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79
479화
전투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자리.
응조의 무향이 이끄는 무인대가 습격당했다는 전서를 받고 지원을 이끌고 급히 달려온 것은 가장 인접한 곳에 있던 만궁(瞞弓)의 무향이었다.
“이, 이게 대체…….”
그의 눈앞에 펼쳐진 전장은 참혹했다.
까아악, 까악.
망자가 남긴 껍데기를 포식하러 수도 없이 내려앉은 까마귀 떼와 피 냄새를 맡고 가득 몰려든 이리들.
“단생!”
“예.”
“만궁대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적의 습격에 대비해 주변을 살피고, 나머지는 전장을 살펴 고하라!”
“예.”
만궁의 명에 부관 단생이 수하들을 나누어 임무를 전하고 시신들 틈으로 뛰어갔다.
까아악!
식사를 방해받은 까마귀 떼가 기분 나쁘게 울부짖으며 날개를 퍼덕거리고, 이리 떼가 으르렁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뿐이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 전장을 맴도는 포식자들을 싸늘하게 응시하던 만궁이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하찮은 미물들이…….”
찌이익.
부채처럼 호선을 그리며 구부러진 활대가 그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투우우웅!
놓인 시위가 제자리를 찾으며 잘게 떨렸다.
분명 살이 놓이지 않았던 활대였다.
그런데 수백이나 되던 까마귀 떼와 이리들이 무언가에 꿰뚫리며 모조리 죽었다.
무형시(無形矢).
오직 기운으로 만들어진 형체 없는 화살.
만궁의 화살은 형체도 기세도 없는 암살기였기에 짐승이 가진 예민한 본능으로도 피할 수 없었다.
짐승들의 사체가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 더해진 지 한참.
전장을 살핀 부관 단생이 돌아와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만궁 님.”
“말하라.”
“피의 응고 정도로 미루어 습격을 받은 것은 대략 반나절 전이며, 시신의 숫자는 모두 팔백입니다.”
“팔백? 적들의 시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
만궁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사이 단생의 보고가 이어졌다.
“전장에 남은 흔적을 봤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두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
“약 일천의 수가 하북으로 향했고, 삼백 정도가 북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두 곳으로 향한 흔적이라.
“삼백은 모두가 절정 이상의 고수인 것으로 보이며, 속하의 눈으로는 경지를 예측하기 힘든 이들이 끼어 있는 듯합니다.”
만궁은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단생이라면 오판을 내릴 리 없다.
그의 말대로 흔적이 두 곳으로 나뉘었다면 하나는 적일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생존자들일 것이다.
현장에 남은 시신이 팔백이니 일천은 필시 궁의 생존자들.
하북으로 갔다면 궁을 버리고 투항했다는 뜻인가?
더 의아한 것은 적으로 추정되는 삼백의 숫자였다.
“어찌…….”
눈가늠으로 전장을 살펴도 그 같은 숫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황상 응조가 패배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전투의 범위가 너무나 협소했다.
응조가 이끌던 무인들의 수는 이천여 명.
적의 습격에 응전했다면 전장이 광범위하게 펼쳐졌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건 마치 절벽 아래에 포위된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듯한 모습 아닌가.
혹시 방어선을 유지하던 놈들이 역공을 시작한 건……?
좋지 않다.
대궁주가 세운 전략의 핵심은 기만(欺瞞), 그리고 상대편 전략가들에게 끼칠 혼란 그 자체였다.
성동격서나 조호이산처럼 하북의 병력을 비울 생각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머지는 필요 없었다.
하북에 방어선을 이루었다는 사패오왕?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무당지검이라는 자를 표적으로 삼은 전략이었다.
대궁주는 중원으로 향하는 내내 계속해서 성장하는 그의 무력에 집중했다.
대랑 오척산부터 소궁주 한승, 그리고 대궁주가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던 북리도천까지도 모두 그에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해서 그를 빼돌리려 한 것이다.
전투를 좀 더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그렇기에 모든 전략은 지금껏 드러난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홍건의 무인들은 애초에 소모품으로 길러진 자들.
때문에 거리낌 없이 암향에게 흑살서의 독을 쥐여 주며 중원 무인들이 아니라 피난민과 중원의 백성을 노렸고, 노인과 여인, 아이들에게 폭약을 들게 해 산화시켰다.
애민(愛民)의 성향이 강한 무당지검이라면 절대로 산서와 섬서에서 발생한 피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적의 군사가 궁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혼란을 느끼며 병력을 빼지 못할지라도 무당지검만큼은 섬서와 산서를 구하려 하북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다섯이 편성되었다.
하북의 사패오왕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을 가진 이들로.
“……설마 놈들이 대궁주의 전략을 알아챈 것인가?”
불길한 가정에 입술을 깨물던 만궁이 단생에게 물었다.
“응조는? 응조의 시신은 어찌 되었는가?”
“보이지 않습니다.”
“…….”
응조가 살아 있다?
하지만 그가 하북으로 내려갔다는 일천의 수에 끼어 있을 리는 없었다.
만궁은 응조를 잘 알았다.
무향이 되었을 때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있었던 녀석이다.
겁 많고 야비한 성격을 가진 녀석이니 만약 녀석이 적에게 습격을 받고 곤경에 빠졌다면 항복보다도 도주를 택했을 가능성이 컸다.
도주에 성공했다면 그나마 좋은 일이나……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면?
만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적의 공격이 시작된 거라면 그들이 누구인지 정체를 확인해 알려야 하고, 궁의 전력을 속속들이 아는 응조의 입을 막아야 한다.
“단생.”
“예.”
“너는 지금 즉시 이 상황을 대궁주께 전하고 돌아가 우리와 함께 대기 중이던 홍건을 천력(天力)에게 합류시켜라.”
“알겠습니다.”
“만궁대의 나머지는 나를 따라 적을 추격한다.”
“알겠습니다.”
머릿속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새겨 넣은 그가 곧장 고개를 숙였다.
만궁과 그가 이끄는 궁수 오백.
그들은 궁이라는 무기를 주력으로 삼기 위해 누구보다 뛰어난 경공과 은신술, 그리고 초감각 수준의 기감을 익혀 왔다.
사패천이 자랑하는 은위단이나 소약벽이 이끄는 살막에 뒤지지 않을 만큼.
“속히 움직여 적의 뒤를 쫓는다!”
“예!”
만궁이 몸을 날리자 만궁대가 그의 뒤를 따라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까아악. 까악.
만궁대마저 떠나간 전장.
유일하게 그곳에 남아 득달같이 먹잇감 위로 내려앉는 까마귀 떼를 바라보던 단생은 품에서 간이 지필묵을 꺼내 전서를 작성했다.
퍼드득.
그가 막 전서구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언가에 놀란 듯 자신의 근처에 내려앉았던 까마귀들이 높이 날아오르더니, 시신 아래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뭐지? 분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다급히 펼친 단생의 기감에 무언가 잡혔다.
“이, 이런!”
활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
슈욱!
단생은 활에서 손을 옮겨 품에 있던 단도를 빼 들었다.
퓻! 슷!
거의 동시에 난 두 개의 소리와 허공에 뿌려지는 핏물.
“씨발, 더럽게 빠르네. 하마터면 뒈질 뻔했잖아?”
“……!”
얕았다고?
분명 닿는 느낌이 있었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단생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소년이 길게 찢어진 볼의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며 웃었다.
“쥐벼룩보다 멍청한 새끼들. 딱 봐도 암살 훈련을 한 놈이 뭐 하러 활을 쓴다고 나대? 저승에서는 비수나 딱 붙이고 살아라, 오늘처럼 머뭇거리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
거침없이 내뱉는 상스러운 말에 단생이 무언가 대꾸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끄르륵…….”
그러나 이미 뚫린 목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단생은 목에서 피를 쏟으며 제 이름답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인정머리 없는 새끼들,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나저나 어디 보자…….”
황신은 쓰러진 단생이 움켜쥐고 있던 전서를 빼내 읽었다.
“돈 많네. 종이 질이 뭐 이리 좋아? 호오, 암어도 아니잖아, 이거.”
상황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개새끼들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만.
툴툴거리던 황신이 단생의 시신을 탁자 삼아 두 장의 전서를 작성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한 장은 단생의 것으로, 또 한 장은 하북에 있는 적생에게…….
그 짧은 시간 안에 단생의 문장과 필체를 흉내 내는 것은 전직 은위단 출신인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크크, 천주님께서 분명히 칭찬하시겠지?”
황신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더 한 스스로가 대견해 뿌듯하게 웃었다.
“자, 그럼 천주님이 기다리실 테니 서둘러 가 볼까?”
가서 보고도 하고, 칭찬도 받고.
“으쌰!”
황신은 기운차게 일어나 송곳을 툭툭 털어 품에 갈무리한 뒤, 무감한 눈길로 전장을 일별하곤 만궁대의 뒤를 쫓아 소리 없이 사라졌다.
* * *
“궁수라고?”
“예. 대략 오백 명입니다. 꽤 기감이 좋은 녀석들이더군요.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
“허, 그런 와중에 교란까지 했어?”
“예.”
“…….”
지름길을 통해 집결지에 먼저 도착한 황신은 해질 때가 되어서야 진무 일행과 합류했다.
그냥 지원군에 대한 동태만 감시하라고 했더니 적에 대해서 파악해 온 것도 모자라 교란까지 했단다.
이런 기특한 녀석 같으니. 하는 짓이 어찌 이리 예쁠꼬?
황신과 아이들이라 부르기를 참으로 잘했구나.
진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르자 황신의 눈빛이 사뭇 초롱초롱해졌다.
어허 이놈, 그리 꼬랑지를 흔들어 대면 내 칭찬을 안 하고는 넘어갈 수가 없지 않으냐?
“잘했다, 신아.”
“헤헤, 뭘요. 눈앞에 적의 전서가 있으니 은위단의 한 사람이자 천주님의 개인 호위로서 적들을 교란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인지상정이고말고, 핫핫핫!”
“그렇습니다, 핫핫핫!”
진무와 황신이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마주 보며 한바탕 파안대소했다.
어쨌든 황신이 알아 온 정보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적이 용기 있게도 오백여 명 정도로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다지 않은가?
그럼 응당 그에 맞춰서 전략을 세워 줘야지.
“놈들의 위치는?”
“음, 흔적을 살피며 오고 있을 것이니 대충 두 시진 정도면 도착할 듯싶습니다.”
진무의 물음에 모원려가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해 답했다.
“두 시진…….”
추격하는 놈들의 경공이 뛰어나다 했으니 그 이하일 수도 있겠군.
진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제 턱을 쓸며 최대한 비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우명!”
“예!”
“다음 전략은…… 불나방 퇴치다.”
“부, 불나방요?”
생소한 전략에 천우명은 물론 모두가 어리둥절해했다.
그럴 테지.
방금 생각한 거니까.
황신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추격대는 궁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놈들.
이런 놈들은 대개 안력이 뛰어나 보이는 것에 의존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그걸 적절히 이용해 줘야지.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놈들의 눈을 속이기 최적인 시간. 더군다나 놈들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진무가 포로로 잡힌 응조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놈이 궁의 핵심 고수라는 건 저쪽에는 심대한 불안 요소라는 뜻.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정보가 누출되는 것만은 막으려 할 것이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구하거나, 죽이거나.
무얼 선택하든지 놈들이 함정에 발을 들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때를 노린다.
자, 어서 오너라, 이놈들아.
급조한 전략 불나방 퇴치, 아니 활을 들었으니 말벌 퇴치라고 하자.
선하디선한 꿀벌에게 해악이나 끼치며 생태계를 교란하는 놈들…….
내 너희를 때려잡기 위해 친히 양봉업자가 되어 주마.