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8
458화
독연이 사라진 대전 내부는 처참했다.
거대한 태화전의 지붕이 흉물스럽게 터져 버려서가 아니었다.
당세령의 암기에 죽은 시비들,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이들, 황망함에 넋이 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대신들.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참상에도 당세령과 당가는 침착하게 중독된 자들을 한곳에 모으고 독이 퍼지지 못하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뭘 넋 놓고 있어? 빨리 안 움직여? 거긴 저쪽, 아니, 저쪽으로!”
“…….”
이럴 때는 미친 게 더 나은 모양이다.
진무조차도 당황이 채 가시지 않았건만, 당세령은 거침없는 진두지휘로 환자들을 상태별로 빠르게 구분시켰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진무는 물끄러미 황신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처, 천주님…….”
“말하지 마라.”
진무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황신의 중독 증세는 누구보다 심각했다.
독연이 터지기 직전 귀비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던 탓이었다.
“…….”
진무는 착잡한 눈길로 품 안의 황신을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그가 움켜쥐고 있던 송곳을 빼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핏!
뚝, 뚝…….
주르륵 흘러 바닥을 적시는 시뻘건 핏물.
“일단은 도움이 될지도.”
“……!”
진무는 황신의 입에 손을 대 자신의 피를 흘려 넣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중독되는 속도만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충분했다.
독연이 중화된 것을 보면 당가가 해독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틀림없었다.
급히 오느라 양이 충분치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조제법만 있다면 다시 만드는 건 금방이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천주…….”
“미안하다. 내 자만심이 너를 죽일 뻔했구나.”
“……사과도…… 할 줄 아시네요.”
“…….”
무거운 자책에 황신이 희미하게 웃었다.
진무는 그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자신의 피가 약간의 효험은 있었던지, 황신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진 것이다.
“잠시 누워 있거라.”
진무는 황신의 수혈을 짚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주위를 살펴 피받이로 쓸 만한 것을 찾았다.
“……흠, 이거면 되겠군.”
스걱.
오목한 쟁반 하나를 발견한 진무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뚝을 깊숙이 그었다.
주르륵.
시뻘건 핏물이 순식간에 쟁반을 가득 채웠다.
“미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상황을 진정시키고 본격적으로 황신을 치료하기 위해 다가온 당세령이 원형 쟁반에 가득 채워지는 피를 보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황신에게 효험이 있었다.”
“뭐?”
“만독불침에 이른 나의 피다. 다시 해독약을 제조할 때까지 도움이 될 거다.”
“……!”
당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독불침이라고?
무릇 설삼(雪蔘)을 먹으면 추위에, 화리(火鯉)의 내단을 취하면 열기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 하였다.
그러니 만독불침이라면 도움이 되고도 남을 터.
비록 완전한 해독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나, 잠시나마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지게 해 줄 테니 중독된 이들이 당장은 버틸 것이었다.
하지만…….
“멍청한 자식!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이 흘리면 어쩌자는 거냐!”
“…….”
“그러다 니가 죽어, 이 병신아!”
당세령은 피가 담긴 쟁반을 옆으로 치우고 서둘러 진무의 상처를 압박했다.
망할 놈. 잘라도 적당히 잘라야지, 근육이 보일 만큼 자르면 어쩐단 말인가?
속으로 쉼 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진무의 상처에 지혈분을 뿌린 그녀가 암황비포의 일부를 찢어서 손바닥을 묶었다.
“너, 그건 암황…….”
“시끄러워, 이 자식아! 닥치고 가만히 있어.”
“…….”
가문의 귀물 그딴 게 뭔 소용이란 말인가?
정인으로 점찍은 놈이 다쳤는데.
상처의 지혈을 마친 당세령은 진무의 피가 담긴 쟁반을 소중하게 들고 만독전주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짧은 설명에 당가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침 해독약을 다 써 버린 시점이었다.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진 진무의 피라면 해독약을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동안 바쁘게 움직인 그녀와 당가 덕에 대전 안이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휴우……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 어때? 좀 괜찮아?”
“어느 정도는. 어떻게 된 거냐?”
“어떻게 되긴, 왕직에게 토설을 받아 냈지.”
“그랬군.”
다가와 앉아 상처를 다시금 살피던 당세령의 말에 진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들이 사용한 흑살서의 독은 꽤 오래전부터 연구되었던 모양이야. 숙부님의 말에 따르면 이전의 나라를 패망시킬 때 사용되었던 독이라더군.”
“태조가?”
“그래. 워낙 비열하고 악랄한 방법이었기에 황궁의 기록에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태의들도 알지 못한 것이고. 우리도 본가에 연락을 보내 만독전 서고를 몽땅 뒤진 뒤에야 비슷한 증상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지.”
“…….”
결국, 또 백 년 전이다.
주씨와 한씨.
그들 사이에서 생겨난 원한이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깨끗하게 당해 버렸군. 하지만 원한이 그렇게 깊었을까? 저렇게 죽어 가면서까지……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저 시비들은 알지도 못할 것인데.”
“가족들이 볼모로 잡혀 있었던 모양이야.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던 거지.”
“가족……을?”
“그래, 아주 개새끼들이지?”
당세령의 말에 진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누구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죽은 이들도, 독에 당한 자들도, 그리고 자신도.
젠장,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독이 사용되었을 때, 조금만 더 빨리 손을 썼다면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자만과 한순간의 머뭇거림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기랄…….”
“자책하지 마.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거야.”
당세령이 위로하듯이 진무의 등을 토닥거렸다.
“결국 귀비의 음모는 밝혔지만, 마지막 한 수에 당해 버렸군. 상처뿐인 영광이라니…….”
“마지막 한 수?”
“그래, 죽어 버렸으니까.”
“하! 누가 죽었다는 거야?”
“뭐?”
“죽은 건 시비들뿐이야.”
“……그게 무슨?”
진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한숨을 쉰 당세령이 황신의 손에 죽은 귀비를 향해 다가갔다.
찌익, 짜아악.
“……!”
다시 진무에게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얼굴 가죽이 들려 있었다.
“내가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이년은 그냥 대역이야. 진짜는 아마 벌써 궁을 빠져나갔을걸?”
“…….”
“최후의 수단이라 했어. 귀비가 황궁을 차지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진무는 멍한 눈길로 얼굴 가죽을 바라보았다.
대역……이라고? 이런 미친…….
완벽히 놀아났다.
자신이 짠 판인 줄 알았는데 화양이가 짠 판에서 신명 나게 놀아난 것이다.
“하, 하하하하!”
“……?”
갑자기 진무가 대전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황당함에, 허탈함에…….
고개까지 뒤로 젖힌 채 한참을 실성한 듯 웃다가 불현듯 웃음을 뚝 멈추고 고개를 바로 한 진무의 눈빛은 흑요석처럼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랬단 말이지. 이 망할 년이…… 살아 있단 말이지.”
“너…… 왜 그래? 무섭게?”
진무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살기에 당세령이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쿠르르릉, 우직, 우지직.
퍼석, 퍼서석.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기운에 안 그래도 심하게 부서진 태화전이 무너질 듯이 뒤흔들리고, 유형화된 살기는 잔인한 칼날이 되어 주변의 사물을 온통 부수고 찢어 놓았다.
“야, 지, 진정해.”
그녀는 지금과 같은 진무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 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았다.
화를 내거나 사람을 팰 때는 좀 무섭긴 해도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웠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눈빛과 살기에 털이 곤두서고 몸이 떨렸다.
손을 대면 온몸이 난자당할 것만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래…… 그년이 살아 있단 말이지?”
“…….”
진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목.”
“예, 천주님!”
나지막한 목소리에 진하게 깔린 분노 때문일까?
당가와 함께 왔기에 다행히 중독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외목이 급히 달려와 엎드렸다.
“귀비, 아니 화양이를 찾아라.”
“……예?”
“개방, 하오문, 삭월천…… 아니, 전 무림에 나의 이름으로 명을 전해라. 무림이라는 곳에 잠시라도 스쳤던 이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녀를 뒤쫓는다.”
“알겠습니다!”
외목이 힘껏 대답하고 은위단의 무인들과 함께 섬전처럼 달려 사라졌다.
외목 역시 당세령과 마찬가지의 기분이었다.
눈빛에 담긴 살기와 진하게 뻗어 나오는 위압감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고금을 통틀어 무림 최강이라 불리는 괴물의 분노.
그의 포효가 시작되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이 떨쳐 울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령.”
“어? 어?”
진무의 부름에 당세령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황신을 반드시 살려라.”
“……아, 알았어.”
기세에 눌려 하마터면 공손히 대답할 뻔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진무 도장.”
“…….”
영왕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진무의 기세가 너무도 살벌했기에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한 채였다.
“피, 필요한 것이 있으면 관을 움직여서 돕겠네.”
“관?”
영왕의 말에 진무가 피식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필요 없어.”
“…….”
“당신은 수습이나 잘해. 당신의 자리에서…… 태자를 중심으로 말이야. 지금부턴 무림의 영역, 아니 나의 영역이니까.”
스산하게 웃는 진무의 눈빛에 영왕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이 고스란히 위협이 되어 뇌리에 박힌다.
태자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진무는 차갑게 내뱉은 뒤 그대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다른 이들보다 경지가 높아 독에 당하지 않은 천우명과 능서현이 그 뒤를 따랐다.
대전에 있는 자들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 *
순천부를 벗어난 외곽, 북서쪽 완평현(宛平縣)의 한 광산촌.
산자락을 따라 백 호 남짓하게 발달한 촌락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이 인근 광산으로 먹고사는 이들과 그 가족이었다.
고된 노동시간이 끝난 완평에 밤이 찾아오면, 마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주루 거리에 불이 밝혀진다.
술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이들이 취객이 되어 시끌벅적하게 떠들거나 늙은 악공의 음률에 덩실거리며 춤추는 한가한 모습은 언제나와 똑같았다.
주루 거리라고 해 봐야 주루가 몇 개 되지 않았기에 밤마다 모든 가게가 손님으로 가득이었다.
그중 애향루라는 가게를 운영하는 미향은 늘상 그랬듯이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째 오늘은 손님이 없네.”
“그러게요.”
미향의 말에 오래전부터 함께해 온 기녀 춘앵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대답하더니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일어났다.
“어딜 가?”
“소피 보러 가요, 소피 보러!”
“그럼 오는 길에 푸줏간에 들러서 고기 좀 떼 와. 모자란다.”
“아휴, 그런 건 미리미리 준비하지. 알았어요.”
“저런 망할 년.”
춘앵이 신경질을 내며 밖으로 나서자 미향이 욕설을 뱉었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본심일까?
오랫동안 미향과 함께해 온 춘앵은 입버릇처럼 내뱉는 실없는 욕설에 혀를 쏙 내밀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미향은 행주로 탁자를 닦으며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 시진이 훌쩍 지나도록 아무도 가게를 찾지 않았다.
와도 한참 전에 왔어야 할 춘앵도 돌아오지 않았다.
더욱이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리만큼 주변이 조용하고 적막했다.
밤이면 으레 들려야 할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벌컥.
드디어 문이 열렸다.
발소리가 무거운 것을 보면 광부 중 한 사람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늘 작업이 꽤 오래 걸렸던 모양이었다.
필경 평소보다 많은 작업을 했을 테니 술자리가 더 길어질 것은 당연했다.
서둘러야 한다.
이제 곧 손님이 몰아닥칠 테니까.
“어서 오…….”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려던 미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주루의 중앙에 놓인 탁자에 앉은, 익숙한 얼굴의 사내.
“뭘 그렇게 놀라?”
“……예?”
“술이나 한 병 들고 와서 앉아.”
“…….”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티를 그렇게 내서야 기껏 위장한 신분이 의미가 없잖아.”
미향은 대답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열흘이나 걸렸어, 너 찾는 데.”
“…….”
“다시 보니 반갑지? 안 그러니, 화양아?”
홀로 찾아와 미향을 향해서 씩 웃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