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40
440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밤낮이 몇 번이나 뒤바뀌었는지도 모를 어느 날.
“…….”
진무의 앞에 수북이 쌓인 종이 쪼가리 두 무더기가 놓였다.
대궁이 하오문을 통해 화양이의 행적과 황신이 귀비에 관해 조사해 온 내용.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부터는 연락이 끊어졌다?”
“예. 마지막 행적이 강서의 옥화산(玉化山)까지입니다. 원래 살던 화전민촌 인근에 장원을 지어 놓기는 했으나 저희가 찾아갔을 때는 빈집이었습니다. 그 후의 행적이 어찌 되었는지는…….”
뒤는 들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는 말이겠지.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첩이었으나 그의 사후에는 차츰 잊혔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유월청이 후계가 되면서 수많은 문제가 터진 데다, 사패오왕마저 각자의 세력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인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굳이 고향으로 내려간 여인을 뭐 볼 게 있다고 감시한단 말인가?
여하튼 화양이의 과거 행적은 거기까지.
“귀비는?”
촤르륵.
진무의 질문에 황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글귀로 빼곡한 지도를 펼쳤다.
“궁에 들어오기 전 귀비의 행적입니다.”
“…….”
찬찬히 지도를 바라보던 진무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대흑산(大黑山)?”
“예, 중원의 동북방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화전민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다가 입궁한 것으로 보입니다.”
옥화산과 대흑산.
연결점을 찾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완전히 정 반대에 있는 곳이 아닌가?
또한 화양이가 사패천에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귀비가 궁에 들어온 것도 삼 년 전.
시기가 일치하기는 하지만 화양이가 고향에 내려간 뒤 일 년 정도 살았다고 하니 딱히 연결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설마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하늘 아래 둘이나 존재한다고?
그럴 리가?
자신이 본 그 얼굴과 느낌은 분명 화양이의 그것이 분명한데.
“한데…… 조사하다 보니 정말 대단한 년이더군요.”
“……?”
대단하면 대단한 거지 욕은 갑자기 왜 해?
“일개 궁녀의 신분에서 어찌 삼 년 만에 귀비가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조사하다 보니 이해가 되지 뭡니까.”
“……?”
“황제의 비위를 그렇게나 잘 맞추었다고 합니다. 한평생 같이 산 여인 같았다고 하더군요.”
“눈치가 빨랐다는 건가?”
“예. 황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비위를 척척 맞추니 총애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화양이도 그랬다.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것처럼 내 속마음을 잘도 읽어 내곤 했었지.
“그런데 정말 천하에 둘도 없는 쌍년이더군요.”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보십시오.”
진무가 의아해하자 황신이 종이 무더기를 뒤적거리더니 몇 장을 꺼내 펼쳤다.
“죽은 황자들에게 내려졌던 약방문입니다.”
“…….”
읽어보니 처방이 모두 달랐다.
“처방은 다 다르지만, 병자의 증세는 모두 같았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니 이 약 저 약 써 본 것이다?”
“예. 당시 의원 놈을 심문해 보니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 했습니다.”
“……그럼 독?”
“예. 정황은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이다.
독살을 막기 위해 그 비싼 은수저로 하나하나 기미(氣味)하는 것이 일상인 곳에서 독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인데?
“알아보니 모두 귀비 측 인물과 접점이 있더군요. 아마 영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
“예. 영왕 역시 독살일 것이라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전국의 이름난 의원을 불러 조사하게 했음에도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문제는 너무 교묘하게 의심을 비껴갔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범인은 딱 그녀인데 물증이 없으니……. 어쨌든 그 후로 귀비는 갖은 중상모략을 꾸며 제 사람들로 대전을 채워 넣은 모양입니다. 영왕의 손발이 잘린 것도 그때부터였고요.”
“…….”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것 보십시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본인이 아니라 부모 형제는 물론 자식까지…… 아주 질 나쁜 년입니다.”
그래, 조사해 온 내용을 읽어 보면 정말 나쁜 년이다.
하지만 진무가 알고자 했던 진실에는 조금도 접근하지 못했다.
젠장, 괜히 시간만 낭비한 건가?
너무 닮았는데…….
무심코 황신이 가져온 약방문을 뒤적거리던 진무의 손이 멈칫했다.
……어? 이거?
“왜요?”
진무가 처방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황신은 물론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무는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눈을 치켜뜨며 황신이 수집해 온 약방문들을 모조리 펼쳐 놓고 비교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기침?”
“아, 예. 처음엔 고뿔이 든 것이라 생각했다더군요.”
“…….”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열과 통증이 동반되고, 나중에는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황신의 설명에 진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적힌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병세가 지속되면서 붉은 반점이 나타났고, 처방에 의해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던 환자가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며 죽었다…….
“이, 이런 망할…….”
거기까지 읽은 진무는 처방전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이빨을 갈았다.
“주군, 어찌?”
“…….”
능서현이 물었지만, 진무의 시선은 제 앞에 흩어져 있는 문서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똑같다.
자신이 겪었던 증상과.
그저 노환을 얻어 산공의 과정을 겪으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었다.
분명 그렇게 믿었다.
황신의 말처럼 그 어떤 의원도 자신의 병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함께 활동하던 이들 중 죽은 것은 달랑 자신 하나가 아닌가?
풍환도 살아 있고, 북리도천도 쌩쌩하게 살아 있다.
심지어 폐공을 당한 것도 모자라 나이도 훨씬 많은 운공까지 살아 있는데 어찌하여 자신만 죽었단 말인가?
하물며 진무는 당시에도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하지만 만약 귀비와 화양이 동일 인물이며, 화양이가 애초에 궁에 속해 있었다면?
독. 황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종류의 독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기미에 걸리지 않는 독이 없지 말란 법도 없다.
더군다나 정무맹에 암약하던 세작을 처리하던 과정에서 그들이 고독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독, 만들기도 힘든 그 독을 사용할 정도라면?
“빌어먹을.”
이제야 알겠다.
왜 자신만 죽었는지.
“연결점이 생겼네. 아주 확실한 연결점이…….”
“예?”
진무가 대체 무슨 연유로 저렇게 격노하는지, 무엇을 보고 연결점을 찾아낸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오직 진무만이 알고 있었다.
황제와 진무.
화양과 귀비가 그들의 총애를 받게 된 경위가 너무도 비슷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눈치가 아무리 빨라도 미리 조사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까지 속속들이 아는 듯한.
그리고 황자들의 병세와 자신이 죽는 과정에서 겪었던 증상들까지.
다만 황자들과 달리 자신은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내공이 고통을 완화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허.”
어지럽게 혼재되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재조립되었다.
진무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흘렀다.
그렇구나. 화양이 네년이 나를…….
물증은 없지만 모든 정황 증거가 너무도 확실했다.
자신의 손에 죽은 송여방이 말했던 백년대계와 영왕이 직접 양소방에게 말해 주었다는 대궁의 정체.
한씨의 후손이라던 그들의 칼끝이 최후로 향하는 곳은 현 황실을 채우고 있는 주씨의 혈족일 터였다.
자, 여기서 다시 한번.
만약 자신의 곁에 있었던 화양과 황제의 곁에 있는 귀비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리고 황자들이 자신과 똑같은 병세로 죽어 갔다면?
일의 선후를 따져 보았을 때…….
“……실험을 했어?”
이 나를 상대로 말이지?
안개로 자욱하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신이 그녀를 발견해 첩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제게 접근한 것이다.
치밀한 조사를 통해 성향을 파악하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의 몸으로 경계심을 무너뜨렸겠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지.
그걸 좋다고 거두었다니.
어쨌든 무공이 그토록 뛰어났던 자신이 죽자 그 효과를 확신하고 황궁으로 들어간 것이리라.
황제 놈도 좋다고 자신에게 접근한 화양이를 곁에 두었겠지.
자식 놈들이 죄 죽어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이쯤 되면 둘의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역을 쓰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 대역과 기록 조작은 궁에서 도맡았을 것이고.
“이런 씨발, 하하.”
깨끗이 당했다.
정말이지 제대로 난년이다. 무림뿐 아니라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구나.
그런데 이 망할 년이 감히 나를 죽여?
누구 하나 찢어 죽일 듯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걷던 진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안 되지.
이리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지.
그냥 찢어 죽여서야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제대로 복수를 해 줘야지.
감히 이 몸을 상대로 그따위 짓을 했던 것을 죽어서도 후회할 정도로 만들어 줘야지.
아직 시간이 있다.
황제를 같은 방법으로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필시 영왕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다음 보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좌군을 손에 쥔 영왕이니까.
귀비가 아무리 대신들을 포섭한다 해도 군부의 힘을 버텨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를 살려 두어 방패막이로 삼고, 태자를 찾아 죽인 뒤 영왕과 그 세력을 쳐 낸다.
황제를 죽이는 건 그 이후일 터.
‘게다가…….’
생각할수록 잘 짜인 판이다.
다른 황자들까지 다 죽은 상황 아닌가.
뒤를 이을 황제에게 정통성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일.
결국 모든 권력이 향할 곳은…….
“귀비겠지. 나 참, 갈수록…… 하하하!”
“……?”
더욱 의아하다.
실소를 터트렸다가, 화를 냈다가, 벌떡 일어나 쿵쿵 걷더니 이젠 갑자기 마구 웃어 대자 모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천주가 실성이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모두의 생각과 달리 진무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아져 있었다.
모든 의혹이 사라진 진무의 눈빛은 예의 그 사이함으로 번득이기 시작했고, 머리는 비열함으로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생각보다 오래된 싸움이었구나.
비로소 깨달았다.
하늘이 나를 이리 되돌아오게 만든 것은 전생에 무당의 죄 없는 도사들을 처참하게 죽인 것에 대한 속죄 따위가 아니었어.
이유도 모른 채 죽은 나를 불쌍히 여긴 게야. 암, 그렇고말고.
나중에 진짜로 죽어서 저승에 가면 도동의 몸으로 살아나게 해 준 차사 놈에게 감사를 전해야겠다.
진무는 한참을 우뚝 선 채 생각에 잠겼다가 원래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확실한 증좌가 필요하다.
귀비가 화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그리고 그녀가 황자들과 자신을 시름시름 앓다 죽게 만든 독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화양이는 이제 그저 혁련무강의 첩이 아니다. 이 나라의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귀비다.
무턱대고 그녀를 범인으로 몰 수는 없는 일.
영왕조차도 실패한 일이 아닌가?
자, 이제 어찌한다?
일단은 독의 정체를 알아낼 만한 인물이…… 황궁에는 없을 것이고…… 천하에서 독에 정통한 곳이라면 단 한 곳…… 독에 관련된 연구를 밥 먹듯이 해 온…….
아, 젠장. 거기랑은 더 엮이고 싶지 않은데.
혹시나 그 망할 또라이가 딸려 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복수를 위해 그쯤은 참아 주마.
“대궁, 태자를 찾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
“예!”
“황신, 귀비에 대해 좀 더 소상하게 알아보고…… 당가에 연락을 보내라.”
“예?”
“만독전에서 독에 가장 정통한 놈들이 필요하다고 전해. 지금 당장.”
“…….”
진무의 스산한 미소에 황신을 비롯한 모두가 흠칫 놀랐다.
망할 송곳니.
대체 이 개천주가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송곳니까지 드러내 가며 웃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