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69
469화
진무가 무당을 떠났을 무렵, 중원 북부 전역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강, 감숙, 섬서와 산서, 그리고 하북.
다섯 성도의 북쪽 경계가 각 세력에서 파견된 무림인들로 채워졌다.
기존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던 이들은 인근 관의 권고대로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산서성 최북단의 도시 대동.
수천의 가옥으로 이루어진 그곳 역시 비워지긴 매한가지였고, 빈집에는 검혜가 이끄는 구파의 무인들이 저마다 세력을 나누어 야영지를 꾸렸다.
“검혜 어른.”
“오, 운암. 어서 오게.”
곤륜파로 돌아가 풍환의 장례를 마치고 합류한 운암이었다.
스승의 위패를 모시자면 몇 년이나 돌아가 있어야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일찍 나섰고, 대동을 맡게 된 검혜의 지시로 북쪽 다섯 길목에 배치한 척후를 살피고 온 길이었다.
“상황은 어떠한가?”
“아직 이렇다 할 것은 없으나 북쪽에서도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음…….”
운암의 말에 벽운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에서 시작된 피난 행렬.
드넓은 초원을 주거지로 삼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경계를 넘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초원의 경계에 홍건을 쓴 이들이 나타나 애 어른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한 학살을 시작했다고 했다.
소문을 전해 들은 이들 또한 그들을 피해 남쪽으로 줄지어 도망쳐 오고 있었다.
“망할 놈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토록 잔인하게.”
“…….”
“제갈 대군사의 전언에 따르면 피난하는 이들을 별도로 분류하여 살피라 했네. 그들 틈에 궁의 무리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며 말일세.”
“옳은 말입니다. 일단 초원에서 넘어온 이들은 따로 모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조사가 끝나면 남쪽으로 내려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날 것인데…….”
“음…….”
운암의 말에 벽운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피난민들이 얼마 되지 않으나 그 수가 늘어나면 모두 조사하는 것이 힘에 부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다른 관문 쪽에서도 동일한 우려를 표한 참이었다.
“하지만 힘없는 이들을 외면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곧 소집을 마친 군이 이동을 시작한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최선을 다해 버텨 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운암은 답을 마치고 물러나려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려 물었다.
“혹 진무 도장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자네가 궁금해할 듯하여 개방에 연락을 보내 보았네.”
“…….”
“무당을 떠난 지 보름쯤 되었다 하였으니 지금쯤 사패천이 담당하는 하북에 도착하였을 것이네.”
“하북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북의 경계가 뚫리면 곧장 자금성이니. 아마도 그쪽이 가장 위험하다 판단한 것 같네.”
“…….”
운암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벽운영이 넌지시 물었다.
“괜찮은가?”
“…….”
무엇에 대한 것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짐작하고도 남았다.
풍환의 죽음.
진무와의 비무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모두가 등선이라 포장하지만 죽음은 죽음.
스승의 끝을 지키지 못한 운암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어렸다.
“진무 도장을 탓하지 않는가?”
“어찌 탓하겠습니까? 되레 감사할 일이지요.”
“……그러한가.”
“미소 지으셨다 합니다.”
“…….”
“비록 생의 마지막에서야 뜻을 이루셨으나,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가셨다더군요.”
그 사실을 떠올리자 기분이 나아졌는지 처연했던 미소가 환해졌다.
“그리 생각하니 다행일세.”
“예. 이번 일이 끝나면 술이라도 한잔 청할 생각입니다.”
“술이라…….”
벽운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리 호상이라지만 스승을 잃은 아픔을 계속하여 거론하는 것은 적잖은 상처가 될 터였다.
“어쨌든 피난 행렬이 늘어날수록 적의 본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는군.”
“그렇습니다. 한데 듣자 하니 저들이 독을 쓴다 하던데?”
“흑살서의 독이라는 물건이라네. 하나 해독약이 본격적으로 제조되는 중이니 걱정할 것 없네. 필요한 양이 적지 않아 시간이 걸리는 듯하네만, 궁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는 당도할 게야.”
“다행이군요.”
“그래.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네. 각지의 길목이 뚫리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환란이 일어날 터이니.”
“예. 그럼 저는 잠시 쉬었다가 새벽녘에 감찰단의 무인들과 함께 피난민들이 머무는 마을 안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안쪽을?”
“예. 많은 이가 머물고 있으니 이런저런 분란이 많을 것입니다.”
“좋네. 그리하게.”
* * *
날이 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무맹의 무인들은 휴식을 취할 시간조차도 부족했다.
북쪽에서 온 피난민들을 조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가?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는가?
세세히 조사해야 했기에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되고 있었다.
“어이, 거기! 기다리라 하지 않았나!”
조사 책임자를 맡은 화산파의 현화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아니,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저쪽은 벌써 조사가 끝났는데!”
현화의 짜증을 받은 텁석부리 사내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그 분위기가 곁에 있던 이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저쪽은…….”
날이 지날수록 피난 행렬이 점점 더 늘어났고, 조사 대상은 쌓여 갔다.
결국, 조사관들은 가족 단위로 이동해 온 이들과 개인으로 온 이들을 구분했다.
아무래도 노모를 모시고 왔거나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은 위험성이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조사 대상에게 말했다가는 혼란이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현화는 잠시 망설이다 사내를 달랬다.
“어쨌든 조금만 기다리시오. 저쪽은 저쪽 나름대로 재조사를 해야 하니까.”
“이런 젠장! 뭔 관군도 아니면서…….”
투덜거리며 물러나는 그들의 모습에 도사들조차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궁을 대비해 막았던 다섯 곳의 길목은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어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 궁의 본대가 덮친다면 무인들은 물론 피난민들까지 피해를 입을 판이라 조속한 대책이 필요했다.
“젠장, 대체 인력 지원은 어떻게 된 거야? 벌써 수백 명이나 몰려들었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아니, 궁만 막으면 되는 일이지 어째서 피난민까지 조사하라는 것인지 원…… 대충 하고 통과시키세.”
현화의 불평에 조사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투덜거렸다.
조사는 자연히 느슨해졌다.
“조장님, 저쪽에 인원을 좀 더 보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가족 단위의 피난민들을 살피던 무인이 묻자 조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하면 좋겠으나 이쪽도 바쁘긴 매한가지 아닌가? 일단은 우리 쪽 일부터 마무리 짓도록 하지.”
“……예.”
휘하 무인을 다독거린 조장이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자, 다 되었다. 이름이 탁이라 했더냐? 이걸로 가다가 당과라도 사 먹거라.”
“예?”
고사리손에 쥐여진 동전에 탁이라 불린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아비의 눈치를 살폈다.
“이 녀석아, 어른이 주면 감사히 받아야지. 고맙습니다, 나리.”
“허허, 뭘요.”
송구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탁이 아비의 말에 조장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자, 다음!”
탁이 아비가 거듭 고개를 숙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조장이 서둘러 다음 가족을 불렀다.
“자, 조사가 끝난 이들은 저쪽으로 가시오.”
또 다른 무인의 안내에 따라 탁이와 그 아비, 그리고 갓난쟁이를 안은 여인이 서둘러 행렬을 빠져나갔다.
관문을 지나온 대동의 시가지에는 쉴 곳을 찾는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빈집이 없네요.”
“모두 같은 생각이 아니겠는가? 좀 더 찾아보세.”
여인의 말에 탁이 아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두가 다를 바가 없었다.
궁의 학살을 피해 쉬지 않고 달려 지친 터였다.
이제야 안전한 곳에 도착했으니 잠시 쉬어 갈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먼저 온 이들이 선점한 탓에 빈집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저기, 저기서 쉬세.”
탁이 아비의 손가락 끝에는 걸인들이 만든 움막이 있었다.
간신히 비나 피할 만한 보잘것없는 곳이었으나 잠시 눈을 붙일 정도는 될 터였다.
곧 떠나야 하는 그들로서는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그렇게 피난민들로 가득한 대동의 시가지에 밤이 찾아왔다.
지친 피난민들의 코 고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질 무렵, 탁이 아비가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어디 가요?”
인기척에 눈을 비비며 깬 아이의 어미가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소피 좀 보고 옴세. 애들 간수 잘하게.”
“…….”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평소처럼 느긋하게 휘적거리는 걸음에 여인은 관심을 끊곤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움막을 벗어난 탁이 아비는 한참을 걸었다.
자다 깨서 소피를 보려 한다기에는 너무 멀었고,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살폈다.
대부분의 무인이 북쪽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정작 대동의 시가지에는 경계가 느슨했다.
한참을 배회하던 탁이 아비는 으슥한 곳에 위치한 판잣집에서 작은 문양 하나를 발견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갔다.
“암향 십일 호입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들어간 어두운 공간에는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탁이 아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르는 자는 없었나?”
“예.”
“잘되었군.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수좌인 듯한 사내의 말에 탁이 아비, 아니 암향 십일 호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괜찮겠지요?”
“괜찮다마다. 걱정 말게. 대궁주께서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 암향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내리시기로 약속하셨다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이들에게 독을 쓴다는 것이…….”
“…….”
십일 호의 말에 수좌의 눈빛에 순간 싸늘함이 스쳤다.
“이 사람아.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가? 이미 암향들이 투입된 다른 곳에서도 자행될 일이네. 자네는 그저 그들 중 하나일 뿐일세. 자네 가족만 생각하게.”
“…….”
힘주어 다독거리는 사내의 말에 십일 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행 시각은 인시 말(오전 5시)이네. 가족들을 깨워 떠날 채비를 마치고 각자 맡은 지역에 흑살서의 독을 하독하고 곧장 떠나면 되네. 모두 명심하게. 인시 말이네. 절대로 그보다 늦거나 빨라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하자 십일 호도 더는 머뭇거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고단했던 밤이 지나가고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 오는 대동.
아직은 이렇다 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기에 휘하의 무인들과 함께 대동을 순찰하던 운암이 고개를 들어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고요하군.”
무릇 폭풍 전이 가장 고요하다 했는가?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으나, 밤새 하늘 곳곳에서 빛나던 별들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여명을 맞이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스승님…….”
분위기가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일까?
임종을 지키지 못한 스승이 떠오르니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백선.”
“예.”
운암의 부름에 감찰단 때부터 휘하에 있었던 수하 백선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나와 술 한잔하겠나?”
“꼭두새벽에요?”
“…….”
“별일이군요. 부단주께서 술을 다 찾으시고.”
“그냥 뭐, 오늘따라 기분이 좀 그러하군.”
“흠, 시간이 이르긴 합니다만 좋습니다. 부단주님께 특별히 저희들만의 장소를 알려 드리죠.”
“……?”
백선의 말에 휘하의 무인들이 빙긋 웃었다.
“실은 이미 다른 무인들도 몰래몰래 술을 마시는 곳이 몇 군데 있거든요.”
“몰래?”
“에헤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 어디서 술을 구한다고.”
“하하, 알겠네. 이번만큼은 눈감아 주겠네.”
운암이 눈을 찡긋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가에 절대로 피해를 주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던 터다.
피난을 갔다고는 하지만 남의 재산이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너무 빡빡한 통제로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이제 부단주님도 우리와 한배를 탄 겁니다.”
“알겠네, 알겠어.”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그래. 하나 곤히 자는 이들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지붕을 타고 가도록 하지.”
“그러시죠.”
대답한 백선이 휘하의 무인들에게 계속해서 순찰을 이어 가라 말하고 운암을 따라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지붕을 타고 주루임을 나타내는 현판이 걸린 곳 중 가장 큰 전각을 찾아 다가가던 그때.
“부단주님.”
앞선 백선이 갑자기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모습까지 숨기는 것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운암이 백선의 시선을 쫓아 눈빛을 빛냈다.
한 사내가 무언가에 쫓기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이 향하려 했던 주루 안으로 은밀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비록 그 걸음걸이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의 것이라 해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할까요?”
“음, 일단 따라가기만 하지. 피난민들이라고 술 생각이 없겠는가? 어쩌면 저 사람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이 미안하여 저리 조심스러운 것인지도 몰라.”
“예.”
둘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의문의 사내가 들어간 주루로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