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44
444화
“흐음, 오늘따라 날이 참으로 좋구나.”
귀비는 근래 들어 가장 속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무가 그처럼 탐욕스러울 줄은 몰랐던 일이다.
무림의 영웅? 도사?
자고로 사내치고 돈과 권력 앞에 초연한 놈 없다더니, 황가의 내탕고(內帑庫)를 털어 재물을 수레째로 내리고 관직까지 얹어 주자 눈이 벌게져서 영왕을 쥐 잡듯 잡아 대는 꼴이란.
그가 순천부에 온 지 달포.
겨우 달포 만에 그는 삼 년간 자신과 서창이 영왕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냈다.
절차 무시하고 법도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놈의 추진력에 영왕의 측근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다.
정말로 무지막지했다.
더군다나 그의 앞뒤 안 가리는 행보에 자신을 향했던 원성마저 점차 진무에게로 옮겨 가고 있었다.
이용하다 버릴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악명까지 몽땅 가져가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비록 아직 태자를 확보하지 못하였으나, 진무가 자신들의 편에 있으니 그 또한 머지않은 일이었다.
아니, 이제는 태자가 없어도 상관없다.
이대로 영왕을 처리하고 나면, 곧바로 대신들의 여론을 모아 진무를 쳐 낸다.
황궁도 차지하고, 궁의 원수인 진무까지 처리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때가 되면 태자, 아니 태자 할아비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라.
흐뭇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인 귀비가 자신을 찾아온 왕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대궁주께서 소식을 보내왔다고?”
“예, 마마.”
왕직이 품에서 조심스레 서찰 하나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찌이익.
밀봉을 뜯고 서신의 내용을 읽은 귀비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벌써 삭월의 파호(巴湖) 근방에 다다르셨단 말인가?”
“예, 설원이 녹아 행로가 어렵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반년이면 너끈히 국경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귀비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서신 가득 쓰인 진무의 이용 계획에 대한 칭찬도 칭찬이거니와, 진군 속도 또한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가?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오는구나. 때가 된 것이다. 주씨를 몰아낸 이 땅에 새로이 한씨의 나라가 들어선다. 백 년 노력이 결실을 보는 게야!”
“감축드립니다, 마마.”
흥분으로 볼이 발갛게 상기된 귀비를 향해 왕직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너의 도움이 아주 컸느니라. 대궁주께서 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광명을 되찾는 날, 너의 공을 치하하여 건국 공신으로 청할 것이다.”
“……!”
칭찬과 함께 장밋빛 미래를 확신하는 말에 왕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가슴을 막을 길이 없었다.
궁에 몸담기 전, 단강구에서 청부 살인이나 일삼던 삼류 잡배가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운 공신이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훈련 과정과 충성해 온 마음을 모조리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속하 마마께 더욱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
“하나 더욱 빈틈없이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육 개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이 나라는 물론, 그에 동조했던 무림까지 대궁주 앞에 바칠 수 있도록.”
“예, 마마. 소신 더욱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겠나이다.”
왕직의 각오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귀비가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홀짝였다.
“늘 마시던 차가 새삼 바뀐 것은 아닐 것인데 오늘은 더욱 맛이 좋구나. 게다가 햇살까지 이리 좋으니 어찌 방 안에만 있겠는가? 내 이럴 것이 아니라 산책이라도 해야겠구나.”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축객령이라 생각한 왕직이 일어나려 하자 귀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모처럼 함께 걸으며 담소라도 나누도록 하지.”
“하나…….”
“사양치 말아. 하루쯤 쉬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궂은 일이야 그 도사 놈이 전부 해 주고 있음인데.”
귀비의 미소에 잠시 고민하던 왕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면 모처럼 제가 뫼시겠습니다.”
그래, 무슨 상관일까?
그 무식한 놈이 알차게도 영왕을 처리해 주고 있는데…….
갑작스레 곤녕궁을 나선 귀비의 걸음에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한 환관들과 시비들이 부산을 떨었다.
개중 한 어린 시비가 잰걸음을 이기지 못하고 발이 엇갈려 귀비의 치맛자락 앞에 넘어지고 말았다.
“네 이년! 어찌 이리 경망스러운 것이냐!”
“어허, 왕 제독. 너무 야단치지 마시게나.”
왕직을 물린 귀비가 너무도 따스한 표정으로 시비 앞에 앉아 말을 건넸다.
“괜찮으냐?”
“마, 마마. 이년이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납작 엎드린 시비가 큰 목소리로 죄를 청하였으나 귀비는 개의치 않았다.
“살려 달라니. 누가 너를 죽인단 말이더냐? 저런, 무릎이 까졌구나. 조심하지 않고.”
“…….”
평소 표독스럽기 그지없던 귀비가 너무나 온화하게 굴자 어린 시비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어서 일어나렴.”
“……예, 마마.”
직접 시비를 일으켜 세운 귀비가 겁에 질린 마음을 풀어 주듯 시비를 가벼이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잔혹한 귀비에게 용서를 받다니, 저 아이가 지난밤 용꿈이라도 꾼 것이 틀림없었다.
귀비가 아이를 보듬어 편안케 해 주던 그때.
탁, 타다다닥!
서창의 관원이 급하게 곤녕궁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저런 쳐 죽일 놈을 보았나. 마땅히 칼을 벗어 두고 걸음 소리마저 낮추어야 하거늘.
하지만 뭐 어떠랴. 귀비의 기분이 이리도 좋은데.
왕직은 탓하지 않고 다가온 관원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냐?”
“그, 그것이…….”
난감해하며 말하기를 주저하는 관원의 모습에 불현듯 불안감이 스쳤다.
그리 급히 달려왔다면 분명 보고할 것이 있을진대, 어찌 뒷말을 흐린단 말인가?
“속히 말해 보라. 모처럼 귀비마마께서 산책하러 나가시는 길이다.”
왕직의 채근에 관원이 납작 엎드려 고했다.
“추국장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추국장?”
왕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틈에 어린 시비를 안고 있던 귀비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 무지막지한 녀석이 또 어떤 대단한 자들을 잡아 왔길래?”
“그, 그게…….”
온화함을 품었다 해도 귀비의 물음이었다.
그 추상같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또다시 뒷말을 흐리자 왕직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놈, 마마께서 하문하시지 않느냐. 속히 답해 올리거라.”
“유, 육부입니다.”
“…….”
믿기지 않는 말에 귀비와 왕직의 얼굴이 멍해졌다.
육부(六部).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 세금과 예산으로 나라 살림을 맡은 호부, 군을 총괄하는 병부, 행사와 제사를 관장하는 예부, 법을 집행하는 형부, 토목이나 공사를 담당하는 공부.
군의 중추가 오군도독부라면 육부는 행정의 중추였다.
군권을 장악한 영왕에 맞서 귀비가 내각과 함께 포섭한 조정 대신들을 심어 둔 곳.
그런 육부의 대신들이 추국장에 잡혀 왔다고?
“이놈!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육부의 대신들이 추국장에 어찌 잡혀 와?”
“저희도 이제 막 소식을 접한 참입니다. 도찰원 우도사가 휘하의 무인들을 풀어 육부의 상서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
와중에 상서라니. 육부의 수장을 잡아들였단 말인가?
이쪽에 보고 한마디 없이……?
“이런 미친놈이……!”
도를 넘어선 황당함에 왕직이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귀비의 눈치를 살폈다.
“…….”
조금 전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싸늘한 얼굴로 한기를 내뿜는 귀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악귀나 다름없었다.
“켁, 케켁, 마……마…….”
“…….”
쓰다듬던 손길 그대로 목줄기를 움켜쥔 귀비의 악력에 어린 시비가 캑캑거리며 숨을 토하고, 뒤따르던 환관과 시비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마……마, 용……서를…….”
숨이 턱까지 차올라 얼굴이 벌게진 시비가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죄를 청했지만 귀비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으드득.
입술 새로 드러난 고른 치열이 거칠게 갈리고.
뿌드득.
뼈가 틀어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시비가 눈조차 감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털썩.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어린 시비를 물건처럼 던져 버린 귀비가 나지막이 왕직을 불렀다.
“왕 제독.”
“하명하십시오, 마마!”
“무슨 일인지 직접 가서 알아 오라.”
“예! 마마.”
명을 받은 왕직이 주저 없이 곤녕궁을 빠져나갔다.
산책은 끝났다.
채 열 걸음도 걷기도 전에.
* * *
치이이.
“끄아아악!”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에 찬 비명이 도찰원의 추국장을 뒤흔들었다.
형틀에 묶인 각 부의 상서와 그 휘하 대신들이었다.
집행자들은 다름 아닌 진무 휘하의 무인들.
황신과 아이들, 능서현, 그리고 비록 품계는 받지 못하였으나 새로이 도찰원의 임시 관원으로 임명된 철검단과 은위단의 무인들이 처절한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무의 명에 따라 고문을 가했다.
“사, 사숙. 괜찮겠습니까?”
“뭐가?”
“저들은 육부의 상서들입니다.”
“그게 왜?”
왜냐니. 왜냐니!
저들은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자들이었다.
하물며 하오문의 정보에 의하면 귀비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자들이 아닌가.
아래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도 모자라건만, 이리 무모하게 판을 벌이시다니.
하물며 진무의 평판이 점점 곤두박질치고 있는 와중이다.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숙, 아무리 비리를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육부의 수장들을 건드리기엔…….”
“…….”
진무는 안절부절못하는 청상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제 놈이 세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마땅히 기뻐해야지, 뭔 걱정이 그리도 태산이란 말이냐.
“이놈아, 비리를 저지른 놈에게 지위 고하가 있다더냐?”
“하지만 너무 거물입니다. 저들을 무너뜨리자면 아래에서부터 신중히…….”
“쯧쯧, 이리도 생각이 짧아서야.”
“예?”
“이놈아, 닭 모이나 주워 먹는 놈들을 때려잡는다고 곳간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
“진짜로 곳간을 축내는 것은 저렇게 커다란 쥐새끼들이다. 저 봐라. 하도 훔쳐 먹어서 피둥피둥하게 오른 살을.”
“그건…….”
또 그렇지.
청상은 저도 모르게 수긍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사숙은 때로 막 나가는 경향이 있어도 절대 일을 그르치실 분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청상아.”
“예, 사숙.”
“비리를 단죄하고는 있다만 우리는 정식 도찰원 관리가 아니다.”
“…….”
“우리가 관원들의 비리나 잡자고 온 것이더냐?”
“아닙니다.”
“그래. 황궁 내부에서 암약하는 궁의 무리를 뿌리째 뽑아내기 위함이다. 이 싸움은 길게 끌어 절대로 좋을 것이 없어.”
“…….”
“그것이 황실이라고 해도 변함이 없다.”
진무는 죄인들을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싸움을 빠르게 끝내자면 다소 무리를 한다고 해도 머리부터 조져야지. 아랫것들을 조지는 동안 놈들이 빠져나갈 길을 찾게 두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진무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 생각이었다.
그는 싸울 때 절대로 약한 자들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목표를 정하면 곧장 달려 대가리부터 깬다.
일단 머리를 잃고 나면 꼬리는 자연히 무너지는 법이니까.
청상이 머리를 보태기는 했지만 애초에 진무 본인이 짠 판이다.
마무리 역시 그가 짓는 것이 마땅했다.
“두고 봐라. 이 싸움의 분수령은 바로 여기가 될 것이다. 미끼를 던졌으니…….”
“멈추어라! 이게 지금 무슨 짓거리란 말이냐!”
담담한 진무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잔뜩 화가 난 외침과 함께 왕직이 서창의 관원들을 이끌고 추국장으로 들어섰다.
저것 보아라.
먹음직한 놈이 미끼를 냅다 물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