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6
456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단호하게 내뱉은 다짐에 긴장감이 활시위처럼 당겨진다.
영왕을 비롯해 모든 대신이 진무와 황제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 진무를 바라보던 황제가 스산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목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다 여기는가?”
“……?”
혹시 영왕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니가 곧 천하이듯이 내가 곧 무림이라고.
“……만약 증명하지 못하면 금군의 칼날이 자네가 몸담은 무림을 향할 것이며, 자네를 알고 자네의 이름을 입에 담은 모든 이들의 목이 떨어질 것이다.”
실로 무지막지한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거, 황제씩이나 돼서 협박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정사마를 대표한다니까?
죄를 물으려면 나한테 물어야지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까지 들먹여, 들먹이기를.
하지만 지금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때가 아니었다.
때맞추어 조사를 끝낸 당가가 오고 있으리라.
와중에 확실한 패까지 대기시켜 두었으니 증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그깟 무림을 걸면 또 어떻단 말이냐?
문제는 어떻게 구분을 짓는가였다.
아무리 조정 대신들의 비리를 탈탈 털어 귀비와의 연관성을 밝혀내었다고 해도 어디에 살아남아 암약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부터 반응을 살피며 모든 놈을 의심하고 살펴야 한다.
문신, 무신, 환관에 시비들까지.
어쩌면 이곳을 지키는 시위들 틈에도 놈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귀비와 결탁한 놈들, 궁의 끄나풀들…… 단숨에 뿌리 뽑는다.
“좋습니다. 그리하시지요.”
“…….”
침묵으로 일관하는 황제와 진무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진무의 당당함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내렸다.
“……좋다. 내 그대의 말을 들어 보겠다.”
긴장으로 가득하던 대전에 바람구멍이 난 양, 곳곳에서 압박감에 시달리던 이들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들의 죽음이 독살이라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황제는 기다리지 않고, 연환을 이룬 비수처럼 곧바로 파고들었다.
자, 어떤 것부터 말해 줄까?
귀비와 대궁주의 관계?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첩이었다는 사실? 그도 아니면 황자들의 죽음에 대한 증좌?
진무는 슬쩍 귀비를 쳐다보았다.
살짝 굳어 있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황자들의 죽음에 대한 증좌만으로는 어림 없단 말이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뜻이다. 이미 대응할 방책도 마련해 놓았겠지.
그럼 여기서 상상을 초월해 준다.
“그것은…… 바로 제 스승님 때문입니다.”
“스승?”
“예.”
뜬금없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자신의 스승을 거론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접근 방식에 귀비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진무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완벽하게 꾸며진 것이다.
진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사제지간(師弟之間).
세간에 알려진 것은 화산 금룡협의 묵룡동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진무가 혁련무강의 무공을 이었다는 내용뿐이었다.
물론 진작 진무에 대해 조사했을 귀비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진무가 혁련무강 본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사패오왕뿐.
해서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모두가 거짓이었으나, 전부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무당의 제자이나 사패천이라는 무림 단체를 이끌었던 혁련무강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진무가 귀비를 곁눈질하며 답했다.
눈을 깜박거리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으나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혁련…… 한 번쯤 들은 기억이 있다. 계속하라.”
“우도사의 직책을 수행하던 중 저는 황자들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처방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언가?”
“증상입니다.”
“증상?”
“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실의 태의들조차도 증상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겠지요. 당연합니다.”
“……?”
“제 스승님도 그저 병이라 생각하고 돌아가셨으니까요.”
“하면? 그도 황자들과 똑같은 증세를 보이며 죽었단 말인가?”
“예.”
단호한 대답을 들은 황제가 눈을 찌푸렸다.
“하나, 그것이 독살의 증좌는 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했지요. 하지만 서창 제독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새로운 사실?”
“예. 바로 그가 사용한 독이 황자들이 보인 증상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
진무의 말은 좌중의 경악을 이끌어 냈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고, 황제는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돌려 고개를 떨구고 침묵하는 귀비를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서창 제독 왕직은 귀비가 천거한 자였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수족처럼 부리던 이였다.
와중에 이역만리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같은 증상을 보이며 죽은 자가 있다니.
그저 비리 정도에서 끝났다면 용서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황자들의 죽음과 관계된 것이 확실해지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잘게 떨리는 귀비의 눈동자.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반응은 황제의 마음에 의혹을 더욱 키우고 분노를 더욱 충동질하기 충분했다.
“흉수는…… 왕직이라는 말이더냐?”
“…….”
에라, 이 멍청아. 누가 봐도 귀비잖아!
이 시점에서 왕직을 거론해?
이미 의심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자식이 셋이나 죽었네 어쩌네 하더니…… 저런 걸 황제라고.
좋다. 그럼 여기서 한 번 더 반전을 준다.
“저도 그런 줄 알았지요. 하지만 제 스승이 돌아가실 때, 제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씀이 있습니다.”
“……!”
결정적인 거짓말.
귀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입술이 파래졌다.
눈은 커지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었다.
아마 황당할 것이다.
당시 혁련무강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그녀였지만, 제자라는 진무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 반박할 수도 없으리라.
지금의 그녀는 혁련무강을 몰라야 하니까.
귀비는 그렇다 치고…….
자, 대신들. 이제 너희의 민낯을 드러낼 차례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말년에 얻은 애첩이 독을 쓴 범인이라 하셨습니다.”
“애첩?”
진무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귀비를 지목했다.
“바로 저 여인입니다.”
“……!”
진무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귀비라는 사실에 대신들이 또다시 웅성거렸다.
“……허, 허허허.”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발언에 귀 기울여 듣던 황제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가 무림인의 애첩이었다?”
“…….”
“증좌를 내놓으라 했더니…… 감히 그대가 하찮은 세 치 혀로 나를 희롱할 참인가?”
이내 짙은 노기가 담긴 목소리와 함께 진무를 노려보는 황제.
이해한다.
믿을 수가 없을 테지.
하긴,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황제라는 자리는 수많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곳이기에 황궁에 들이는 예외 없이 철저한 신원 조사를 거친다.
그녀의 신분과 과거에 대해서도 이미 수차례 조사가 이루어졌고, 확인도 모두 끝났을 터.
정말로 그녀가 무림인의 애첩이었다면 귀비로 책봉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 그만큼 치밀하게 꾸며졌다는 이야기였다.
“폐하.”
“…….”
안색을 여러 차례 바꾸며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귀비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저자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계속하여 들으실 겁니까? 무림인의 애첩이라니요. 혁련무강? 그런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으로…….”
“…….”
“폐하, 황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일이기에 참고 견디려 하였습니다. 한데 저자는 제게 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수치와 모멸감을 주고 있습니다.”
귀비의 목소리에 담긴 한스러움에 황제의 미간이 찡그려진다.
“두고만 보시렵니까?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영왕께서 그동안 제게 어찌하셨는지……. 출신이 비루한 제가 비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하신 지 오래입니다. 전에도 증좌 없이 저를 의심하셨지요. 그때도 참고 또 참았건만, 이제는 저 무도한 이와 손을 잡고 왕직이 저지른 죄마저 제게 씌우려 하시다니…….”
귀비가 황제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이리 의심받느니……!”
스릉.
귀비가 품에서 작은 소도를 꺼내 자신의 목을 겨눴다.
“귀, 귀비!”
놀란 황제가 벌떡 일어났지만, 귀비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목을 파고들어 새빨간 핏물을 짜내기 시작한 소도를 더욱 힘주어 움켜쥐며, 그녀가 애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 의심을 받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 제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멈추지 못할까!”
호통을 치며 다가간 황제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당겼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비수가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흐흑, 으흐흑.”
귀비가 힘없이 안기고, 황제는 그녀를 보듬어 다독인다.
정말 대단한 연기력이다.
이건 뭐 기립 박수라도 쳐 줘야 할 것 같았다.
혁련무강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더니, 황제가 불신 가득한 노기를 드러내자마자 태세를 전환했다.
가녀린 모습으로 흐느끼며 피해자를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대전에 모인 이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놀라는 자들, 웅성거리는 자들, 표정을 감추는 자들.
“폐하! 귀비마마를 음해하는 저자를 벌하여 주십시오!”
“벌하여 주십시오!”
이곳저곳에서 진무의 죄를 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이의 따가운 눈총에도 진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진무를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보낼수록 구분은 더욱 명확해졌다.
청상을 비롯해 곳곳에 포진시켜 둔 은위단의 무인들이 작게 신호를 보냈다.
대충의 파악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진무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관복이 거추장스러웠던 데다, 어쭙잖은 관리 행세에도 질린 참이었다.
이젠 내 식대로 처리해 주마.
“휴우…….”
“…….”
작은 한숨과 함께 진무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무림인에서 관인이었다가, 다시 신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거침없는 진무로.
“내 참, 한심스러워서 원. 천하의 주인이라는 자가 고작 여인의 눈물에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뭐, 뭣이! 이노옴!”
진무의 날카로운 비난에 황제의 노기가 천장을 뚫을 듯이 솟구치고.
채애앵!
황궁 시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돌변한 진무의 태도에 대신들을 살피고 있던 청상 등이 엉겁결에 일어나 매서운 기세를 뿜었다.
“지, 진무 도장, 폐하께 그 무슨 무례인가? 어서 엎드려 죄를 청하게!”
영왕조차도 진무의 돌발 행동에 대경해 급히 제지하려 했다.
그는 이미 진무를 겪은 바 있었다.
무언가를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내,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인물.
보기에 따라 안하무인에 가까운 그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설마하니 황제의 앞에서까지 자신의 성격대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무는 놀라 허둥거리는 영왕을 무시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
진무는 자제를 명했으나 황제는 달랐다.
귀비의 애절한 모습에 진무의 무례함이 더해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천장을 뚫고 나갈 지경이었다.
“시위대는 뭣들 하느냐! 저놈을, 저놈과 함께 온 자들을 당장에 추포하라!”
노성이 내질러지고 시위대가 진무를 위협하며 다가왔다.
“이봐요, 폐하.”
“이, 이……봐요?”
“내가 힘이 없어서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설득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뭐라?”
스산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진무의 모습은 위협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놈이 감히! 뭣들 하는 게야! 저 무도한 놈의 목을 당장에 자르지 않고!”
참지 못한 황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명을 내렸다.
“사숙!”
“천주님!”
“주군!”
믿고는 있으나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청상 등이 걱정스럽게 외쳤다.
사방을 빼곡하게 채우며 날아드는 시위들의 검.
“쯧,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진무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슈가가각!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