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3
453화
위정필이 허둥지둥 진무를 말렸다.
“지, 진무 도장, 어찌 전하께 그런…….”
“닥쳐, 늙은이. 니가 태자야? 명보다 일찍 뒈지고 싶지 않으면 찌그러져 있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진무의 모습에 위정필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야, 꼬마.”
“…….”
“그게 진짜 니 생각이야? 도망치고 싶다고?”
그 말에 태자는 잔잔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하고도 진무의 살벌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저 노련한 위정필조차도 새파랗게 질려 입을 떼지 못하는데.
피골이 상접한 꼴을 하고 있지만 과연 태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강단이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정광이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건 위정필의 말처럼 도주나 생각하는 치졸한 놈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눈빛이지.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이 황성이 싫다.”
“싫다고?”
“그래, 싫다.”
“…….”
“어미의 죽음을 외면한 아비가 싫고, 권력을 좇아 나를 이용하려는 숙부가 싫다.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채 그들에게 붙어서 권력을 탐하는 자들도…….”
“귀비는 더욱 싫겠지?”
“…….”
진무의 말에 태자가 입술을 깊이 깨문다.
“그래, 그녀는…… 내 어머니를 죽였으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복수? 내게 힘이 있어 보이나?”
태자가 피식 웃으며 깡마른 자신의 팔을 드러내 보였다.
“이 몸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태자의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아무런 힘도 없다. 고작해야 나를 가엽게 여기는 위정필이 고작이지.”
진무는 어린 소년, 아니 태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책임?”
“그래.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이가 죽었다.”
“…….”
“태자로 태어나기를 원치는 않았지만, 내가 마땅히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이자 갚아야 할 빚이지.”
“하지만 힘이 없기에 도주하려 한 것인가?”
진무의 물음에 태자가 잠시 입을 다물고 한쪽에 주저앉은 위정필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부러웠었지. 너희들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이.”
“…….”
“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 버리고 널 뒤쫓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원한다면 떠나게 해 주마. 내 목적만 이루어 준다면.”
“떠난다라…….”
태자가 진무의 말을 가만히 되뇌고는, 피식 웃었다.
“글쎄, 그럴 수 있을까?”
“뭐?”
“바람은 바람일 뿐이지. 나는 이곳을 버릴 수 없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목숨을 부지하고자 함이 아니라, 언제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희망?”
“그래, 귀비나 숙부같이 권력을 탐하는 자들보다는 아직 이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더 많으리라는 희망.”
“…….”
“그리고 그대를 뒤쫓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뒤쫓는 자는 절대 앞서 나가지 못함을 안다. 나와는 다른 삶이기도 하고.”
“호오!”
진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꼬맹이치고는 제법이군.”
“그대 역시 무인치고 제법이군. 태자를 상대로 그런 언사를 담다니.”
“과찬이야.”
태자의 웃음기 어린 핀잔에 진무가 마주 씩 웃었다.
“어쨌든 마음에 들었다.”
“……?”
“거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지금부터 귀비와 영왕을 쳐 낼 생각이다.”
“뭐라고? 그게 지금?”
태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정필에게 듣기로는 중립을 지키고 있으나 영왕의 사람에 가깝다 했는데, 어찌하여?
“이미 준비는 끝났고, 니가 나의 마지막 패였다. 역만(役滿: 마작 최고의 패)인 것이지.”
“역만이라고?”
“그래. 가장 높고 나오기 힘든 패,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정타.”
진무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태자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대체 이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나인가?”
“뭐가?”
“귀비는 아니더라도 숙부의 편에 선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래 봐야 영왕이 가진 것의 콩고물에 불과하겠지.”
“…….”
“난 위험 부담이 큰 대신에 이득이 많은 쪽에 거는 걸 좋아하거든.”
“그대도 권력을 탐하려는 것인가?”
“권력? 뭐, 좋긴 하지. 하지만 그딴 건 니들끼리 알아서 해. 당장에는 필요에 의해 엮이게 되었지만, 나는 원래 관부라면 아주 질색이거든.”
“……원하는 게 없다고?”
“에헤이, 물정 모르는 소리. 아직 어려서 그러는 모양인데 세상엔 권력보다 중요한 게 더 많다고.”
“가령?”
“돈.”
“돈?”
“그래, 돈. 각오해야 할 거야. 한몫 단단히 잡을 생각이거든.”
진무가 눈을 찡긋거리자 멍하니 쳐다보던 태자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그댄 정말 특이한 인물이군.”
“…….”
이 새끼가 돈 소중한 줄 모르고 처웃네.
“좋다. 만약 귀비와 영왕을 쳐 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마. 어차피 실패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테니까.”
“저, 전하!”
위정필이 황망히 몸을 일으켜 태자를 말리려 들었다.
“어찌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그만하게, 대태감.”
“전하…….”
“기왕 이리 기회가 왔으니 저질러나 볼 생각이네. 실패한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하하.”
“…….”
그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위정필은 더 이상 태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 거래 끝. 덤으로 보위에 오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지.”
“보위를? 내게 지금 폐하를 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이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진무는 태연하기만 했다.
“떼잉, 무슨 그런 역모스러운 발언이냐? 양위다, 양위.”
“양위 선언을 받아내겠다고?”
“당연하지.”
“폐하께서는…… 절대로 그리하실 분이 아니다.”
“걱정 마. 내가 가진 권력이 이제 좀 되거든.”
“…….”
“결정만 해라. 그럼 대신들은 내가 움직여 주지.”
진무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이미 전 대신들의 비리를 모조리 자신이 틀어쥔 상황이다.
국론을 모으는 것이야 무에 어렵겠는가?
더욱이 귀비에게 휘둘려 국정을 어지럽힌 책임을 명분으로 들면 황제를 물러나게 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귀비의 손에 놀아난 무능한 황제 따위보다야 신선한 젊은 피가 훨씬 더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래야 대가를 두둑이 받아내지.
태자보다 황제가 돈을 더 쓸 테니까.
말로만 들었던 황궁 비고를 열어 줄지도 모르고.
황궁 비고, 황궁 비고라…… 캬.
진무는 자기도 모르게 헤벌쭉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태자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혹 감숙의 태자는 그대의 솜씨인가?”
“아, 그거? 눈치챘어?”
“그대와 대화하다 보니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다면 꽤 오래전부터 이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겠군.”
“그렇게까지 치밀하진 못해. 다만, 반드시 내가 너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내가 전지전능까진 아니어도,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 이루거든.”
진무의 말에 태자의 눈빛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가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다. 그대의 말대로 내가 보위에 오르고 나면, 그대는 정녕 권력에 뜻을 두지 않을 것인가?”
“관의 문제는 황제께서 알아서 하시라고. 난 돈만 받으면 충분하니까.”
“한 가지 더, 그대가 나를 도우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말했잖아. 나는 이득이 큰 편이 좋다고.”
“그것 말고는 다른 뜻이 정녕 없단 말인가?”
태자의 물음에 진무는 그저 웃기만 했다.
뭐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나의 눈빛에 굴하지 않은 너의 강단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죽은 이들에게 책임을 지겠다는 그 태도도 무척이나 흡족하고.
“자, 그럼 슬슬 출발할까? 모두를 놀라 자빠지게 해 주러.”
“음…… 좋다.”
진무가 내민 손을 태자가 맞잡고 일어났다.
위정필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외목, 황신은 돌아왔나?”
“아직…….”
진무가 문밖을 나서며 묻자 이동할 준비를 끝낸 외목이 고개를 저었다.
“망할 또라이가 쓸데없이 질질 끌고 있네. 가서 전해. 대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것이니 그 안에 반드시 왕직을 심문한 내용, 특히 흑살서의 독이 황자들의 죽음에 연관되었다는 확실한 증좌를 들고 오라고.”
“알겠습니다.”
“대궁!”
“예.”
“세찬에게 연락을 보내라. 가짜 태자 놀이는 끝났다. 모든 흔적을 지우고 진짜 태자를 찾는 일에서 즉시 손을 뗀다.”
“알겠습니다.”
외목과 대궁이 서로 다른 명령을 받고 몸을 날렸다.
“나머진 황성으로 간다.”
“예!”
* * *
살을 얇게 베어 내던 당세령의 손이 멈추고, 황신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너 이 자식! 그게 무슨 말이야?”
“…….”
눈을 한껏 치뜬 당세령이 왕직의 멱살을 움켜쥐어 당겼다.
하지만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왕직이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궁으로부터 모진 훈련을 받아 온 왕직이었으나, 당세령의 잔혹한 고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도 고통이었으나 흘린 피가 많았음인지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
“…….”
계속해서 같은 말만을 반복해 중얼거린다.
고문에 버틸 수 있게끔 약을 쓰기는 했으나 곧 숨이 끊어질 것이다.
믿어야 하는가?
혼미한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이라 치부해야 하는가?
만약 사실이라면 황궁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누, 누님, 어쩌죠?”
“씨발, 어쩌긴 뭘 어째! 빨리 알려야지.”
당세령이 손에 묻은 피조차 씻어 내지 않고 움직이려 했다.
“황신!”
그때, 고문을 하고 있던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부단주님?”
“여기 있었구나. 속히 움직여야겠다.”
“예?”
외목은 되묻는 황신을 무시한 채 당세령에게 물었다.
“당 소저, 혹 알아내신 것이 있습니까?”
“……?”
고문을 했으니 알아낸 거야 당연하지만, 어째 외목의 표정이 너무 급해 보였다.
“여러 가지를 알아내었습니다. 실로 무서운 계획까지요. 한데 무슨 일입니까?”
“다행이군요. 속히 황궁으로 들어가셔야겠습니다.”
“황궁이요?”
“예. 대전 회의가 열렸습니다. 천주님께서 그곳으로 가시면서 당 소저가 알아낸 내용과 만독전주께서 흑살서의 독에 관련하여 알아낸 것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
당세령과 황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대전 회의가 열렸다고요?”
“예? 예. 한데 왜 그리 놀라시는지?”
“제기랄!”
“……?”
당세령이 소태 씹은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자 외목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최악이네요.”
“그게 무슨?”
“설명은 가면서 하겠습니다. 저는 숙부님이 알아낸 것들을 종합해서 곧장 뒤따를 테니 속히 황궁으로 향해 주십시오.”
“……예?”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대전 회의에 참석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그게…….”
점점 더 모를 말만 하고 있었다.
뭐라도 이유를 말해 줘야 납득을 할 것이 아닌가?
“아니길 바라야겠지만 귀비가 최악을 염두에 둔 거라면……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죽습니다.”
“예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외목이 하나밖에 없는 눈을 멍하니 끔벅이자 참지 못한 당세령이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고함을 질렀다.
“뭘 쳐다보고 있어! 서두르라고, 이 굼벵이 같은 새끼야! 잘못하면 니네 대장은 물론 황궁에 사는 놈들 죄다 씨가 마른다고!”
“…….”
뭐지? 이 익숙한 막말은? 마치 천주와 비슷한…… 그런 느낌인데.
“귓구멍이 처막혔어? 빨리 안 뛰어가?”
“예? 예!”
엉겁결에 대답한 외목이 급히 황궁을 향해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