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0
450화
어둠을 틈타 위정필의 장원에 숨어든 진무와 은위단의 무인들.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던 중, 선두에 있던 외목이 갑자기 멈춰 섰다.
[천주님.]“…….”
[은신한 놈들이 있습니다.]외목의 다급한 전음에 진무는 정신을 집중하고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태극을 이룬 이후부터 기의 흐름이 보이더니, 이제는 그 범위가 배 이상 넓어졌다.
익숙한 기운들.
근래에 자주 느껴 온…… 서창 관원들의 것이 분명했다.
뭐지? 함정인가?
자신이 찾아오겠다는 말에 위정필이 준비했……을 리는 없고.
그의 눈빛에 담겼던 절실함은 연기 따위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무인들의 위치가 너무 듬성듬성했다.
누군가를 잡기 위해 진을 친 것은 아니라는 뜻인데…….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돌다리도 두들겨야 한다.
튼튼한 줄 알고 밟았다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외목.] [예, 천주님.] [감시하는 놈들 외에 따로 숨어 있는 놈들이 있는지 살펴라.] [알겠습니다.]명을 받은 외목이 짧게 수신호를 보내자, 주위의 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은위단의 무인들이 각자의 위치로 움직이는 것이다.
짧은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자 외목이 돌아왔다.
[따로 숨어 있는 적은 없습니다.]“…….”
외목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은위단의 부단주라는 그의 직함이 곧 그의 능력. 샅샅이 살피고 또 살폈으리라.
고로 위협이 될 만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있는 서창 놈들은 함정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시만 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뜻인데…….
참, 무섭도록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한 년이다.
한편으로 끌어들인 사람을 믿지 못해서 사가까지 수하를 보내 감시하다니.
하긴, 나를 죽인 년이 허술하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자존심 상하지.
이쯤은 되어야 조질 때 손맛이 좋지 않겠는가.
진무의 입가에 흉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외목.]앞선 부름과는 다른 의미임을 깨달은 외목이 하나밖에 없는 눈깔을 살벌하게 빛냈다.
[배치는 끝났습니다.] [깨끗하게 처리해.] [예.]대답과 함께 외목이 작은 피리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멀리 떨어진 은위단의 무인들이 서로 간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고안된 무음소(無音簫).
불룩하게 부풀었던 외목의 볼이 가라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작은 움직임도 없는 가운데, 장원에서 혈향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원의 석등과 정자.
처마 밑, 그림자가 드리워진 담벼락 아래에 이르기까지.
처음엔 미미했던 피비린내가 이윽고 코를 찌를 듯 강해질 즈음, 곳곳에서 숨이 끊어진 감시자들이 털썩거리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시종 차분했던 기의 흐름이 난잡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급습에 상황 판단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이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아닌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쟤들이 괜히 하오문의 최정예라 불리는 줄 아냐?
이미 은위단이 네놈들의 모가지를 물고 똬리를 틀어 칭칭 감았으니 한 놈도 빠져나갈 수 없다.
그 뒤로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다시 기의 흐름이 안정되었다.
“천주님, 끝났습니다.”
외목이 곳곳에서 들려온 수하들의 무음소를 종합해 보고를 올렸다.
다 죽었으니 굳이 전음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좋아, 위정필은?”
“좌측 세 번째 전각입니다.”
“만나고 오겠다.”
“어떤 소란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외목이 다시금 어둠으로 스며들었고, 이내 장원에는 언제 살육이 자행되었냐는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오직 시신들이 뿜어내는 혈향만이 짙게 남은 장원 한복판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낸 진무는 은은히 불이 밝혀진 전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각 앞에는 두 명의 호위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이 역시 은위단의 솜씨였다.
살육을 시작하기 전 소란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수혈을 짚은 것이다.
아마 그들은 잠에서 깬다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지 못하리라.
“위정필.”
문밖에서 부르는 진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방 안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우도사!”
반가운 얼굴로 나선 위정필은 이내 정원에 가득한 시신들을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쥐새끼들이 많더군.”
“……!”
놀람도 잠시, 이내 평온함을 되찾은 위정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시오.”
“…….”
생각보다 빠르게 차분해진 그의 표정에 진무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서창의 감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군.
하긴, 위정필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그 정도야 별일도 아니겠지.
삼대나 되는 황제를 모시며 밤의 군주로 군림해 온 자니까.
진무는 주저함 없이 전각 안으로 들어가 위정필과 마주 앉았다.
“…….”
“…….”
서로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채로 시간이 흘렀다.
긴장감이 흐르는 정적 속, 먼저 입을 뗀 것은 진무였다.
이 마당에 더 서로를 견제하며 속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존칭은 생략하겠다.”
“책하지 않겠소.”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 너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싸늘한 말에 위정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무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희한하리만치 여러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영왕과 귀비를 동시에 속이는 협잡꾼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파락호처럼 불량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한데 지금은 또 달랐다.
평생 황제를 모신 위정필이 그것을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언성을 높이고 눈빛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닌, 몸에 자연스럽게 밴 군주로서의 위엄.
마주한 자로 하여금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하는 그것은 결코 꾸민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중원 최강의 무인이라 불리는 진무의 본모습인가?
위정필은 어느새 진무에게 매료되는 자신을 느끼며 옅게 웃었다.
이런 자라면 되었다.
귀비와 영왕의 위협에서 능히 자신의 뜻을 이루어 줄 것이다.
그는 마음을 굳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무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그대를 찾아갔을 때부터 목숨을 내놓을 각오는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
진무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위정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자, 지금 자세만 고친 게 아니다.
숙였던 허리를 든 순간 목소리에 담긴 성향이 달라졌고, 표정과 눈빛까지 바뀌었다.
단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자는 드물다.
특히나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놈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상당히 힘들어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에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스스로 존귀하다 느끼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매우 중요하다.
무릇 사람은 자신보다 낮은 자를 상대할 때 경계심을 품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마음을 연다. 스스로가 우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해서 교분을 쌓을 때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고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대단하군. 그대에 대해 알아보니 무척이나 독선적이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갈 같은 이라고 하던데?”
“그리 보여야 했으니까요.”
“귀비의 눈에 들기 위해 연기를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
슬쩍 떠보았으나 위정필은 대답하지 않고 잔잔히 웃기만 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그럼 이제 말해 봐. 나를 찾아와 그런 질문을 한 연유가 뭐지?”
“생각보다 직설적이시군요. 조금 더 저를 살필 것이라 여겼는데.”
“…….”
직설은 염병…… 일부러 대놓고 물은 거거든?
진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비치 않은 질문이 훅 치고 들어가면 대부분 당황하기 마련인데, 도무지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너 그렇게 웃지 마라.”
“……?”
“왠지 속을 들키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지거든.”
“주의하겠습니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위정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무가 짧은 한숨과 함께 툭 내뱉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서창의 감시자들이 죽어 시간대별로 보고가 들어가지 않을 테니 그들이 상황을 확인하러 오겠지요?”
“잘 아는군.”
“왕직은 귀비만큼 치밀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해 봐. 내 질문에 대한 대답.”
“해 드려야지요. 하지만 그전에 우도사, 아니 진무 도장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그저 호칭을 바꾼 것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권력의 틈바구니에 속한 우도사가 아니라 무림인 진무에게 묻는 것이다.
“무슨 말이지?”
“귀비와 영왕의 싸움에 뛰어든 이유 말입니다.”
“…….”
“제가 보기에 진무 도장께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일전에는 귀비 편으로 보이게 했다가, 지금은 영왕과 한편이라 믿게 만들었지요.”
이 자식, 영왕과 귀비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
진즉에 알았다는 뜻인데, 어째서 귀비에게 보고하지 않았지?
의문이 점차 커지는 와중,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변수라 생각했던 것.
황신이 왕직을 끌고 나갔을 때, 보았어야 마땅할 환관과 시비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혹 위정필이?
의문이 담긴 진무의 눈빛에 위정필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아주 잠시 서로가 승리자라고 생각하겠으나, 실상 둘 다 손해를 보고 있지요. 지금 이 순간까지 이득을 본 것은 오직 진무 도장뿐입니다.”
“제법이군.”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진무 도장의 저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를 줄여 무림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이거 원, 생강이 여물어도 너무 여물었다.
망할 노인네가 자신의 노림수를 모조리 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황궁을 집어삼킬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과연, 사례태감이라는 자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군.”
“역시나 과찬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어.”
“……?”
“나는 거죽은 무당의 도사이나 태생이 사파인이다.”
“그게 무슨?”
“상대의 패조차 보지 않고 내 패를 꺼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
“참고로 지금의 나는 너를 습격한 흉수야.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니 강도나 다를 바가 없다고. 그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는 뜻이야.”
태도를 바꾼 이후 계속 유지하던 위정필의 평정이 깨졌다.
티 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며 진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사례태감 위정필이 정체 모를 흉수에게 참변을 당했다 알려질 테지. 물론 왕직이 부재중인 지금 조사는 도찰원 우도사인 내가 하게 될 테고.”
진무의 말뜻을 모두 이해한 위정필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진무는 자신의 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속내를 밝히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죽이겠다는 위협과 함께.
그리고 시간은 자신에게 더욱 촉박했다.
만에 하나 서창이 끼어들게 된다면 어렵게 얻은 이 기회가 영영 날아갈 테니까.
“휴우…… 과연이로군요. 사상 처음으로 무림을 통일하신 분답습니다.”
“과찬이고, 아직 통일은 안 했어.”
진무가 위정필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손사래를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
“지금부터 듣고 보는 모든 것을 함구해 주시겠다고.”
그 말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말했지만 나는 태생이 사파인이야. 그런 나를 믿겠다고?”
“예, 믿습니다.”
“…….”
“중원 최강이라는 그 자부심을.”
위정필의 굳건한 눈빛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약속하지. 다만 앞으로 내놓을 답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어야 할 거야.”
잔잔한 살기를 동반한 약조에 위정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있는 병풍을 세차게 걷었다.
너 지금 무슨…… 응?
저게 뭐야? 비밀 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