
“사패천과 마교는 의를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요. 그들은 오직 제 명령만 따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제가 가진 힘이 그렇습니다.”
“…….”
“제 명령에 따라서 태자는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진무가 빙긋이 웃었고 영왕은 생각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으로서는 태자 확보에 가장 많은 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진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열쇠를 손안에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창의 전력 태반이 감숙 쪽에 집중되었다지요?”
“그렇네.”
“귀비는 물론, 대신들까지도 태자가 감숙에 있다고 생각할 테고요.”
“…….”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된 시점에 태자가 별안간 이곳에 나타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아!”
영왕은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모두의 눈을 속이고 태자를 빼돌려 황도로 은밀하게 데려온다면 그들은 상상치도 못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귀비 측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안다 해도 손쓸 도리가 없다.
그들의 목적은 태자의 죽음.
하지만 이미 태자의 곁에는 진무라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호위가 붙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절묘한!”
영왕이 기쁨에 겨운 얼굴로 제 무릎을 쳤다.
“그저 무공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자네의 귀계가 제갈무후에 버금가는군!”
“…….”
나도 지금 나한테 놀라는 중이란다.
네놈에게 사기를 치려 고민하다 보니까 영감이 아주 막 떠오르지 뭐야.
와중에 혀는 어찌 이리도 잘 굴러가누. 기름칠도 한번 안 했는데.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일단은 귀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지요.”
“어찌?”
회가 제대로 동한 영왕이 마른침까지 삼키며 물었다.
좋아. 걸려들었다.
니가 아무리 노련한 정치꾼이고 똑똑하대도 별수 없지.
어차피 놈에게는 달리 선택권도 없다.
급류에 휘말린 지 한참인데 눈앞에 지푸라기가 아닌 통나무가 떠내려왔으니 손부터 뻗고 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통나무가 속이 텅 비어 있음은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서창이 전하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저와 만난 사실이 이미 귀비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음…….”
언변이 유창하기가 마치 폭풍 같았다.
세차게 불어닥쳐 불안을 심는가 하면 잔잔해지며 안도를 장담하니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른 영왕조차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여 저는 장사꾼이 되어 볼 생각입니다.”
“장사꾼?”
“예. 귀비를 찾아가서 전하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말할 겁니다.”
“위계(僞計)를 펼치겠다는 말인가?”
“암요. 분명 전하보다 더 많은 것을 제게 주려 하겠지요.”
“음…….”
귀비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영왕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무당의 도사인 제가 어찌 나라를 어지럽히려는 이들의 손을 잡겠습니까? 그저 그런 척하며 저들의 눈을 속이는 겁니다.”
“…….”
진무는 순식간에 자신을 나라의 안위를 우려하고 천하의 대사를 걱정하는 충성스러운 도사로 탈바꿈시켰다.
효과는 끝내줬다.
저 봐라, 존경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방만평의 눈빛과 눈물까지 흘리는 곽종산을.
덥석.
갑자기 영왕이 벌떡 일어나 손을 힘주어 맞잡자 진무가 흠칫 놀랐다.
“고맙네. 내 자네를 오해하였어. 내가 그대를 시험하였듯 속물 같은 태도로 나를 시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자네의 공을 어찌 보답해야 할지.”
“…….”
끝났네, 끝났어.
월척이 미끼를 아주 제대로 물다 못해 낚싯줄에 몸을 감고 있다.
나중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게 될 것을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 뭐 어떠랴?
태자만 얻고 나면 니들이 속았다는 걸 알아 봤자지.
“저는 그저 이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진무의 담담한 한마디가 금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기에 쐐기를 박고 그 위에 망치질까지 더했다.
“한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
“예. 귀비를 믿게 하자면 영왕 전하께 뭘 받았다는 정황이 확실해야 할 것인데…….”
“그, 그렇군! 말해 보게. 어찌하면 저들이 믿겠는가?”
사기 끝, 흥정 끝.
진무는 이제 백지 전표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새하얀 종이 쪼가리에 글귀만 새겨 넣으면 된다.
“저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제가 탐욕스러운 무림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무가 난감한 표정을 하자 영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진무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민될 것인가?
검소하고 무욕하게 살아온 그가 재물을 탐하는 척하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으리라.
“속 시원하게 말해 보게. 모두가 자네의 깊은 뜻을 아는데 어찌 탓할까?”
“그럼…… 일단 마음 놓고 활동하자면 순천부에 집도 한 채 있어야 할 것 같고…… 시비나 일꾼이 있으면 좋겠고…… 금 같은 것도 궤짝으로 좀 받는다면…….”
“옳네. 좋은 생각이야. 재물과 전답, 전장까지 받으면 저들도 의심하지 않겠지.”
“…….”
“여봐라! 게 없느냐! 속히 영왕부로 가서 대총관을 불러오라!”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는 호구…… 아니 영왕의 모습이 실로 흐뭇하다.
하지만 내색해서는 안 된다. 진무는 어디까지나 천하 대사를 걱정하는 무욕한 도사여야 하니까.
“제 생각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닌지…….”
“과하다니! 과하다니! 자네는 그냥 보고만 있게.”
영왕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새끼, 아예 수면 위로 올라왔구나.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게 별거 있겠는가? 이제는 자신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
“참, 추가로 신분이 하나 있으면 좋을 듯합니다.”
“신분?”
“예. 아무래도 그럴싸한 직함이 있어야…….”
“음.”
진무의 말에 영왕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재물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나 직위를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귀비가 싸고도는 지금 상황에서는 황제의 교지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진무에게 그저 그런 지위를 내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건 어렵다네.”
“……?”
“폐하께서 두문불출이라 만나 뵐 수가 없으니…….”
“흠.”
영왕의 말에 진무가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잘되었네요.”
“응?”
“귀비 쪽에서 전하보다 더 큰 것을 제안할 수 있다 여길 테니까요.”
“아!”
“핫핫핫! 이런 절묘할 데가!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
감탄이 감탄을 부른다.
영왕과 곽종산이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표정으로 한껏 웃어 댔다.
“이런 좋은 날 술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연회를 준비하겠습니다.”
“암! 당연한 일이오, 좌도독! 지기 같은 동지를 얻었으니 응당 축하를 해야지요.”
* * *
동맹이 결성된 밤.
밤이 늦도록 자리를 함께했던 진무는 아침이 되어서야 좌도독의 본가를 나섰다.
뒤늦게 합류한 황신과 아이들, 그리고 청상과 청우가 함께였다.
영왕부 안에서 서창의 은신자들을 처리하느라 늦었다 설명했지만, 곧이들어 줄 진무가 아니었다.
그들을 부르러 갔다가 같이 늦게 온 청상까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빨랑 일어나! 할 일이 태산이야.”
“…….”
진무의 재촉에 땅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던 이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금군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가짜 행세를 하는 양진의 안전은 확보되었고.
아무리 삼패가 동원된 천라지망이 펼쳐진다고 해도 마교와 사패천이 은밀히 도주로를 열어 주고 있을 테니 정무맹과 서창은 절대로 그들을 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진무는 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 냈다.
청우의 양어깨에 짊어 멘, 보기에도 뿌듯한 금 궤짝 둘에 순천부에 기거하는 동안 머물 거처와 마음대로 황궁을 활보할 수 있는 임시 직위.
귀비로 인해 황제의 교지를 받는 것이 어렵다 하였기에 진무와 그 일행이 받은 직책은 동창의 말단 교위직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비록 말단 교위였으나 영왕이 동창 제독에게 전면 협조하라 명하겠다고 말했으니 직급이 낮다고 해도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군병의 안내를 받아 거처에 도착한 청우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럴 만도 했다.
영왕이 지난 밤 진무를 위해 내린 거처.
이건 뭐…… 수백 명이 함께 살아도 될 만큼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와중에 언제 준비한 것인지 일꾼과 시비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진무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영왕, 제법 일 처리가 빠르다.
아마도 줄 때는 확실히 준다는 자신의 배포를 보여 주기 위함이겠지.
그 말은 곧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고, 감추고 있는 음흉함이 그 기대보다 크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대체 무얼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저 태자를 확보해서 귀비를 제거하고, 대궁을 막기 위함만은 아닌 듯한데.
“동보.”
“예, 천주님.”
“너는 지금부터 영왕을 밀착 호위해라.”
“예? 저는 천주님의 개인 호위이자…….”
“명목상 그를 서창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말해 두었다. 지금부터 너는 영왕의 모든 것을 알아 와라.”
“영왕을 감시하란 말씀입니까?”
“그래. 어떤 인물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굴 만나고 무엇을 먹는지, 하루에 몇 번이나 똥을 싸는 지까지.”
“아니 뭘 그런 것까지?”
“…….”
소동보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자 진무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흐음, 우리 동보가 혓바닥이 아주 길어. 댕강 잘라다가 줄넘기를 해도 될 것 같아.”
“속하 소동보! 당장 가서 탈탈 털어 오겠습니다!”
진무의 스산한 눈빛에 소동보가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속도로 사라졌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이것들이 요새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한 번씩 개긴다.
언제 단체로 푸닥거리 한번 찐하게 해야 하나.
“자, 그럼 이제 뭘 한다? 세찬이에게 진짜 태자를 찾아 오라 한 시간이 아직 좀 남았는데.”
일단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영왕에 대한 내용은 소동보가 알아 올 터이니 제쳐 두고, 귀비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인데.
진무가 슬쩍 고개를 돌려 황신과 대궁을 바라봤다.
“……!”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것인지 부르르 떨며 긴장하는 그들의 모습에 진무가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래, 이건 과하다.
영왕부도 아니고 황궁에 잠입해서 귀비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키는 건 좀…….
그래, 어쩔 수 없지.
동창 교위의 직함도 받았겠다.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이 기회에 황궁 구경도 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